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
제12장 단약 조제
천남성, 성주 저택.
자색 두루마기를 입은 중년의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귀밑머리는 희끗희끗하고 각진 얼굴에는 위엄이 넘쳐흘렀다.
중년의 남자는 두 손으로 족자를 받쳐 들고 뭔가 곤란한 일을 만난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천남성 성주 남궁의!
성주는 도시의 최고 권력자이다.
성주가 순탄한 날을 보낼 수 있을지는 관할 지역에 달려 있었다.
천남성은 왕국의 외진 변방이라 강도와 도적떼, 이민족에다 마수까지 들끓었다.
게다가 풀리지 않는 각종 괴상한 일들까지 수시로 벌어졌다.
때문에 남궁의는 마음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궁의의 흰머리를 늘게 하는 것은 영지의 일이 아니라 사고뭉치 딸이었다!
쾅!
누군가 서재의 문을 거칠게 걷어찼다.
양측에 선 호위병들은 감히 말리지 못 했다.
“아버지! 제가 뭘 가져왔는지 맞춰 보세요!”
남궁혜가 서재의 문을 걷어차며 요란하게 들어왔다.
“야식이에요!”
남궁의는 어쩔 수 없이 족자를 접었다.
“또 무슨 꿍꿍이인 게야?”
“에이, 무슨 말씀이세요. 일하느라 힘드시잖아요. 새벽까지 일하시는데 뭘 좀 드시고 체력을 보충해야죠!”
“엉뚱한 짓 할 생각 말거라.”
남궁혜가 곧바로 주머니를 열고 먹을 것을 하나씩 꺼냈다.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정령 포도주예요. 성 남부에서 사 온 맛있는 생선조림도 있고 성 서부에서 사온 약선죽도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준비한 이건 정말 대단해요……. 초특급으로 맛있는 월광모우 등심구이예요. 일단 맛 좀 보세요!”
남궁의가 등심구이를 쳐다봤다.
“왜 반밖에 없니?”
남궁혜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누가 아버지를 해치려고 독을 넣으면 어떡해요? 제가 직접 먹어봐야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일단 드셔 보세요!”
남궁의는 등심구이를 잘게 잘라 입에 넣고 눈을 감은 채 세심하게 음미했다.
음식에 대한 조예가 깊은 남궁의는 고기가 남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챘다.
“육질이 연하고 고소하며 즙이 많구나. 마수 고기를 이렇게 맛있게 요리하다니 정말 훌륭하군. 어디서 샀느냐?”
남궁혜가 남궁의에게 손을 덥썩 내밀었다.
“그런 건 묻지 말고 돈 좀 주세요!”
남궁의는 일찌감치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터라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얼마나 필요하니?”
남궁혜가 곧바로 대답했다.
“금화 50,000냥이요!”
남궁의는 기가 막혀 쓰러질 뻔했다.
“컥컥……. 뭐, 얼마라고? 금화 50,000냥이라니……!”
“아주 괜찮은 사업이 있어서 투자를 해야겠어요!”
남궁의는 과거에 하도 딸에게 하도 속아서 딸의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않았다.
“용돈으로 200냥 더 줄게. 이게 이번 달 마지막이다. 투자 같은 소리는 앞으로 꺼내지도 말거라.”
남궁혜는 다급해졌다.
“아버지, 믿어주세요!”
“널 어떻게 믿어?”
“천남성에 천재가 나타났어요!”
“그게 뭐 어떻다고? 요새 깔린 게 천재다!”
“그자가 마수 고기 전용 프라이팬을 발명했다고요. 이 등심구이도 그 프라이팬으로 구운 거예요. 바보도 그 프라이팬만 있으면 맛난 마수 고기 요리를 할 수 있어요. 이제 막 사업 초기 단계라서 지금 투자하면 앞으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다고요. 반 년 안에 원금에 이자까지 갚을게요. 아니, 두 배로 갚을게요!”
“그 얘기는 그만하거라!”
“진짜 거짓말 아니에요. 언제까지 가난한 성주 노릇이나 하실 생각이세요? 절 믿으세요. 1~2년이면 부자가 돼서 돈만 아는 친척들을 다 설설 기게 만들 수 있다고요!”
남궁혜가 침이 마르게 설득했다.
