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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96화 (19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96

살려고 하는 의지는 강했지만,

몸은 그걸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인민이 보내준 이백 년이나 묶은 산삼도 생각보다 영향을 주진 않았다.

아무리 값비싼 약을 써도 병의 진행 속도는 도무지 멈추지는 않고 있었다.

그걸 멈출 방법은 전혀 없었다.

하긴 그런 산삼 하나로 기사회생할 병이라면 쉽게 죽을 왕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는 것만 먹고 사는 이들이 왕과 황제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죽음이고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나날이 몸 상태가 악화되자,

후계 작업도 빠르게 진행됐다.

도당에서 열리는 회의와 조회는 황태자도 매일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게 하는 단계는 이미 넘어섰기에 조회를 주최시켰다.

보는 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습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조금 특별한 사례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여기는 이는 없었다.

도당의 관리치고 내가 죽을병에 걸려서 오늘내일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고 심지어 궐 밖에도 알려졌다.

역시 10만 명이 넘는 대군과 독한 역병보다 혀끝으로 옮겨가는 소문이 더 빠르고 막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 증거가 이인민이 보낸 산삼이었다.

생뚱맞게 그걸 보낼 리가 없었다.

그 외에도 각지에서 온갖 진귀한 몸에 좋다는 것이 황궁에 들어오고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문 약재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일 정도였다.

심지어 왕곤은 세계 3대 향약재 중의 하나이자 중국의 황제에게 진상하던 침향을 구해서 보내왔을 정도였다.

“아일(衙日)을 시작하겠사옵니다.”

영의정 정몽주의 발언을 시작으로 도당의 조회가 열리자 여러 안건이 올라왔다.

내가 즉위했던 초기처럼 한 달에 여섯 번 열리는 육아일과 고위 관료만 참석하는 상참(常參) 등의 조회는 유지 중이다.

하지만 열리는 시간은 바뀌었다.

당시처럼 동이 트는 시간대인 평명(平明)에 조회를 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너무 이른 시간에 황궁에 등청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요즘은 계절에 따라 진시인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열렸다.

솔직히 내가 힘들어서 버틸 수 없었다.

밤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보다가 잠든 후에 눈조차 쉽게 뜨기 어려운 새벽마다 일어나 조회를 열다 보니 죽을 맛이었다.

그걸 바꾸는 순간부터 모든 궁궐의 관리는 등청과 퇴청 시간도 바뀌었다.

“최근 이륜과 마차가 오가는 일부 붐비는 도로의 교차로에서 사고가 발생하는 일이 빈번하게 생기고 있습니다.”

“어제도 두 건의 사고가 발생하였으니 해결책이 시급하게 필요합니다.”

“먼저 가려고 교차로에 들어섰다가 마차끼리 엉켜버리는 일도 수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나온 안건은 평양의 고질적인 문제가 되어버린 교차로의 체증 문제였다.

현재 고려에서는 말과 마차를 시작으로 이륜과 인력거까지 도로를 오가는 여러 이동 수단의 숫자가 엄청났다.

당연히 평양이 가장 심각했다.

시전이 있는 거리는 사람과 이륜이 너무 붐벼서 이미 그 길로 인력거와 마차가 지나가는 것은 막아놨을 정도였다.

더구나 사고도 자주 발생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륜의 만듦새가 더 정교해지고 있었고 그만큼 속도도 생각 이상으로 빨라지고 있는 중이었다.

얼마 전에는 말을 타고 달리는 이와 이륜이 부딪쳐서 낙마 사고가 발생했다.

교차로에는 신호 같은 것도 없다.

그 위에서 뒤엉키면 후진이 불가능한 마차 때문에 정리하는 데 오래 걸렸다.

해결책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하지만 나는 그걸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일단은 옥좌에서 몇 걸음 앞에 앉아 있는 황태자가 이걸 어떻게 처리하나 지켜봤다.

요즘은 조회에서 최대한 말을 아끼고 끝난 이후에 황태자에게 조언을 해줬다.

