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98
중원의 정세는 혼란스러웠다.
이전부터 이상한 기류가 없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십여 년 이상이나 유지되었고 대규모의 병력 이동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도가 함락된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황궁이 무너져 황제까지 죽었다니 빨라도 너무 빠른 전개였다.
그것까지는 예상치 못했다.
감찰사가 놓친 것이 있었던 것일까.
아직도 원나라에는 감찰 어사가 배치되어 동향을 수집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도가 고려에서 그리 먼 것도 아니다.
일이 터지면 적어도 보름에서 달포 사이에 평양까지 소식이 전달된다.
일단 원나라만 벗어나면 도로가 깔려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일이 터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나는 그게 너무나 궁금했는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원나라 내부에 배신자가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대규모 병사가 동원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적어도 고위 무관 여럿이 이번 일에 연관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내부에 동조자가 있었던 것이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오나 현지에 있는 감찰 어사 권근은 지금까지 확보한 정보를 토대로 그렇게 추측하고 있사옵니다.”
그 대답은 좌의정 정도전이 했다.
감찰사는 황제의 직속 기관이나 삼정승 중에는 그가 가장 감찰사 일에 밝았다.
가장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감찰사를 책임지는 상서의 자리까지 올랐던 그의 경력은 확실히 무시할 수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원나라의 장군치고 매수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고 하옵니다.”
정몽주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의 말처럼 원나라의 장군들은 물론이고 고관대작과 심지어 황실의 궁녀까지 대주국과 오국에게 매수당한 상태였다.
당연히 그중에는 고려의 감찰사에게 포섭된 이도 무수하게 많이 있었다.
지금의 원나라는 황제라는 칭호가 어색할 정도로 많이 축소되었는데 여태 버티고 있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원래의 역사에서 그들이 몽골의 초원지대로 쫓겨나 북원을 세워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요왕 덕분이었다.
뒤에서 받쳐줘야 할 그가 고려에 의해 멸망한 덕분에 원나라도 영향을 받았다.
더구나 그들의 수호자는 이미 사라졌다.
과거에 장사성과 탕화의 엄청난 공세를 막아내며 무신의 반열에 오른 차칸 테무르와 이사제 장군은 세상을 떴다.
너무나 허무한 죽음이었다.
역사에 기록된 것보다 오래 살았으나 투항한 홍건적 출신에게 차칸 테무르가 끔찍하게 암살당한 것은 똑같았다.
이사제는 차칸 테무르의 죽음에 반발하여 날뛰다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원나라의 마지막 방패라 불리던 두 장군이 사라진 것은 타격이 컸다.
실제로 그 이후로 병사들이 군영에서 이탈하여 탈주병이 되는 이들도 많았다.
더는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장사성의 대주국과 탕화의 오국이 서로 견제하며 다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원나라는 요왕이 무너진 시점에서 이미 함락당했을 것이다.
“하하하! 원 황제가 죽었다니 30년 묶은 체증이 밀려 내려가는 느낌이로구나.”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나중에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으나 원나라가 멸망했다는 것은 내게 제법 커다란 의미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원나라에게 당한 것들이 워낙 많았기에 저절로 나오는 반응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대도에 있을 때부터 수모를 참아왔던 나였다. 잠시 자존심 같은 것은 버려두고 살았을 정도였다.
내 손으로 원나라의 황제를 끌어내 목을 치지 못한 것이 내심 아쉽기는 했다.
만약 지금 무너지지 않았다면 적어도 10년 이내에 고려가 쳐들어갔을 것이다.
이미 고려는 어느 정도 회복세였다.
지금껏 확보한 땅도 고려의 지배 아래에 들어와서 통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 부분이 조금 아쉬웠으나 마냥 기뻐하고 있을 일이 아니기는 했다.
누군가 패권을 쥐게 되는 일은 고려에게 좋지 않았다. 고려가 살아남으려면 중원은 십여 개 이상의 나라로 쪼개져야 했다.
그 상태로 오백 년만 지속되어도 후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서 누가 대도를 차지한 것이오?”
그게 가장 중요했다.
대주국의 장사성과 오국의 탕화.
과연 두 나라 중에 누가 대도를 차지한 것인지 궁금했다. 이번 일로 인해 아슬아슬한 상태의 균형이 깨질 것이다.