그러나 남궁의는 한사코 반대했다.
“아버지는 정말 바보야! 분명 후회하실 거예요!”
“내 야식은 왜 가져가니?”
“이게 어째서 아버지 거예요? 대백이 주려고 사온 간식이라고요!”
남궁혜는 순식간에 쌀쌀맞게 돌변해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남궁의는 딸 문제에 속수무책이었다.
남궁혜는 어려서부터 자주 사고를 쳤다. 그러나 사고를 치는 것도 정도가 있지 금화 몇만 냥이 뉘 집 개 이름인가?
그 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딸이 허투루 돈을 낭비하게 둘 순 없다!
그러나 남궁의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이번은 정말 오판했다는 것을!
천남 약재 시장.
천제현이 공서련을 데리고 시장에 들어섰다.
아리따운 점원 아가씨가 나와서 응대했다.
“어서 오세요. 뭐가 필요하신가요?”
“오금삼과 육색규(六色葵;여섯 색인 나는 아욱), 지잠용(地蚕蛹;번데기), 지장갈(地藏蝎;땅 전갈), 자금골(紫金骨;자색과 금색이 나는 뼈), 그리고 제일 중요한 삼생요충(三生妖虫;세 번 환생하는 벌레)요!”
천제현이 주저 없이 약재 이름을 열거했다.
“모두 두 봉지씩 주세요, 빨리요.”
점원이 침을 삼키며 말했다.
“삼생요충은 아주 귀한 약재라서 천남성 시장에 매달 풀리는 양이 십여 봉지밖에 안 돼요. 손님은 운이 좋네요. 마침 딱 두 봉지 있어요. 한 봉지에 금화 50냥이고요, 다른 약재까지 합해서 모두 291냥입니다.”
천제현이 깜짝 놀라서 멍하니 서 있는 공서련에게 말했다.
“한 봉지는 아가씨 거예요. 일단 아무것도 묻지 마세요.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예전의 공서련이었다면 이렇게 비싼 약재를 절대 사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자기 힘으로 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감과 배짱이 생기고 씀씀이도 대범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쓰린 속을 참으며 금화 291냥을 꺼냈다. 둘은 약재를 챙겨 시장에서 나가려고 했다.
이때 갑자기 살이 터질 것같이 뒤룩뒤룩한 뚱보가 다가왔다.
“잠깐! 삼생요충 두 봉지는 내가 가져가야겠어!”
점원의 얼굴에 공포의 빛이 스쳤다.
“양씨 댁 집사님!”
“내가 누군지 알지? 그럼 잔말 말고 내놔!”
양씨 가문 집사는 키가 작고 뚱뚱한 중년의 사내였다.
그가 다급하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조제하시는 단약이 가장 중요한 단계에 접어들었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네가 책임질 수 있어?”
점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천제현을 쳐다봤다.
“그렇지만 이 손님께서 이미 돈을 지불하셨어요. 이곳 규칙에 따라 판매된 제품을 돌려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염병!”
집사가 점원의 뺨을 올려붙였다.
“규칙은 무슨 규칙이야! 빌어먹을. 짐 싸서 꺼져! 넌 해고야! 앞으로 나오지 마! 어서 꺼져 버려!”
점원이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한 얼굴을 감싸며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여기서 잘리면 전 큰일 나요. 어르신, 용서해 주세요!”
“어서 썩 꺼져!”
집사는 점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제현을 훑어봤다.
집사는 평범한 차림에 기름때에 찌든 천제현을 보더니 무시하는 표정으로 거만하게 말했다.
“이봐, 너 바보야? 아님 귀가 먹었어? 내가 삼생요충을 사야겠다고! 금화 80냥을 줄 테니 어서 그 삼생요충을 내놔.”
처음부터 이 뚱보가 못마땅했던 공서련이 순간 버럭 화를 냈다.
“뭘 잘못 알고 계신 것 같은데 우린 방금 100냥을 지불했어요. 그런데 80냥 받고 물건을 내놓으라고요? 어떻게 그렇게 염치없는 소리를 해요?”
“네놈들이 가져가봤자 귀한 약재 낭비하는 꼴이지. 우리 도련님께선 훨씬 값어치 있는 단약으로 만드실 거야. 그러니 군소리 마라!”