그게 서로 편했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학당과 역참 등에서 마차를 끄는 이들에게 양보하는 습관을 계도 중이오나 습관이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옵니다.”

“그럼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소?”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곳에 치안을 담당하는 치안대를 배치하여 마차 등을 순차적으로 통과시키는 것은 어떠하옵니까?”

그 대답을 내놓은 것은 하륜이었다.

어느덧 성균관에서 공학 박사를 거쳐서 공부의 이인자가 된 그가 내놓은 해결책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거의 비슷했다.

신호등이 없으면 교통 경찰을 배치해서 수신호로 정리하는 수밖에 없다.

역시 해답은 인력이었다.

인건비가 들어가는 문제도 있지만,

어차피 그런 교차로가 많지는 않았다.

체증이 심한 평양에서 주로 생기는 일이고 모두 합쳐봐야 십여 곳이 전부였다.

일이 터진 후에 치안대가 뒤늦게 정리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게 손쉬웠다.

애초에 그런 일이 안 생기게 하면 된다.

대부분의 마차는 상단에 소속된 것들이니 지체될수록 손해가 생기게 된다.

현재 고려의 재정에서 상단이 내는 세금은 매우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

전체 거래액의 1할에서 2할을 고려가 받고 있으니 그 정도의 편의는 제공해줘야 이쪽에서도 할 말이 있었다.

“일단 시범 삼아 시전 주변에 가장 붐비는 교차로를 중심으로 진행해보시오.”

“그리하겠사옵니다.”

“그와 관련된 결과는 다음 아일에 받도록 하겠소. 다음 안건은 무엇이오?”

“최근 몇 년간 저화의 유통량이 대폭 상승해 내년에 찍어낼 양을 계획보다 조금 더 늘려야 할 것 같사옵니다.”

황태자는 안정적으로 조회를 진행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 어쩌면 당연했다.

일부 문제는 당장 해결책이 나오지 않아 시간을 두고 다음 아일에 다시 논의를 해야 했는데 흔히 있는 일이었다.

신중해야 하는 문제는 몇 달 동안 논의를 거듭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매번 그렇게 느리지는 않았다.

고려의 도당은 안 된다는 반대보다 일단 시범적으로 소규모라도 진행한 이후에 문제점을 찾아 다시 논의했다.

당파를 이뤄서 무리 지어 논쟁을 하는 이들은 나올 수 없는 것이 그런 기색이 보이면 어떻게든 찢어 놓았다.

토론과 언쟁은 다르기 때문이다.

황태자도 그걸 어린 시절부터 봐온 덕분에 쓸모없이 서로의 감정만 건드리는 언쟁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효율과 실리의 나라가 고려다.

그 뒤로도 아일은 오래 진행됐다.

예전과 비교하면 올라오는 안건이 서너 배 이상이나 늘어난 탓에 내가 즉위할 무렵보다 훨씬 길어진 탓이다.

영토가 늘어났으니 각지에서 올라오는 문제도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자치령에서도 달포마다 그간의 상황에 대해서 보고가 들어왔다.

“폐하, 괜찮으시옵니까?”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부여잡자 신소봉은 곧장 그걸 알아채고 다가왔다.

조용히 속삭이는 그의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가능하면 아일을 마칠 때까지 버티려고 했으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통증이 인내심을 바닥내고 있었다.

“더는 못 견디겠구나.”

“소신이 침전으로 모시겠사옵니다.”

“육진성도 그쪽으로 오라고 전하거라.”

“침전에 상주해 있는 어의가 있지 않사옵니까?”

“그에게 상의할 게 있어서 그런다.”

“그리하겠사옵니다.”

신소봉은 곧장 환관 하나를 지목해서 태의감으로 보냈다. 그를 부르는 이유는 이제 더는 견디기 어려워서였다.

지금까지 나는 가능하면 강한 진통제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상황으로 물러나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황제가 약에 취해서 미쳐버릴 경우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견디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기에 약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참을 수 없는 통증이 올 때마다 이를 악물고 버텼더니 어금니가 흔들렸다.

모르핀을 구할 수 있다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한 대 맞고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통증의 강도는 세지고 있었다.