“오국의 탕화이옵니다.”
“역시 예상에서 벗어나진 않는군···.”
“대주국의 가장 큰 실수는 고려에게 등을 돌린 것이라 할 수 있사옵니다. 고려와 맺은 전략적 동맹을 유지했다면 대도를 차지하는 것은 장사성이었을 것이옵니다.”
왕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대주국의 성장세는 고려와 척을 진 이후부터 서서히 둔화되고 있었다.
그들이 초석 광산을 차지한 이후로 잠시의 이득은 보았으나 막상 실리를 취한 것은 그리 많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덕은 다른 나라가 보았다.
우선순위에서 벗어나 있던 진우량은 고려와 동맹을 맺고 심지어 왕곤을 부마로 맞아 혈맹의 수준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탕화도 장사성보다 그 뒤에 있는 고려가 껄끄러웠으나 제약이 풀린 것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주국은 고려에서 소량이나마 화약과 구형 화포를 들여와서 전장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중간에 고려가 서서 중재자 역할도 해주었는데 그게 사라진 것이다.
솔직히 두 나라가 붙을 경우.
나는 탕화의 승리를 어느 정도 점쳤다.
아무리 장사성에게 용맹한 장사덕이란 장군이 있다고 하더라도 탕화 밑에 있는 장군들의 면면도 부족함이 없었다.
주덕유과 서달이 빠졌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인재가 탕화의 밑에 있었다.
어쩌면 내가 죽은 이후에 탕화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됐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남쪽에 있는 진우량의 기세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사천 지역의 농촉왕(隴蜀王) 명옥진도 건재한 상황이니···.’
명옥진이 다른 세력에 비해 군사력은 부족한 부분이 있으나 영토는 엇비슷하고 잠재력도 부족하지 않은 곳이었다.
현재 상황만 놓고 보자면 그렇게 네 나라가 중국의 땅을 나누어 가질 것이다.
혹시라도 장사성과 명옥진이 무너져도 적어도 남북으로 나뉘어 탕화와 진우량의 세력이 차지할 것이라 예상되었다.
현재의 대한국이라면 아무리 탕화라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대주국의 동향은 어떻소?”
“뒤늦게 대도의 함락 소식을 전해 받고 오국의 후방 지역을 치려고 했으나 시기를 놓친 것 같사옵니다.”
그와 관련된 대답은 이원림이 했다.
삼정승 중에서 가장 연륜이 높은 그는 우의정 자리에 앉아 있으나 그 누구보다 중원의 동향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그의 역할은 전쟁을 치르는 것도 있으나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현재의 고려를 만드는 데까지,
문화와 경제의 역할도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홍건덕 등의 외침을 큰 피해 없이 무사히 방어하는 데 성공했기에 지금의 고려가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우수한 문명도 스스로를 지킬 수 없으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나는 황태자에게 항상 그걸 강조했다.
실제로 고려에서 매년 쓰는 재정 중에 군사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쓰는 재물이 대략 3할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여전히 고려는 20만 명의 병사가 있었고 계속해서 낡은 화살과 갑주 등을 새롭게 만들며 유지 보수 중이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말이 많았다.
너무 과다하고 여기는 이들 때문이었다.
이미 고려는 전 국민의 예비군화가 진행되고 있기에 나오는 말이었다.
매년 훈련을 받다 보니 나라에 위기가 닥치면 고려의 모든 남자들은 칼과 창을 쥐고 싸울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최악의 경우였다.
가능하면 전쟁은 군인이 해야 했고,
농부는 농사를 짓는 본분에 힘써야 했다.
모두가 칼을 쥐고 전쟁터를 전전하면 누가 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는단 말인가.
전쟁은 칼과 창으로만 하는 게 아니다.
“당분간은 대주국와 오국의 동향을 잘 살피고 대한국의 진우량에게도 지금까지 얻은 정보를 공유해주거라.”
“그리하겠사옵니다.”
왕현은 내 말을 그대로 따랐다.
외교에 관련해서는 지금껏 쌓은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탓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즉위 전에도 도당을 직접 이끌었지만, 그 기간 동안에 특별한 외교적인 이슈는 없었다.
