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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202화 (완결) (202/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에필로그 (2)(完)

세상에는 많은 미스터리가 있다.

어떤 호수에는 공룡이 살고 있다더라.

도대체 피라미드는 어떻게 만든 것일까.

몇몇 호사가들은 그런 것들을 모아서 세계의 10대 미스터리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중에는 고려의 해동천황도 포함되어 있었다.

14세기 중반 무렵.

고려는 눈에 띄게 발전한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한때는 원나라에게 굴복했던 고려가 불과 10년 사이에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머지않아 동방의 패권을 사로잡는 기염을 토해냈다.

칭기즈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그가 육로를 따라 유럽까지 자신의 영향력을 펼쳤다면 해동천황은 바닷길을 통했다.

수백 년 동안 고려는 바다의 제왕이 되어 아시아 전역에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문제는 그게 어떻게 가능했냐는 것이다.

그건 어떻게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이륜과 같은 시대를 뛰어넘는 발명품이 쏟아져 나온 탓에 심지어 해동천황이 외계인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나돌았다.

심지어 수백 년 전부터 고려의 황실에는 미래를 예견한 해동천황의 예언서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황당한 소문도 있었다.

“과테말라면··· 혹시 장사의가 이끌고 떠났다는 그 탐사대의 흔적입니까?”

고민완이 질문을 하자,

이운계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동료 교수 중의 한 명이 그 전설과 같은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서 매년마다 과테말라에 다녀오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현지 가이드를 해주던 이가 특이한 흔적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확실한 겁니까? 마야 유적지가 최근에 발견되고 있던데 그중의 하나 아닌가요?”

“나도 듣기만 한 거라 확실치는 않아. 하지만 이걸 한 번 봐봐.”

그는 곧장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녹음이 울창한 밀림 속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몇 글자가 풍화되어 정확하게 어떤 글이 새겨져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훈민정음이 확실해 보였다.

“거기 원주민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중에 흥미로운 게 있다네.”

“그게 뭔가요?”

“불을 뿜는 나뭇가지에 대한 것인데 심지어 화약을 의미하는 것 같은 검은 가루에 대한 것도 있다고 하더라.”

“혹시 스페인 사람들 이야기 아닌가요?”

“그건 아닌 것 같아.”

이운계는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오히려 스페인 병사들과 치열하게 싸우며 승리를 거뒀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선배의 동료 교수도 그러한 이야기들 때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사비까지 들여가며 그곳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당연히 고민완의 결정은 빨랐다.

그 역시 진실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학자이기 이전에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고려가 14세기에 북미와 남미까지 다녀왔다는 증거는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남미의 품종인 고구마와 감자.

그리고 아스텍과 마야 문명의 보물들.

모든 것이 그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초의 탐사대를 이끌었던 장사의의 행방은 전혀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과연 그는 어디서 어떻게 최후를 맞이했던 것일까.

*

그로부터 2년이 흐른 뒤.

국립중앙박물관에 특별전이 열렸다.

전시회의 테마는 <고려, 대항해 시대를 열다>였고 그곳에는 당시 사용된 증류기부터 시작해서 모형 쾌속선까지 전시되었다.

하지만 역시 메인은 장사의가 데리고 떠난 탐사대의 흔적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이걸 위해서 우리가 그 고생을 했다니···.”

이운계 교수는 자신의 업적 중의 하나가 된 과테말라 발굴품이 드디어 고려에서 전시된 것을 보고 감개무량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옆에 서 있는 고민완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정말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의 고생을 했다.

이운계와 고민완은 과테말라의 정글을 3개월이나 헤맨 끝에 결국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마야 유적지 중의 일부에서 고려에서 온 이방인의 흔적이 묻어나왔기 때문에 과테말라 정부는 난감해 했다.

과테말라인이 가진 자부심 때문이다.

그들은 남미와 중미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의 병사들을 물리쳐서 나라 밖으로 내쫓은 역사를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 무렵에 그들의 땅에 있던 마야 문명은 나날이 쇠퇴하고 있었으나 전설로 기록된 도시 하나만큼은 반격에 성공했다.

그런데 그게 고려인의 후손들이라니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강대국인 고려의 여러 회유로 인해 그들은 발굴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박물관에서 전시회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적지가 발굴되기 전에 이미 고려는 과테말라와 꽤 커다란 경제 원조를 맺었다.

무려 수천억에 달하는 규모였다.

마침 그걸 이용해서 교통과 수도 등의 인프라 시설이 건설되기 시작될 시점이니 쉽게 볼 일은 아니었다.

“1년만 도와달라더니 이게 뭡니까?”

“나도 2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

“교수직을 안 뺏긴 게 다행인 줄 아세요.”

“너도 내년부터는 다시 강의 들어가는 거지?”

고민완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했던 일정보다 훨씬 더 길게 연구년을 사용해서 더는 미룰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성과가 나왔기에 다행이었다.

연구년을 2년이나 쓰고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면 교수직조차 위험해졌을 것이다.

국립 평양대학교의 교수직을 원하는 이들은 셀 수 없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보람은 확실히 있었다.

발굴 과정에 크게 도움을 준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훈민정음이 아닌 한자로 쓰여진 여러 비석이 발견되어 한 몫 거들기는 했다.

무엇보다 전설로만 여겨지던 장사의의 탐사대가 남긴 후손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무척이나 큰 성과였다.

<마야의 고대 도시, 기햐크>

연구 논문도 거의 완성 단계였다.

기햐크라는 단어는 현지에서 발견된 도시의 이름이었는데 귀향(歸鄕)이라는 염원을 담은 단어가 어원이 아닌가 의심되고 있었다.

발굴해낸 도시 곳곳에서 그 단어가 반복해서 나오고 있기에 나올 수 있는 추측이었다.