가능하면 참아보려 했으나 더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라 나는 옥좌의 손잡이 부분을 두어 차례 두드린 후에 일어났다.

잠시 아일을 중지하라는 신호였다.

그러자 다들 입을 다물고 머리를 조아리며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지금은 크게 말할 기운도 없기에 그들이 노력해야만 했다.

“이번 아일에서 다룰 중요한 안건은 모두 끝난 것 같으니 짐은 그만 가보겠소.”

신하들의 동요는 거의 없었다.

처음으로 조회 중에 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다들 안쓰러운 눈빛으로 신소봉과 홀치의 부축을 받으며 나서는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게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타인에게 기대어 움직여야 하는 이 상황이 꽤 자존심 상했다.

잠시 후에 침전에서 육진서가 처방한 진통제를 복용하자 그나마 나아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황태자가 왔다.

왕현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나날이 삐쩍 말라가는 내 모습은 아무리 봐도 나 스스로조차 적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녀석은 나만 보면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가는 여동생 왕혜 공주와 달리 애써 덤덤한 척을 하였다.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통증을 다스리는 탕약을 마셨더니 조금 괜찮아졌구나. 아일은 무사히 마쳤느냐?”

“급한 안건은 거의 마무리되었고 일부는 다음 아일에 논의하기로 하셨사옵니다.”

황태자는 내가 없는 동안 나눴던 안건에 대해서 최대한 간결하게 보고했다.

대부분은 나였어도 같은 결론을 내렸을 정도로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아예 지적할 것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 최대한 쉽게 설명을 해주었고 황태자라면 금방 고칠 것이기에 크게 걱정되진 않았다.

“이제 고려를 너에게 맡겨도 되겠구나.”

“소자는 아직 멀었사옵니다. 폐하께서 오래 자리를 지켜주시며 더 많은 것들을 알려주셔야 하옵니다.”

“짐도 그러고 싶으나 현실을 직시 해야 하지 않겠느냐. 논의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면 되지 않느냐.”

솔직히 조금 전에 혼절할뻔했다.

통증이 오는 간격은 점점 줄어들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도당에서 나누는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제 더는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그건 아집에 불과했다.

“그전에 짐에게 하나 약조를 할 게 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시옵소서.”

“자치령으로 떠난 아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최대한 도와주거라. 곤이는 대한국의 부마이기 이전에 고려의 자치령을 다스리고 있음을 잊지 말거라.”

해왕 왕곤의 위치는 꽤 복잡했다.

나날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으나 영토는 고려의 자치령이고 그를 해왕으로 제수한 것은 고려가 아닌 대한국의 진우량이었다.

그 역시도 영토의 일부를 해왕에게 주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게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이다.

고려에서 왕의 자리를 줄 수도 있으나 그렇게 되면 마찬가지로 자치령인 연주에 있는 왕수의 자리가 애매해진다.

분명 그 역시 왕의 자리를 제수받길 원할 것이 분명한데 그곳마저 고려에서 떼어낼 수는 없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곤이가 스스로 왕의 자리를 넘어서 동남아 전체를 아우르는 황제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쉽게 황태자는 받아들였다.

어차피 바다 너머 먼 곳의 일이라 어쩔 수 없다는 일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고려의 황족이자 자신의 아우가 더 넓은 영토를 다스릴수록 고려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은 녀석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고려에게는 마두라이라는 좋은 예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었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왕현은 그 지시에 토를 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우애가 좋던 형제라 그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 자리에 앉으면 그 좋던 관계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가 없었다. 서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 황태자를 내보내고 신소봉에게 삼정승을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마침내 내가 결심을 내린 것을 기뻐하며 정몽주 등을 불러왔다.

더는 정사에 얽매여 무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병이 진행되는 것은 막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정몽주와 정도전 그리고 이원림 등이 들어오자 나는 그들에게 내 결심을 전해주었다. 어차피 예정되어 있던 일이기에 내 표정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홀가분한 느낌이었다.

“황태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상황으로 물러날 테니 삼정승은 서둘러 준비를 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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