아무래도 대륙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부담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황제에게 고려가 대대로 번창하려면 무엇이 중요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왕현은 기본적인 대답을 했다.
경제와 군사 등의 여러 조건을 대답한 그에게 나는 한 가지를 더 추가했다.
“중원과 왜국을 사분오열하게 만들 거라. 그게 고려가 천년의 제국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라.”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저들의 나라가 그대로 굳어져 지역과 혈통 그리고 문화가 달라지게 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의 나라가 되더라도 다시 찢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몽골과 한족으로 크게 나눌 수 있지만, 저들에게도 여러 민족이 섞여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회회국의 후예 같은 이들이 주축이 되는 명옥진의 세력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뼈에 새겨 놓으면 결국에는 다시 찢어지기 마련이다.
그게 나의 천년지대계(千年之大計)다.
실제로 백제와 신라가 멸망한 뒤.
천 년이 지난 뒤에도 한반도에는 여러 케케묵은 지역감정이 남아 있지 않는가.
비단 이것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고 스페인이나 여러 나라에서 동일하게 겪는 문제 중의 하나다.
“잠시 황제와 이야기 나눌 것이 있으니 삼정승은 그만 나가보시오.”
이쯤에서 줄 게 있었다.
더는 미룰 수가 없는 일이었다.
요즘 들어 수명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이 자주 들고 있었다.
삼정승이 나가자 나는 신소봉을 제외한 모든 환관과 어의까지 침전 밖으로 내보냈다.
그런 뒤에 나는 신소봉을 시켜서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곳의 방석을 들춰냈다.
지금 내가 황제에게 줄 것은 가능하면 아는 이가 한 명이라도 적어야 했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아래에는 세 겹에 깔개가 있었는데 신소봉은 그걸 하나씩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래 깔려 있는 바닥이 드러났다.
그냥 보기에는 별다른 것이 없지만,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있었다.
그곳에 손가락을 찔러 넣자 뭔가 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며 바닥이 튀어 올랐다.
신소봉이 그 틈으로 손을 넣어서 들추자 아래에는 작은 공간과 철제문이 있었다.
나만의 비밀 금고였다.
두꺼운 철제문에는 무려 세 개나 되는 굵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기에 나는 열쇠를 꺼내서 평소처럼 신소봉에게 건냈다.
그는 처음으로 금고를 여는 것은 아니기에 능숙하게 자물쇠를 풀어냈다.
지금까지 그곳을 열 때마다.
내가 아닌 신소봉이 했으니 당연했다.
오히려 나는 아직도 저 육중한 자물쇠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왕현은 놀란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사옵니다.”
“허허. 남들이 다 알면 그게 비밀 금고겠느냐. 이 장치들은 궁궐을 지을 때 마련한 것이다. 지금 네가 머물고 있는 침전에도 이것과 똑같은 금고가 있을 텐데 생각보다 쓸모가 많을 것이다.”
“안에 무엇이 들어 있길래 이렇게 은밀한 장소에 넣어두는 것이옵니까?”
“보면 알 것이야.”
잠시 후에 신소봉이 자물쇠를 다 풀어낸 뒤에 철문까지 열자 작은 공간이 나왔고 안에는 서책 몇 권이 들어 있었다.
제법 두툼한 두께였는데 그중의 두 개는 이 세상에 와서 내가 기억하는 역사를 꼼꼼하게 정리해놨던 것이다.
당연히 그건 왕현에게 줄 것이 아니다.
내가 미래에서 온 거라 말하면 아마도 미쳤다고 할 게 뻔했다. 역사에 그런 식으로 기록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미 지난 30년 동안 역사가 완전히 바뀌어서 소설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이것들은 내가 죽기 전에 태워버릴 예정이었다. 신소봉은 무엇을 꺼내야 할지 망설였고 나는 그중에서 붉은색의 표지를 두른 서책을 꺼냈다.
그리고는 그걸 곧장 왕현에게 내밀었다.
거기에 적힌 것은 엄청난 양이었다.
나의 당부이자 배려가 쓰여진 서책이라 양을 조절하지 못한 탓이었다.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왕현은 나의 허락을 받고 곧장 서책을 펼쳐봤다.
하지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는지 내게 이 서책이 무엇인지 재차 질문을 했다.
“이건 도대체··· 무엇이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