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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201화 (201/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에필로그 (1)

[부디··· 이 나라 고려를 굽어살피어 주시옵소서]

마지막 대사가 끝난 뒤.

OST와 함께 엔딩 크레딧이 올라왔다.

워낙 유명한 명언(?)이라 고려에 사는 이들치고 저 대사를 모르는 이들은 없다.

고려의 전성기를 이끈 해동천황이 죽는 순간에 중얼거렸다고 알려진 덕분이었다.

실제로 고려실록에 훈민정음으로 그 말이 적혀 있었는데 그가 얼마나 고려와 백성을 아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했다.

고려의 최전성기를 만들어낸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는 끝났으나 가장 앞자리에 앉은 고민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오늘 영화를 보러 온 목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관객은 이미 일어나 나가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만석이던 상영관에는 끝까지 남아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드디어 엔딩 크레딧에 그의 이름이 보였다.

<역사 자문 : 국립 평양대학교 고민완 교수>

그걸 본 고민완은 만족스러웠다.

교수의 자리에 오른 뒤에 고려 시대의 고증을 위해 여러 자문을 했으나 이번처럼 깊게 참여한 작품은 없었다.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 봤으면 가자.”

“선배님 이름 올라온 거 봤어요?”

“뭐 이런 자문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니라 그리 큰 감흥도 이제는 없어. 사골처럼 우려먹는 해동천황 이야기잖아. 최근 들어 저 시대를 배경으로 만든 드라마랑 영화가 몇 편인 줄 아냐?”

고고학을 전공한 이운계 교수.

그는 이번 영화에서 미술 감독과 함께 소품과 의상을 비롯한 다양한 고증을 맡았다.

그렇게 이번 영화에서 고증에 참가한 학자들만 십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확실히 영화에서 오류는 없었다.

거액의 제작비를 들여 고증을 빡시게 한 티가 났는데 요즘에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고증을 엉터리로 하면 온갖 욕을 다 먹었다.

그 덕분에 역사학도 일부는 아예 사극 제작을 하는 스튜디오에 취직한 경우도 있었다.

원래 이렇게 볼 영화는 아니었다.

관계자가 초청되는 시사회에 초대되었으나 두 사람은 해외 세미나 일정이 있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영화는 예상대로 흥행에 성공해서 자리조차 없는 탓에 떨어져 앉아서 영화를 봐야 했다.

하지만 둘 다 자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남자 둘이 나란히 앉아 오붓하게 영화를 함께 보는 취미 따위는 없는 두 사람이었다.

오히려 따로 앉는 것이 서로 편했다.

“그래도 뿌듯하잖아요.”

“그깟 이름 한 줄 나오는 게 뭐 그리 대단하다고··· 너도 이제 이런 일이 쏟아져 들어올 테니 일상으로 받아들여.”

선배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는 고려에서 고고학자로 꽤 유명했다.

방송 출연도 자주 하는 덕분에 인지도도 높았으나 학자로서의 명성도 낮지 않았다.

해동천황 1세의 황릉 밑에 보관되어 있던 부장품의 단초를 발견한 그는 오랜 추적 끝에 그 밑에 잠들어 있던 문화재를 발굴해냈다.

고고학 역사에 기록될만한 업적이었다.

해동천황의 묘 아래에서 나온 물건들은 하나 같이 국보급이었고 상태도 온전하여 고고학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도 나왔다.

당연히 그 이후로 이운계 교수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을 정도였다.

고민완도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이운계 교수의 고고학 팀은 아니었으나 고민완은 역사학 교수님과 함께 프로젝트에 참가한 덕분에 이렇게 친분도 맺었다.

그 당시의 흥분됨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예술품 외에도 그 시대의 상황을 기록한 서책도 수두룩하게 발굴되었다.

그런데 둘이 어떻게 친해졌을까.

서로 다닌 대학교는 다른 곳이고 당시에는 교수와 대학원생의 신분이었던 상태였다.

