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94
돌을 깎는 석공 여민.
그는 나름 평양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아니 고려 전체를 놓고 봐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은 돌에 글귀를 새기는 것이었는데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이라 자부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게 그냥 생긴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병이 있으셨던 어머니를 위해 직접 만든 목불에 기나긴 불경을 깨알 같이 새기다 보니 생긴 능력이었다.
석공 일을 시작할 무렵에는 사찰에서 주문한 석불을 만들었고 최근에는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이들을 위해 일했다.
만드는 작품도 매우 다양했다.
굳이 사찰을 위해서만 일할 필요는 없는 것이 현재 고려는 예술이 성행 중이다.
화가나 조각가 등의 인기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평양의 미술관이 세워진 후부터 시작되었다.
폐하께서 직접 그린 재상들의 초상화 옆에 자신의 그림과 조각상이 세워지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최근에는 부유한 가문치고 저택 정원에 조각상 하나쯤은 있었고 방안에는 명성 높은 화가의 그림이 당연히 걸려 있었다.
그만큼 거액의 후원도 많아졌다.
대부분 자신이 원하는 조각상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와 함께 재물을 가져다줬다.
여민과 같은 명성 높은 이들은 향후 2년 가까이 계속 일이 잡혀 있을 정도였다.
화가와 달리 석공은 작품 하나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적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민은 조금 상황이 달랐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의뢰도 위약금까지 무릅쓰면서 모조리 해지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미친 짓이라고 손가락질할 이야기였으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정말 밀직사에서 너한테 관직을 제수하겠다고 연락이 왔단 말이야?”
여민의 어린 시절 동무인 일섭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다시 한번 되물었다.
요즘 모든 작품 활동을 접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왔는데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여민은 양민이었으나 천민 취급을 받던 향, 소, 부곡중에 차를 재배하는 차소(茶所) 출신이다.
“내가 지금 따순 밥 먹고 허풍이라도 치고 있다는 거야?”
“도저히 믿어지지 않으니까 그렇지. 도대체 뭘 보고 너한테 9품도 아니고 7품의 관직을 주겠다는 거냐?”
“나 정도면 충분히 자격이 있지.”
“혹시 저화를 달라고 하지 않디? 아무리 봐도 네 돈을 노리고 접근한 사기꾼 같아.”
“비싼 백자술(잣술)까지 얻어먹고 잣 같은 헛소리를 할 거면 썩 꺼져.”
일섭의 손에 쥐고 있던 술병을 여민이 낚아채려고 하자 그는 손을 번쩍 올렸다.
간발의 차이로 허공을 가로지른 친구의 손을 바라보며 그는 사발은 놔두고 병째로 벌컥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크아아. 나는 백자술이 가장 좋더라.”
고려에는 여러 종류의 술이 있다.
배꽃으로 만든 이화술부터 죽엽술과 송술 같은 것도 요즘 인기를 끌고 있었다.
주막과 음식점이 시전 곳곳에 생기면서 경쟁을 하는 과정 중에 각지에서 가지고 온 독특한 술이 알음알음 알려졌다.
“아주 입만 고급져. 이제 나도 백자술은 부담돼서 더는 못 마실 것 같으니 너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실컷 마셔라.”
“이제 이 술을 얻어 마시는 것도 끝인가. 그런데 너는 지금도 충분히 잘 먹고 잘사는데 굳이 관직을 얻어야겠냐?”
“고려를 위해 일하는 것이 뭐 어때서. 그것만큼 보람된 일이 어딨어. 그깟 돈이야 다시 벌면 그만이지.”
솔직히 일섭은 이해가 안 되었다.
7품의 관직이면 적지 않은 녹봉이 나오나 현재 그가 버는 것에 비교할 수 없었다.
차라리 일감이 많은 지금 바짝 벌어서 공방을 하나 크게 차리는 게 이득이다.
하지만 여민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천출에서 벗어나 번듯하게 사는 것이 우리 엄니의 평생 소원이셨잖냐.”
“···쯧! 할 말이 없게 만드네.”
“어쩌것냐. 관복을 입은 이들만 보면 나한테 미안하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시던 거 너도 알잖아.”
“그래도 좋은 세상 보시고 떠나셨잖아.”
“정말 다행이지.”
둘은 동시에 잔을 채워서 마셨다.
돌아가신 여민의 어머니를 위한 애도의 잔이자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주신 폐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잔이기도 했다.
여민의 모친은 차소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아들의 미래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에 많이 슬퍼하셨다.
자식의 앞길을 가로막았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나날이 무색하게 고려는 많은 부분에서 바뀌었다.