실제로 그 인근에 사는 원주민 부족에게는 고려에서 쓰는 단어와 매우 흡사한 아빠와 엄마 같은 언어의 흔적이 제법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은 16세기에 끊겼다.

그곳에 살던 이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과테말라에는 폐허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인근에 있는 티칼(Tikal)과 엘조츠(El Zotz) 주변을 샅샅이 뒤져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전쟁의 흔적은 없는 거로 보아 가뭄이나 질병으로 인해 도시를 떠난 것 같았다.

과테말라의 페텐 지역에서 그 이후로 고려의 흔적이 묻어있는 도시는 나오지 않았다.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은데 저녁에 사람 더 몰리기 전에 여기는 정 교수에게 맡겨 놓고 우리는 식사나 하러 가자.”

“정호철 교수님은 같이 안 가고요?”

“번갈아 가면서 다녀와야지. 자리를 비워 놓을 수는 없잖아.”

“그런데 과테말라 대사관이랑 외교부에서 온 손님들은 벌써 가셨어요?”

이운계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들은 전시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거의 매일 박물관에 와서 상태를 살폈다.

오늘은 그냥 기념 사진을 찍으러 온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영구 임대도 아닌데 어찌나 생색을 내던지.”

“그래도 승인을 해준 게 어디에요. 처음에는 손도 못 대게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역시 나라에 힘이 있어야··· 이런! 아무래도 식사는 너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왜요?”

“내일 온다던 학회장이랑 임원들이 왔네.”

그의 시선을 따라 고민완이 고개를 돌리자 백발의 어르신들이 여럿 몰려왔다.

아마도 고고학회에 소속된 이들 같았다.

“저는 신경 쓰지 말고 다녀오세요.”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은데 배고프면 먼저 식사하고 와.”

“저는 상설 전시관이나 한번 둘러볼게요. 끝나면 연락해주세요.”

“수백 번도 더 갔을 텐데 안 지겹냐?”

“항상 새로운 유적을 찾아다니는 선배는 이해 못 할 무언가가 있어요.”

박물관은 고민완에게는 쉼터였다.

매번 올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 사뭇 달랐다.

현대적인 예술보다 오래된 것들에게서 느껴지는 정취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그래서 사학과를 전공하고 고고학 전공인 선배와 같이 일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지는 않았다.

그가 박물관에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은 고려의 상설 전시관 부근에서 보냈다.

그곳에는 당시 만들어진 이륜 등을 복원한 물건과 함께 온갖 미술품이 가득했다.

해외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르네상스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예술이 부흥하던 시기로 알려졌다.

실제로 당시에 그린 미술품 상당수를 보기 위해서 수많은 해외 관광객이 고려를 찾아올 정도였다.

고려는 정말 운이 좋았다.

땅 밑에 보물 창고가 제법 많았다.

역대 황제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각자의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품을 만들어서 전시하고 일부는 지하 창고에 감춰놓았다.

거기에 더해서 민간인들이 대대로 물려주며 보관한 미술품도 적지 않았다.

“엄마, 이건 뭐야?”

“표석이라고 하는 건데 북해도에 해동천황님이 세워놨던 거야. 북해도가 어딘지 기억나?”

“당연하지. 작년에 아빠랑 갔던 곳이잖아.”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아이와 엄마는 박물관의 넓은 복도에 세워 놓았던 표석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것은 과거 해동천황이 영토를 넓힐 때마다 세웠던 표석 중의 하나인데 그중의 하나를 평양의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북해도와 부상도 그리고 연주까지.

고려는 드넓은 영토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는데 북해도에는 겨울이 되면 스키를 타러 수많은 이들이 여행을 하는 곳이다.

더구나 고려식 전통 온천도 즐길 수 있기에 해외에 오는 방문객도 꽤 비율이 높았다.

표석을 지나쳐 상설 전시관 안으로 들어간 고민완은 다른 전시품을 지나쳐서 곧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몇 장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이성계와 최영 그리고 정몽주와 정도전 등의 당대 최고의 명성을 쌓은 이들도 있었으나 그가 주목하는 것은 한 장의 초상화였다.

그것은 해동천황과 황후의 초상화였다.

이 그림이 특별한 이유는 황제 본인이 직접 황후를 그리고 자신 역시도 흐릿한 거울을 보며 그렸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예술에 소질을 보인 황제의 작품은 적지 않았는데 이곳 박물관에도 여러 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림 만큼 임팩트는 없었다.

고민완은 이곳에서 두 사람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뭔가 마음이 아련한 기분이 느껴졌다.

해동천황이 말년에 위암을 앓으며 투병하는 중에 그려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죽기 전에 함께 그려진 그림 하나를 남기고 싶다는 애절한 마음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오늘따라 느낌이 더 아련하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한두 번 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몸을 돌리니 3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이 서 있었다.

갈색 코트를 입고 스카프를 둘러서 그런지 꽤 분위기가 있어 보였고 명품으로 보이는 가방과 액세서리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박물관과 어울리진 않았다.

평소라면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텐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에게 반가우면서도 아련한 감정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툭 건드리면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30대 중후반이 될 때까지 이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던 터라 환장할 지경이었다.

“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당황한 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보는 남자가 그것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고민완을 바라보다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녀 역시도 뭔가 홀린 것 같았다.

평소라면 기겁을 하고 물러섰을 것이다.

잠시 마주 보고 서 있던 두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초상화에 그려진 해동천황과 황후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정작 두 사람은 알 수 없었으나 운명이 이끌어준 만남이었다. 아마 지금 초상화 속의 해동천황과 황후가 말을 할 수 있었다면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긴 세월 돌고 돌아서 결국에는 약속했던 것처럼 우리 다시 만났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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