그들을 연결하는 끈은 고등학교에 있었다.

한양에서 명문이라 일컬어지는 학교 동문이란 이유로 이운계 교수는 5년 후배인 고민완을 무척이나 아껴주었다.

하지만 학연이 전부만은 아니었다.

고민완은 어린 시절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14세기에 집중했다.

더구나 최근에는 한자에 해박한 고민완과 달리 기본적인 한자조차 익히지 않는 역사학 전공자도 상당히 많이 있기 때문이다.

『고려실록』 공민왕 5년(1356) 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성(訓民正音成,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665주년이 됐다.

그 시간 동안 수많은 순우리말이 보급된 덕분에 한자는 고려에서 거의 퇴출 당했다.

역사학자 중에서도 17세기 이후를 연구하는 이들은 간단한 한자만 공부해도 충분히 전공 연구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모처럼 재미있게 했던 작업이라 선배의 말처럼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리고 이번 영화는 인간적으로 길어도 너무 길어. 요즘 세상에 3시간이 말이 되냐?”

“크큭, 조금 심하기는 했죠.”

그건 고민완도 동의했다.

요즘 추세는 100분 정도에 불과했다.

세상이 빠르게 바뀜에 따라서 사람들은 지루한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화장실을 가려는 건지 영화 중간에 일어나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한편으로는 이해되었다.

이번 영화는 해동천황의 일대기를 다룬 것인데 도무지 추려낼 내용이 없기는 했다.

만약 자신이 영화감독이었으면 훨씬 더 길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 시대를 배경으로 몇 편은 찍었을 것이다.

고려의 황금기라 불리는 시절이다.

워낙 영화화하기 좋은 소재가 많았다.

더구나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위인 중에서도 독보적인 1위에 오른 해동천황이다.

흥행의 보증 수표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가서 밥이나 먹자.”

“생각하신 메뉴라도 있으신가요?”

“모름지기 해외를 나갔다가 돌아왔으면 얼큰한 한식을 먹어야지”

“로마에서도 한식당만 가셨던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요즘 고려 음식은 세계적인 붐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시작이 요즘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유럽 등에 고려니즘(Goryeonism)이라고 불리는 엄청난 유행이 시작된 것이 거의 수백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는 고려의 모든 것이 유럽과 같은 상류층에서 소비될 정도였다.

고급 연필과 이륜.

그림과 조각을 비롯해 청자까지.

열풍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게 없었다.

각국에 생긴 고려촌이라는 고려인 밀집 지역도 음식 문화의 전파에 앞장섰다.

요즘은 세계 어디를 가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도시에서는 고려촌 하나쯤은 있었다.

“현지화된 한식이랑은 차원이 다른 음식이니 어서 따라와. 완전히 다른 세상을 보여줄게.”

이운계는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어딜 가냐고 묻는 고민완을 데리고 간 곳은 예상 외의 곳이었다. 그곳은 무려 640년의 전통을 가진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사선당 Since 1380>

간판에 붙은 숫자만 보더라도,

가게의 역사가 엄청나다는 것이 보여졌다.

이게 가능한 이유가 있었다.

사선당은 고려 황실의 사선서에서 대대로 직접 관리하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황실의 음식을 준비하는 사선서에서 은퇴한 이들은 보통 이곳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그만큼 솜씨가 엄청났다.

더구나 고려의 음식 문화에서 사선당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고춧가루를 사용한 김치부터 떡볶이까지 새로운 음식을 선보이며 유행을 이끌어가는 곳이 바로 사선당이기도 했다.

현재 보편적으로 먹는 음식의 상당수가 사선당에서 개발되었다고 봐도 되었다.

“이곳은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잖아요?”

“당연히 예약을 해놨지.”

“소문에 의하면 예약해도 거의 1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곳이라고 하던데 여길 가족도 아니고 저랑 같이 가시겠다고요?”

