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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믿고 막 간다-85화 (84/729)

# 85

제85장 정령의 탄생

다시 한번 자세히 그녀를 훑어본 천제현은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채향은 태어날 때부터 경맥과 혈궁이 막혀 있어 영기를 흡수하지 못하는 체질이었던 것이다.

이런 체질의 사람들은 아예 수련을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아무리 귀한 약재를 쏟아부어도 흡수를 할 수 없으니 밑 빠진 독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여태까지 채향에게 들어간 자원이면 혼성술사를 몇 명이나 키워낼 수 있었으리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채향은 귀한 약재들을 복용할 수 있었고 그렇게 억지로 연체9성의 수준까지 올라온 것이다.

이 말은 곧 그녀의 가문이 대단한 명문가이며, 그녀가 가문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는 걸 의미했다.

‘엄청난 배경을 갖고 있는 아가씨인 게 분명하군.’

채향의 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데! 내 얼굴에 뭐라도 묻은 거야?”

“아니, 아니요.”

천제현은 굳이 채향의 신분을 알고 싶지는 않았다.

“원령과로 단약을 만들려고 하는데 보조 약재가 몇 개 부족해요. 암시장에서는 금화를 잘 받지 않는 것 같던데 어디 가면 마력석을 살 수 있는지 아세요?”

마력석은 수련, 무기 제조, 약재 조제 등 다양한 곳에 사용되었다.

때문에 대륙 각지에서 실물 화폐로 통용되기도 했다.

“마력석이 얼마나 비싼데! 하품 마력석과 금화의 비율은 10,000대 1 정도 된다고. 그 와중에 암시장의 마력석 상인들은 교활해서 값을 몇 배씩 더 받곤 해. 여기에서 교환하면 손해만 볼걸!”

천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여기에선 금화를 쓸 수 없는데 어떡해요!”

“그럼 내가 하품 마력석 열 개를 빌려줄게.”

주머니를 더듬거리던 채향이 투명하고 영롱한 마력석을 한 줌 꺼냈다.

“일단 이걸 써!”

하품 마력석 10개의 가치는 금화 10만 냥을 상회했다!

‘이런 귀한 것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남한테 주다니!’

천제현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무 쉽게 주네요. 제가 안 갚으면 어쩌려고요?”

그러자 채향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넌 그런 사람 아니잖아. 게다가 내 목숨을 구해준 은인한테 이 정도쯤이야! 자, 사양하지 말고 받으라고!”

천제현은 앞에 있는 아가씨의 성격을 종잡을 수 없었다.

“당신처럼 부족한 것 하나 없는 분이 강시협곡처럼 위험한 장소엔 대체 왜 오세요?”

그러자 그녀는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쓸쓸한 표정을 지었다.

채향은 한숨만 쉴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명문가 아가씨가 따분한 일상에 질려 가출한 것 같지는 않고 뭔가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듯했다.

천제현은 사정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상대를 굳이 추궁할 생각이 없었다,

“전 누구의 신세를 지는 건 딱 질색이에요.”

천제현은 수정조각 열 장을 내놓으며 말했다.

“한 장당 금화 만 냥 정도인데 일단 이거라도 받으세요.”

“어머, 의외인걸!”

채향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눈앞의 평범해 보이는 소년을 훑어보았다.

“너도 평범한 사람은 아니구나!”

금화 십만 냥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이 많은 돈을 가볍게 꺼내놓을 수 있는 자라면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리라.

마력석을 지니고 다니니 물건을 사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천제현은 하품 마력석 세 개를 써서 짧은 시간 안에 필요한 재료를 모두 구매했다.

암시장의 물건들은 모두 어이없을 정도로 비쌌지만, 품질 하나는 믿을 만했다.

천제현은 방을 한 칸 잡고 방 안에 간단한 진법을 시전했다.

수련을 시작할 때 외부의 위협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단약 화로를 꺼내 원령단을 조제하기 시작했다.

원령단은 매우 강한 약효를 지닌 단약으로, 연체8성 정점에 오른 수련자가 이것을 복용하면 연체 9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원령단을 삼킨 천제현은 곧 체내에서 마력이 들끓어 올라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화로 안에 들어간 것 같은 작열감이었다.

흰색 마력의 빛이 그의 주변을 감싸며 하얀 화염이 이글거리듯 회전했다.

원령단을 흡수한 천제현은 마력이 급증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가볍게 한계를 돌파하고 연체9성의 경지로 접어들었다.

경지만 따진다면 채향이나 항호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이 두근거림은 매우 미묘했는데, 마치 또 다른 자신이 숨을 쉬는 듯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힘이 영혼 안에 잉태된 것 같더니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천하의 천제현도 당황했다.

“정령의 탄생은 9성 정점에 이르러야 가능한 것 아니었어? 난 이제 막 연체9성 경지에 올랐을 뿐인데, 이 느낌은 대체 뭐냐고!”

몹시도 미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고대의 힘이 짙은 어둠 속에서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것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정령이 눈을 뜨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혼 깊은 곳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천만 년 동안 잠들어 있던 화산이 일거에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실 영혼은 모체, 정령은 그 안에 잉태된 태아로 비유되곤 했다.