“말도 안 돼! 이거 완전 날강도잖아! 개한테 주면 줬지 당신한텐 못 줘요!”
집사가 미어터지는 얼굴 살을 부들거리며 공서련에게 삿대질을 했다.
“우리 작은 도련님께서는 제약사 조합 회장님의 후계자이시다. 네 약재나 몸뚱아리를 도련님께 바치는 건 영광스런 일이야. 깨끗이 씻고 도련님 시침들 준비나 해! 감히 거부했다가는 천남성에 발도 못 붙일 거다!”
이 말을 마치자마자 뚱보의 말투가 바뀌었다.
“너희는 이미 기회를 놓쳤어. 이제 금화 50냥이야. 이번이 마지막이다. 어서 약을 내놔!”
‘제기랄! 정말 이상하네! 오늘밤은 어째서 이런 모자란 놈들과 계속 부딪치는 걸까? 정말 짜증나는군!’
천제현이 아무 말도 없이 달려와 힘차게 팔을 뻗어 뚱보의 얼굴을 강타했다.
퍽!
아무리 볼 살이 많아도 충격 흡수에는 한계가 있는 법!
그 자리에서 뚱보의 콧대기 주저앉고 이가 몇 대가 나갔다.
뚱보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지르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으억! 감히 날 때리다니!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천제현이 그를 세게 걷어찼다.
“나한테 얻어터지니까 영광스럽지 않아? 너 따위가 누군지 알 게 뭐야?”
뚱보가 울부짖었다.
“날 건드리다니 우리 작은 도련님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거다. 넌 이제 천남성에서 발붙일 수 없어! 넌 죽은 목숨이야!”
“닥쳐!”
천제현이 뚱보의 얼굴을 짓밟았다.
하나 남은 앞니가 부러져 뚱보의 발밑으로 또르륵 떨어져 내렸다.
뚱보는 얼굴이 온통 벌개져서 양손으로 버둥댔지만 천제현의 발을 뿌리치지 못했다.
“아가씨, 뭘 멍하니 계세요? 우리 가요!”
“그래, 가자!”
공서련은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천제현은 정말 거칠어. 주먹 한방으로 저 건방진 놈을 뭉개 버리다니! 이보다 더 짜릿한 게 어디 있어? 통쾌해!’
공서련은 의기양양하게 천제현을 따라 시장을 빠져 나왔다.
그런데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파랗게 질려서 천제현과 공서련을 역병환자 보듯 피했다.
***
천제현은 약방을 하나 빌렸다.
공서련이 방금 전 일을 떠올리며 걱정했다.
“이봐, 천제현. 개도 주인을 봐가며 때리라고 했는데. 그 뚱보는 양씨 가문 집사잖아. 거긴 용병 가문이라고. 여러 도시에 세력이 퍼져 있어. 실력도 무척 강하고. 우린 아예 상대도 안 돼. 만약 그쪽에서 시비를 걸면 어떡하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세요.”
천제현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 천제현은 사람을 가려가면서 때리지 않아요. 또 놈은 일개 하인일 뿐이잖아요. 하인 주제에 그렇게 건방지다니. 맞아도 싸요.”
용병은 개인이 거느린 군대로 대륙에서 매우 유행하는 직업이었다.
용병은 지역법이 아닌 용병법의 규제를 받기 때문에 매우 자유롭고 영향력이 크다.
양씨 가문은 60년 전에 용병 업계에 뛰어들었다.
수십 년 동안 안정적으로 성장하며 10,000명이 넘는 용병부대 세 개와 5,000명이 넘는 용병부대 다섯 개를 세웠다.
거기다 후방 부대 인원까지 합한다면 병사수가 총 십만이 넘는 거대한 용병 가문이다!
양씨 가문의 용병은 여러 도시에 퍼져 있었으며 천남성도 하나의 분파였다.
그 집사는 바로 양씨 가문의 사람이었고.
이렇게 배경이 든든하니 집사가 건방을 떨 만했다.
공서련의 눈에서 한스러운 눈물이 흘렀다.
“언니가 양씨 가문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해친 것 같다고 했어. 하지만 양씨 가문의 세력이 너무 커서 성주님도 두려워하시는 마당에 우리가 뭘 어쩌겠어.”
“정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