“여기 사장님이 얼마 전에 랑카에서 고려 유물을 회수해오시는 데 내가 도움을 조금 드렸더니 한번 식사하러 오라고 했거든.”

그렇게 말하며 이운계는 후배인 고민완의 등을 두드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를 뒤따라 걷는 고민완은 선배의 폭넓은 인맥에 다시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안으로 들어간 둘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조용히 식사할 수 있는 방에 앉았다.

인테리어도 매우 고급졌다.

전통 문양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패턴과 소품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외국에서 오는 귀빈을 대접하는 식당다운 모습이었다.

그들이 자리 잡은 방도 대사관 등의 접객을 위해 항시 비워 놓는 자리라고 단아하게 입은 종업원이 살짝 귀띔해주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도와줬는데 이런 융숭한 대접까지 받으시는 겁니까?”

“별거는 아니고 마두라이의 제후국이었던 랑카의 초대 왕인 이인임이 쓴 일지 알지?”

“설마 그게 국내로 들어온다고요?”

이인임의 일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리 많은 이들이 알고 있진 않았으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은근히 소문이 돌고 있었다.

하지만 개인 소장품이라 그 실체를 직접 본 이들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인임의 일지는 꽤 의미가 깊었다.

고려와 랑카의 700년 가까운 동맹 관계의 연결점이 바로 그의 손에 의해 탄생했다.

랑카의 입장에서도 국보 수준으로 취급할 물건이었다.

“아직 아니야.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면 박물관에 기증하실 예정이라더라. 하지만 아무리 민간 영역에서 성사된 거래라도 랑카 정부에서 쉽게 내주진 않을 거야.”

“하긴 그곳의 입장도 이해가 되기는 하네요.”

“어려운 문제야.”

이게 과연 일개 음식점 사장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싶다가도 사선당이라 수긍이 되었다.

아마 공식적으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하니 민간 외교 영역으로 풀려던 것은 아닐까.

어차피 이곳의 사장도 대대로 외교관 출신이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세미나를 다녀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뉴스나 봐볼까?”

이운계 교수는 리모컨을 집었다.

그가 버튼을 누르자 벽면에 걸린 거대한 화면이 반짝이더니 뉴스 채널이 곧장 떴다.

[올해로 아시아 연합(AU)이 출범한 지가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평양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각국의 정상이 속속 입국하는 중입니다.]

“벌써 아시아 연합 30주년이라니···.”

“사실상 연합은 그 이전부터 있었잖아요.”

“하긴 고려에 황실이 있었던 시기에도 랑카와 루손 그리고 인도와는 수백 년 동안 계속해서 밀접한 우호 관계를 유지했지.”

“서로 쓰는 말과 글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동질감이 생기니 가능했던 일이죠.”

유럽 연합의 종주국이 독일이라고 한다면 아시아 연합은 고려가 맡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아시아가 속하지는 않았다.

차이나 대륙이라 불리는 땅에 있는 여섯 나라 중에 절반은 AU에 참가하지 않았다.

거기다 일본도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손해는 그들이 보고 있는 중이다.

일본은 세계 경제 지표에서 겨우 40위권이고 차이나 대륙의 나라들도 개발도상국 수준이라 70위를 맴돌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고려라면 치를 떠는 이들이었다.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당한 것이 있으니 나름 이해가 되기는 했다. 하지만 과연 고려가 악의 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부분 그들이 먼저 도발했다가 쥐어터진 경우가 많았다.

일본이 왜국이라 불리던 시절부터.

근대화된 1세기 전까지 무려 다섯 차례나 고려의 땅을 침공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박살 나는 것은 고려가 아닌 상대방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역습을 받아 오히려 영토를 잃거나 완전히 초토화되는 일이 반복됐다.

하지만 고려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시베리아 등의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러시아의 엄청난 공격을 겪으며 한때 위기에 처했으나 결국에는 고려의 승리로 끝났다.

