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200
길고 긴 꿈을 꾸었다.
아니 이게 정말 꿈이 맞는 걸까.
너무나 생생해서 아예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미 말도 안 되는 일을 한 번 당해봐서인지 더 구분이 안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죽은 건가?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육진성이 직접 내게 말을 하진 않았지만,
남은 생명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쯤은 나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몸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어쨌든 현재 내가 있는 곳은 기묘했다.
검은 안개가 자욱한 물가였는데 물 너머에 도대체 뭐가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덕분에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강인지 바다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한가지 신기한 것이 있다면 그 앞에 서서 물을 지켜보니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뭔가 홀린 듯한 기분이었다.
실제로 나도 모르게 몇 걸음 걸어가니 금방 종아리 부근까지 차가운 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더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이성이 나를 말리는 것은 아니었다.
더는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게 뒤에서 누군가가 나의 팔목을 잡아서 당겼기 때문이다.
“아직은 아니되옵니다.”
굵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뒤늦게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파평군 윤해와 홀치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미천사의 변(變)에서 나와 가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다 사망한 이들이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아니 잊으면 안 되었다.
그때 진 빚이 너무나 컸다.
당시의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에 진급이 되었고 유족들이 평생 굶을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그걸로는 항상 부족하다 여겼다.
어떤 보상을 하더라도 저들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을 것이다.
“못난 나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은 그대들에게 면목이 없소.”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오히려 역적들의 함정을 미리 알아채지 못한 소신의 불찰이옵니다. 그런 탓에 폐하께서도 크게 다치시지 않으셨사옵니까.”
“그깟 상처는 중요하지 않소.”
그건 나의 진심이었다.
내 오만 때문에 생긴 일이다.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불상사가 벌어지기 전에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인 점이 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윤해와 홀치들의 표정은 너무나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소장을 비롯해 여기 있는 이들은 한 번도 그날 밤의 일을 후회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폐하께서 무사하신 덕분에 고려가 이렇게 발전한 것이 아니옵니까. 그러니 이제 더는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하옵니다.”
하지만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뒤로 수많은 고려의 병사들이 나타나 내 앞에 나열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앳된 얼굴부터 노년의 병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이 있다.
고려가 지금까지 전쟁에서 대패를 당한 일은 없었으나 30년 동안 수차례의 전쟁을 거치며 당연히 사망자의 수도 꽤 누적되었다.
그 기간 동안 고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병사만 수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심지어 대를 이어 병사로 복무하던 부자가 동시에 죽은 집안도 있었다.
그것 또한 내가 짊어지고 가야 할 무게였다.
지금껏 내 명령으로 인해 죽은 이들의 숫자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원망하는 것보다는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봤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곧장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잠시 후에 정신을 차려 보니,
병사들은 사라지고 문무백관이 보였다.
지금껏 도당에서 나를 위해 일하다가 사망한 관리 수백 명이 머리를 동시에 조아렸다.
고개를 돌려가며 좌우를 살피니 하나같이 반갑고 그리운 이들이었다.
이인복과 이방실 그리고 유숙까지.
나와 함께 고려의 개혁을 이뤄낸 충신들이 보이자 기쁜 마음으로 그들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 달려가도 그들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옵니다.”
이인복은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아까 윤해가 내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도대체 뭐가 아직 이르다는 것인가.
모처럼 통증이 없는 상태가 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이제 더는 견디기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은 날이 계속되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 것이오?”
“무엇이 그리 급하십니까. 그 급한 성격은 여전하신 것 같사옵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적어도 작별 인사는 하고 오셔야죠.”
“작별 인사라···.”
그제야 가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사조차 못 하고 떠나면 얼마나 슬퍼할까.
그 순간에 가진을 대도에서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의 추억이 차르륵 펼쳐졌다.
그녀는 삭막하던 황실 생활의 활력소이자 유일한 안식처였었다.
식어버린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언제나 곁에 머물며 응원해주던 그녀를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은 간절함이 생겼다.
그런 나의 변화가 느껴졌는지 곁에 서 있던 이방실도 한 마디를 보탰다.
“시간이 별로 없사옵니다. 그러니 하셔야 할 말이 있다면 꼭 하시옵소서.”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의 시야는 하얗게 변하였다.
강렬한 햇살이 눈을 찌를 듯이 비치는 탓에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을 정도였다.
잠시 후에 간신히 눈을 뜨니 교태전이었고 곁에는 가진과 왕현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자이옵니다. 정신이 드옵니까?”
“상황 폐하!”
“귀청 떨어지겠다. 다 들리니 조용하거라.”
내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하자,
다들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최근 들어 나는 목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육진성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지금의 내 모습은 마지막 불꽃을 화려하게 불태우는 일명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증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이게 마지막이란 것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급했다.
“사람의 수명은 어차피 하늘에서 정하는 것이니 지금껏 고생을 마다치 않고 일했던 태의 판서와 어의들에게 책임을 묻지 마시오.”
그를 탓할 수는 없었다.
고려에서 최고의 의원이라 불리는 그가 지금껏 들인 노력은 다들 알았다.
정말 하루도 쉬지 않고 상황 폐하의 곁에 머물며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갖은 고생을 마다치 않고 치료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 덕분에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봐도 무방한 일이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왕현은 곧장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제 더는 해줄 말이 그리 많지 않았다. 갑자기 쓰러져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내가 묻힐 황릉은 아직 완공되진 않았으나 어차피 장례 절차가 일반인처럼 금방 끝나지 않을 것이기에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조선처럼 유교의 절차에 따라 5개월이나 걸릴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백성들에게도 삼년상을 금지시키고 3차에 걸쳐서 진행하는 복장이라는 장례 절차를 최소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매장을 통해 긴 시간 탈육하는 과정은 법으로 금지했을 정도였다.
