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99화 (19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99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서책 안에는 기괴한 그림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글이 가득 적혀있었다.

솔직히 이걸 만드는데 꽤 고생을 했다.

모든 그림은 내가 직접 그렸고 처음 이걸 쓴 게 벌써 20년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문득 생각나는 것들을 최대한 정리한 탓에 내용도 상당히 방대했다.

왕현은 당연히 이해를 못 했다.

거기에 적힌 내용은 미래의 것이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글라이더부터 벌룬 같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로서는 상상조차 안 되는 물건들이다.

심지어 후장식 화포와 무기도 있었다.

불을 때서 바람 없이도 항해하는 배와 마차에 스프링을 달아서 완충 작용을 하게 만드는 부품도 있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의 최첨단 물건은 배제해야 했다.

가능하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을 위주로 선정했고 석유와 같은 자원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도 숫자로 따지면 수백 가지 이상은 되었다.

내용도 상당히 세밀한 편이었다.

모두 내가 직접 써보거나 보았던 것들을 적은 거라 꽤 구체적이었기에 도저히 상상만으로 쓴 것이라 보기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왕현은 벌룬 같은 물건에 상당히 큰 관심을 보였다.

뜨거운 공기를 불어 넣어서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는 것은 시중에 널리 퍼진 동화책에서 나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건 허구 속의 이야기였다.

하늘은 오로지 해와 달 그리고 별을 제외하면 새들만의 것이라 여겼는데 그런 고정 관념이 틀렸다고 하는 것이다.

“정말 이런 형태의 물건을 만들면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말이옵니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솔직히 이해가 되진 않사옵니다.”

“세상에 불가능한 일은 없느니라.”

달까지 사람이 갔다면 믿을까.

수백 년 후가 되면 방아 찧는 토끼와 셀카를 찍고 돌아오는 시대가 열린다.

하지만 그런 말까지는 차마 해줄 수 없었다. 아마 병마에 시달리다가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만, 그 과정이 쉽지 않기는 했다.

나도 불가능한 일을 왕현의 손으로 모두 이뤄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지금 그게 가능했다면 이륜처럼 세상에 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금속 가공이나 재료만으로 불가능했다.

대대로 이걸 물려주다 보면 어느 순간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이가 있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성균관에 이미 토대를 마련해준 공학 박사들이 부지런히 노력을 해주어야 한다.

“화약과 화포의 예를 보더라도 새로운 발명품이 나오면 그것 하나로 인해서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느니라.”

예로 삼을 것들은 무척 많았다.

화약의 개량은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고 왜구도 물리치는 공헌을 세웠다.

그 외에도 금속 활자 인쇄가 보급되니 백성들의 지적 수준도 향상되었다.

무지몽매한 백성이 많고 우민화가 진행되면 다스리는 것은 쉬울 수 있으나 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까지 극소수에 불과한 권문세족에 기댈 수는 없다. 3천만 명에 달하는 인구 중에 그들의 비중은 무척 작았다.

“소자도 충분히 공감하옵니다.”

“그러니 현실에 안주하지 말아라. 불편하고 불합리한 것이 있다면 오래된 전통이라도 바꿀 각오를 하여야 한다.”

“하오나 예전에 전통을 고수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셨사옵니다.”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혁이 언제나 답이 될 수는 없다.

고려의 음식과 문화 같은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기본이었다.

때로는 시간이 켜켜이 쌓여야 의미가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역의 침략을 항상 주의 깊게 살피고 대비해야 한다.”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아시아를 침략하고 식민지로 삼기 시작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 먼 훗날의 일은 아니었다.

역사 그대로 흘러간다면 포르투갈이 랑카에 도달하는 것이 140년 정도 후다.

그 사이에 몇 번이나 황제가 바뀔 수 있는 제법 긴 시간이나 경고는 해줘야 했다.

“서역이라 하심은 고려와 교역을 하는 아라비아를 의미하는 것이옵니까?”

“아니 그보다 더 서쪽에 있는 이들을 말하는 것이다.”

혹시 모르는 일이다.

역사는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고려는 아시아의 해상을 장악했다.

그로 인해 나비 효과가 일어나고 있었다.

실제로 유럽에도 아라비아를 통해 고려의 물건이 흘러 들어갔기 때문에 고려를 엘도라도처럼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당연히 랑카와 해왕에게도 주의를 줘야 했다. 마두라이와 랑카 등은 고려에게는 방파제와 같은 곳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유럽 열강의 수탈을 막아낼 수 있다면 역사의 흐름은 완전히 바뀔 것이다.

유럽이 지닌 부강함의 원천은 식민지를 두고 피와 골수를 빨아 먹은 덕분이다.

스페인만 보더라도 남미에서 산이 내려앉을 정도로 은을 캐온 탓에 극심한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정도였다.

당시에 백 년이라는 기간 동안 물가가 네 배나 올랐다고 한다.

아프리카는 몰라도 아시아만이라도 그 고리를 끊어내면 역사는 어떻게 변할까.

어쩌면 훗날 세상의 중심이 아메리카나 유럽이 아닌 아시아로 바뀔지도 모른다.

얼마나 기분 좋은 상상인가.

개인적으로 조금 궁금했다.

영어가 공용어가 아닌 세상이 어떨까.

지금의 고려가 어느 정도 유지되면 적어도 아시아 지역은 고려의 말이 통용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실제로 고려의 말과 글을 가져다가 쓰고 있는 마두라이와 랑카 외에도 자치령인 연주 지역과 둘째 아들인 왕곤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으니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거기에 고려에서 관리 중인 시베리아 지역을 합치면 유럽 전체와 비견될 정도로 영향력이 꽤 넓었다.