신기한 것이 있다면 고려는 언제나 다른 나라보다 기술의 발전이 빨랐다는 것이다.

그 덕에 현재 고려는 미국과 함께 기축 통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고 경제 순위에서도 최상위권에 속한 선진국이다.

고려의 돈을 가지고 나가면 AU에 소속된 나라에서 모두 사용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려의 말과 글을 공용어로 쓰는 나라도 상당히 많아서 의사소통에서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다음 소식입니다. 연말을 맞이해서 고려 왕실에서는 내탕금 50억을 기부해 사회적인 약자 계층을 위해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현재의 고려는 조금 독특했다.

정부와 왕실이 함께 공존하는 체제였다.

고려와 가장 비슷한 나라가 있다면 영국이었는데 선거로 선출된 총리가 정치를 하고 왕은 얼굴마담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왕실에 대한 사랑은 무척 깊었다.

황제의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고 민주화의 시작을 단행한 것이 벌써 150년 전이다.

그 이후로 왕실은 명목상으로만 유지됐다.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국회의원과 정부에서 도저히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하게 되면 그때마다 왕실은 공개적으로 문제 삼았다.

일종의 감시자이자 국민을 대변하는 역할도 겸했는데 현재의 63대 왕인 왕휴는 환경 문제에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뉴스는 거기서 꺼야 했다.

“식사 나왔습니다.”

종업원이 문을 열고 카트를 들여놓자,

저절로 허기지게 만드는 냄새가 퍼졌다.

냄새만 죽여주는 것이 아니라 색감이나 플레이트도 정성이 가득 들어 있었다.

당연히 맛도 일품이었는데 정신없이 먹다 보니 상다리가 부러질 것처럼 많이 쌓여있던 음식들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괜히 예약해서 이걸 맛보는 게 아니네요.”

“희소성도 한몫하지.”

“하긴 고려 왕실의 음식을 이렇게 직접 맛볼 수 있는 기회가 흔하지는 않죠.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어서 하시죠.”

“눈치챘냐?”

고민완은 피식 웃었다.

선배의 성격을 잘 아는 그였다.

괜히 이렇게 잘해주는 게 아닐 것이다.

평소 선배는 차라리 국밥집에서 소주와 함께 마음 편히 먹는 것을 훨씬 더 선호했다.

자신은 그렇게 먹더라도 이런 비싼 곳은 무조건 가족을 데려갈 사람이었다.

“고 교수, 다음 학기에 연구년 사용할 거지?”

고민완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려의 대학에서 재직 중인 교수들은 대부분 3년마다 한 번씩 연구년을 가진다.

어느덧 교수 4년 차가 된 고민완도 당연히 연구년을 써서 성과를 내야 하는 시기였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학자로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했다. 이번에는 1년 6개월이 잡혀 있었는데 이걸 진행하기 위해서 1년 전부터 계획을 잡고 학교에 신청해놨다.

“선배가 발굴한 해동천황릉에서 나온 것들 이번에 각 잡고 파볼려고요. 아직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연구하지 못했잖아요.”

“그것도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 하지만 아마 내 제안을 들으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어.”

“일단 뭔지 들어나 보죠.”

이운계는 웃음기를 지웠다.

그의 표정은 상당히 진지했다.

안 그래도 귀국하는 과정 중에 여러 통의 전화를 하더니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이미 정해 놓은 과제가 있으나 미리 안 된다고 못 박을 필요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운계 선배는 자신과 달리 국가적인 프로젝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규모부터 달랐기에 좋은 기회가 된다면 바꿀 의향도 충분히 있었다. 제자들도 자신의 연구 과제를 하는 것보다 더 큰 프로젝트를 해보는 것이 경험을 쌓기도 좋을 것이다.

그쯤 되자 이운계는 본론으로 들어갔다.

“얼마 전에 과테말라의 밀림 속 깊숙한 곳에서 묘한 게 발견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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