애초에 탈육보다 화장이 보편적인 일이라 그리 큰 반발은 없었으나 황실에서 모범을 보여야 하기에 최대한 절차를 줄여야 했다.
이미 그와 관련해서 황제인 왕현과 많은 대화를 한 터라 알아서 해줄 거라 믿었다.
나는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대신에 그 짧은 시간이나마 가진과 함께 있기는 원했다.
그 말을 꺼내자 왕현과 채윤 등은 서운한 기색도 없이 잠시 자리를 비켜주었고 가진과 모처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조금 전에 좋은 꿈을 꾸었소.”
“무슨 꿈이었습니까?”
“윤해 장군과 홀치들을 보았소. 그리고 이방실 장군과 이인복을 비롯해 여러 문무백관이 삼도천에서 기다리고 있더이다.”
“먼 길을 가실 때 외롭지는 않으시겠습니다.”
“그러니 내 걱정은 말고 당신은 이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오래오래 사시오.”
무엇보다 가진이 가장 걱정되었다.
지금까지 봐온 그녀는 외유내강의 여인이나 무엇보다 가족을 더 우선시하는 이였다.
아마 적지 않은 마음고생을 하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그곳까지 가서도 저보다는 대신들과 시간을 더 보내시려고요?”
“퇴위하면 같이 시간을 보내자고 했었는데 약속을 못 지켜서 송구하오.”
“몇 번이고 윤회를 하더라도 다시 이 세상에서 만나면 그때는 약속을 지키시죠.”
“그때도 다시 나를 만나줄 것이오?”
가진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태어나도 나와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늙어서 죽을 때까지 한평생을 함께하겠다고 나에게 약속했다.
그때는 평화로운 세상에서 황제가 아닌 평범한 촌부로 만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길바닥을 전전하는 가난뱅이라도 상관없소?”
“제가 벌면 되니 걱정 마시죠.”
“그럼 지금까지 그대가 내게 해주었던 것처럼 곁에서 내조를 해줄 테니 그때는 맘껏 원하는 바대로 해보시오.”
“약조하신 겁니다.”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간절하게 원하면 이뤄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가진은 처연하게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렸고 한두 방울이 나의 손등 위에 떨어졌다.
하지만 손을 들어 그 눈물을 닦아줄 기력은 없었다.
갑자기 모든 기력이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이기 어려울 정도가 된 탓에 눈꺼풀을 뜨고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게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자 나는 기억에서 잊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끝까지 가진을 눈에 담아 놓으려 사력을 다했다.
“부디··· 이 나라 고려를 굽어살피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끝으로 눈이 스르륵 감겼다.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이제 더는 여한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가진은 아무런 말 없이 차갑게 식어가기 시작하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눈앞에 누워있는 이는 고려의 상황이기 이전에 세상에 하나뿐인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렇게 잠시 있던 그녀는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신소봉을 불러 황제과 어의를 들어오라 시켰다.
혹시 모른다는 작은 희망도 없진 않았다.
어의가 촉광례라는 절차를 통해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다.
육진성은 곧장 솜부터 꺼냈다.
그리고는 상황 폐하의 코 위에 올렸다.
만약에 숨을 쉰다면 흔들릴 테지만, 안타깝게도 전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그는 진맥까지 해본 뒤에 바닥에 엎드린 채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 폐하께서 훙(薨)하셨사옵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가진은 참아왔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희망까지 무너지자 그녀는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당연히 채윤은 물론이고 왕현도 그 자리에 엎드려 곡을 했다.
체통이고 뭐고 따질 것도 없었다.
그 자리에 있는 이들치고 눈물을 쏟아내지 않는 이는 없을 정도였다. 그 소리가 얼마나 애통했는지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던 삼정승을 비롯한 도당의 문무백관이 다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신소봉은 조금 달랐다.
그는 곧장 평소 상황께서 입으셨던 복의을 메고 지붕 위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노년의 몸으로 거길 올라가는 일이 쉽지 않기에 환관들이 만류했으나 소용없었다.
거기서 떨어지면 그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들 조마조마하게 바라봤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곳에 올라간 이유는 ‘천위복(天位復)’이란 절차 때문이었다.
본래 상위복이라 불리던 것이나 상위라는 말이 왕을 뜻하기에 명칭이 바뀌었다.
그걸 하는 이유는 죽음의 길로 가지 말고 다시 돌아와달라는 애원이었다.
다급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신소봉은 동쪽 지붕 처마 부근에서 자신이 메고 올라온 상황 폐하의 웃옷을 각각 옷깃과 허리춤을 잡은 채로 펄럭이기 시작했다.
다시 돌아와 달라며 천위 복이라 처절하게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황궁 곳곳에 퍼졌다.
그러나 아무리 애절하게 외친다고 혼이 다시 돌아올 리가 없었다.
황제의 승하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모든 문무백관은 궁궐 앞에 모여 곡을 했고 백성들 역시도 깔끔하게 차려입고 궁궐 방향을 향해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훗날 해동천황 1세이자 고려의 무제(武帝)라 불리게 되는 한반도 역사상 가장 찬란하던 고려의 커다란 별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