정령의 탄생은 태아의 분만과 마찬가지로 몹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자에게는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 고통은 육체의 감각기관을 초월한 것으로, 영혼이 붕괴되는 듯한 느낌을 가져왔다.

“젠장! 더럽게 아프네! 으아악! 예전에는 이 정도로 아프지 않았는데!”

이를 악물고 버티는 천제현의 얼굴이 땀으로 뒤범벅되었다.

정령의 탄생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일 줄이야!

그러나 포기할 순 없었다.

정령의 탄생이 고통스럽다는 말은 태어나고 있는 정령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뜻이었다.

만약 이번에 실패하면 다음에 다시 기회를 잡는다 해도 그때 탄생하는 정령은 지금 탄생하는 정령보다 훨씬 약할 것이다.

‘크아!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

이 정도의 시련도 견디지 못해서야 어찌 꿈을 좇고 야심을 이루겠는가.

천제현의 목표로 하고 있는 ‘그 영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수천 배, 수만 배는 힘들 것이다.

‘그 영역’을 떠올린 천제현은 절대 무너질 수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방출해라!

폭발해라!

태어나라!

천제현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자 허공에 고대 주문들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마치 혼돈 시대의 각인처럼 강력한 고대의 기운을 띠고 있었다.

체내에 엄청난 기운이 모이자 허공에 뜬 수많은 주문들도 한곳으로 뭉치기 시작하며 거대한 힘을 이뤘다.

이윽고 그 무시무시한 기운이 한꺼번에 뿜어져 나와 주변 수천 장까지 퍼져 나갔다.

그리고.

눈부신 빛이 주변을 뒤덮었다.

천제현의 몸에 두 개의 흐릿한 형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희미한 마신의 형태를, 또 다른 하나는 어두운 고대 마검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정령이 탄생하는 순간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

남하국은 물론이요, 온 대륙이 이 엄청난 기운에 놀라 몸을 떤 것이다!

강시협곡에 먹구름이 드리우더니 광풍이 몰아치고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고대의 신이 현신하려는 듯 음산한 기운이 천지를 뒤덮었다.

콰과광!

대지가 격렬하게 흔들리며 엄청난 기운이이 암시장을 감쌌다.

대주국 상단의 노인, 귀면노자는 하늘을 바라보며 두려운 표정으로 소리 질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이 힘은 대체…….”

대륙 중앙 어딘가.

등에 검을 맨 회색 머리칼의 중년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이 고대의 기운은…… 설마 강시묘의 괴물이 각성한 것인가? 그…… 그럴 리가 없다! 그 괴물이라고 해도 이 정도의 기를 갖고 있지는 못해!”

하늘 곳곳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땅에는 끝없이 지진이 일어났다

협곡 양쪽의 산봉우리에는 산사태가 일어나 거대한 암석들이 굴러 떨어졌다.

황야를 떠돌던 강시들은 천적을 만난 양 일제히 바닥에 옹송그리고 앉아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강시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없는 괴물이다.

그런데 누가 저 괴물들을 저 꼴로 만들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엄청난 힘이 하늘을 뚫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구름 위로 치솟으며 밤하늘을 관통했다.

그 시각, 왕성.

노란색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눈을 떠 멀리 중주성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변이 일어나는 걸 보니 뭔가 엄청난 것이 세상에 나온 모양이군!”

어느 문파.

신선의 풍모로 폐관 중이던 나이 지긋한 수련자가 온몸에 진동을 느끼며 선혈을 뿜었다.

“이 태곳적 힘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옛 궁전.

자줏빛 도포를 입은 그림자 하나가 허공에서 내려와 앉았다.

그의 몸 주변에는 황금 용 아홉 마리가 맴돌고 있었다.

그는 멀리서 느껴지는 위압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저항하기 힘든 위압감이었다.

“마, 말도 안 돼…… 이 힘은 이 세상에 나와선 안 되는 것이다! 대체 어떤 괴물이 이런 힘을 내뿜는단 말인가!”

남대륙, 엘프의 숲.

수려한 외모의 엘프왕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이 달빛처럼 반짝였다.

“인간족인가? 그들의 미래가 기대되는군. 엄청난 인물이 또 한 명 탄생한 모양이야!”

끝없는 창공 위.

해골로 만들어진 거대한 함선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이 함선은 어찌나 거대한지 작은 왕국 하나와도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수없이 많은 강력한 영혼들이 땅에 엎드려 어둠 속의 왕에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왕이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빛은 천지를 꿰뚫어보는 듯했다.

“전승자가 너무 일찍 등장했군. 운명의 실이 엉켜 버렸어.”

***

정령이 탄생하는 순간!

온 세상이 몸을 떨었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자 그 기이한 현상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천제현은 자신이 이 세상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었는지는 깨닫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에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물속에서 헤엄이라도 치고 나온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쌍둥이 정령이라니……!”

천제현은 한 번에 두 개의 정령을 각성시킨 것이다.

첫 번째 정령은 매우 기괴해 보였다.

윤곽만 봐서는 모호한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고대의 신비로운 기운이 맴돌았다.

천제현은 자신에게 운명적으로 부여된 정령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정령은 전생의 정령이었기 때문이다!

시공을 초월했음에도 영혼과 묶인 정령은 따라오는 모양이었다.

‘근데 얘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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