“여기에 적힌 내용은 절대 다른 이들에게 유출하면 안 된다. 오직 황제의 위치에 오른 이들만 보아야 하는 것이니라.”

다시 한번 신신당부를 해야 했다.

괜히 유출되어서 좋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걸 맹신하라는 말도 아니었다.

이건 일종의 참고서와 같은 것이다.

괜히 역사에 관련된 것들은 구체적으로 적어 놓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내가 알던 역사 그대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대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주의를 주기는 했다.

예를 들면 평화로움에 물들어서 군사의 수를 줄이고 왜국을 무시하다가 불시에 쳐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왕현은 그걸 보물처럼 여겼다.

어쩌면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 내가 만들어서 남긴 유산의 하나로 여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평생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녀석의 눈가가 촉촉해질 정도였다.

“대대로 황실에서 고이 간직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사옵니다.”

*

원나라가 몰락한 이후부터.

나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암세포가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이제 더는 남은 여한이 없었다.

원나라의 몰락과 왕현에게 완성된 서책을 전해주는 것이 내 마지막 인생의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껏 만들어 놓은 고려는 어느 나라보다 강하기에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가진이 내 죽음에 대해 너무 슬퍼하지 않았으면 했다. 벌써부터 그녀는 나 못지않게 수척해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푸짐한 진수성찬이 차려져도 몇 숟가락 뜨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다.

입맛이 사라졌다는 데 막상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가진이 그러는 원인은 당연히 나 때문이었다.

애틋한 연애 끝에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3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그녀였다.

내가 가진의 입장이었어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더구나 병시중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궁녀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다.

가능하면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하려고 했다. 고려에 시집와서 자신의 나라를 배신했다는 오명까지 쓴 여인이다.

마노라에게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제대로 못 지킨 남편으로서 미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뒤부터.

나는 혼절하는 일을 거듭했다.

이제는 진통제마저 듣지 않았다.

지금껏 써온 약에 대한 약간의 내성이 생긴 것도 있었고 그만큼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혼절하는 시기도 점차 짧아졌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이를 악물고 버티느라 잇몸이 다 허물어질 정도였다.

그러니 차라리 혼절하는 것이 마음이 편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는 이들은 속이 타들어 갔다.

“이레 사이에 벌써 두 번이나 혼절하신 것이오. 적어도 고통이나마 줄여드릴 다른 방도가 없소?”

신소봉은 상황 폐하의 진료를 보고 나온 육진성에게 다급하게 다가서며 물었다.

만약에 그의 입에서 방도가 없다고 말하면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하지만 지금의 이 상황이 난감한 것은 육진성도 다를 것이 없었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회생할 가능성은 없었다.

진맥에 잡히는 맥박은 나날이 희미해지고 있기에 너무나 위태로웠다. 여름철 태풍 앞에 놓인 촛불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까놓고 말하자면 지금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폐하와 황태후께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 것이오! 상황 폐하께서는 이렇게 가실 분이 아니오.”

“상황 폐하의 옥체는 이미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무척 위험했다.

죽기 살기로 위험함을 무릅쓰고 대부분의 의원은 엄두 내지 않는 경혈에 침을 놨다.

그게 통해서 다행이지 자칫 실수라도 했으면 곧장 돌아가셨을 것이다.

지금 상태를 굳이 표현하자면 삼도천에 발을 담그고 계신 것과 같달까.

하지만 이걸 어떻게 전달한단 말인가.

육진성이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이었다면 조금 전에도 그런 경혈에 침을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려에서 상황 폐하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이런 분이 과연 있었을까.

요즘 고려에서 유행하는 소설에서 그대로 상황 폐하의 업적을 가져다 쓰면 코웃음을 칠 정도로 엄청난 일을 이뤄내신 분이다.

모든 고려의 백성이 상황 폐하의 건강을 위해서 밤낮으로 치성을 드릴 정도였다.

자신의 수명을 줄여서라도 다시 상황 폐하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면 줄을 서는 이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천수는 어쩔 수 없었다.

태의감의 수장으로서 그는 자신의 본분을 마지막까지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었다.

적어도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할 시간은 주어져야 했는데 그게 지금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태황후 마마님은 어디 계십니까?”

“설마...?”

“지금 당장 교태전으로 오셔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육진성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걸 본 신소봉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서둘러 태황후 마마와 황제 폐하 등을 모시고 오기 위해서 뛰쳐나갔다.

인정하기는 싫으나 적어도 마지막 가는 길에 상황 폐하 홀로 쓸쓸하게 보내드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뒤.

모든 황실의 사람이 모였다.

다들 급하게 뛰어온 기색이 역력했다.

황제조차 숨을 거칠게 쉬는 것이 체통이고 뭐고 따지지 않고 상황 폐하가 계신 교태전으로 뛰어온 것 같았다.

심지어 황후와 태황후는 울면서 뛰어온 것인지 얼굴에 물기가 흥건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오?”

왕현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육진성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대답을 하기 전에 깊이 허리부터 숙였다.

그 모습을 본 가진은 설마 하는 마음에 혼절하기 직전이었다. 아마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실신하기 직전인 그녀의 곁에는 황후인 채윤이 궁녀와 함께 부축해주고 있었다.

상황 폐하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자라난 채윤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이 당장 곡이라도 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육진성은 그걸 보고 상황 폐하가 이미 승하하신 거로 오해하고 있음을 깨닫고 서둘러서 자신의 결론을 전달했다.

상황 폐하를 진료하는 어의로서 죽기보다 하기 싫은 말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였으나 그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황송하옵니다. 소신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으나 상황 폐하께서는 아마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실 것 같사옵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