그들이 어린 시절에는 정말 인간 취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행정 구역 자체가 사라지고 오히려 거기서 얻은 기술을 바탕으로 성공한 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런데 너처럼 조각하는 이들은 밀직사가 아니라 공부나 문화부에 소속되는 게 보통 아닌가?”
“그게 나도 조금 의문이야.”
“도대체 뭘 시키려는 거지?”
여민도 그건 알지 못했다.
관직과 그에 따른 혜택만 이야기 들었을 뿐이지 자신이 뭘 해야 하는 건지 질문했으나 명확한 답을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충 예상되는 것이 있긴 했다.
밀직사에서도 종종 석공을 구했다.
얼마 전에도 북해도와 부상도에 고려의 땅임을 선언하는 표문을 새기기 위해 직접 그곳까지 장인을 보낸 일도 있었다.
아마도 그와 관련된 일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자신을 부를 이유가 없었다.
여민은 잣으로 빚어진 술을 가득 따른 잔을 들며 중얼거렸다.
“가보면 알겠지.”
*
그로부터 며칠 뒤.
여민은 첫 등청을 하게 되었다.
아직은 낯선 관복을 입어야 했기에 이른 아침부터 온갖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다.
더구나 설레어서 그런지 지난밤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눈이 퉁퉁 부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관복이 예전보다 실리적인 형태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비싼 어대(魚袋)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고 머리에 쓰는 복두(幞頭)도 십여 년 전부터 쓰지 않도록 바뀌었다.
애초에 복두라는 것이 중원에서 생겨난 관모인데 고려에서 굳이 따라 할 필요가 없다는 폐하의 지시 덕분이었다.
더구나 현재의 고려는 상투를 자른 이들이 대부분이라 크게 의미가 없었다.
지나 30년 동안 짧은 머리가 관습처럼 굳어진 덕분이다. 그 덕분에 집안이 궁핍한 초급 관리들은 한시름 놓았다.
여전히 상투가 있는 이들은 성리학을 배우는 일부 고리타분한 이들밖에 없었다.
문제는 내성에서도 생겨났다.
황궁과 여러 관청이 있는 내성은 작은 도시에 가까운 규모였다. 더구나 건물이 다들 비슷하게 생겨서 복잡했다.
나름 표지판을 여기저기 세워놨으나 여민처럼 초행인 이들은 헤매는 것이 어쩌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한동안 헤매던 여민은 옆을 지나쳐 가던 관리 한 명을 붙잡고 길을 물어야 했다.
관복을 보면 꽤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분 같았으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첫 등청부터 지각을 하게 생겼다.
“실례지만, 말 좀 여쭙겠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오?”
“제가 오늘 첫 등청이라 밀직사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됩니까?”
“아··· 자네가 오늘 오기로 한 석공인가 보군. 나는 밀직제학 신덕린일세.”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여민은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이들 중에 하필 밀직사를 이끄는 상관을 잡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이쿠, 못 알아뵈어서 송구합니다. 오늘부로 밀직사에서 일하게 된 여민이라고 합니다.”
여민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허리가 너무 굽혀져서 바닥에 코가 닿을 정도였다.
습관이라는 게 참으로 무서웠다.
“하하. 나도 밀직사로 등청하는 길이니 같이 가면 될 걸세.”
“감사합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었는데 뭘 그러나. 그런데 자네의 이력을 보니 차소 출신이라던데 맞는 것인가?”
여민의 안색은 단번에 굳었다.
자신의 출신을 물어보는 이들의 숨겨진 의도는 대부분 비슷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들은 자신의 대답을 들은 이후부터 벌레를 바라보듯 보는 편이다.
아무리 나라에서 신분을 복원시켜줬어도 소에서 자란 이들은 아직 그들의 눈에 버러지만도 못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기에 여민이 맞다고 대답하자 그는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경계하나. 요즘 자네 같은 소 출신의 관리가 없는 것도 아니잖는가. 대신 다른 이들보다 더 노력해야 할 걸세. 편견이라는 게 쉽게 지워지진 않거든.”
“명심하겠습니다.”
“이런··· 조회에 늦을 거 같으니 서둘러 가야겠네.”
어느 사이에 성벽에는 조회 시간을 알리기 위해 대형 북을 두드릴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다섯 번 두드릴 때까지 등청하지 못한 이는 지각이었다.
인사 고과와 근무 평가에 영향을 주기에 고위 관리도 지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당장은 문제가 없겠지만,
평가가 낮으면 지방의 한직으로 간다.
재수 없게 탐라나 발해 같은 오지로 가면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는 게 쉽지 않았다.
정말 심각할 경우에는 불명예스럽게 관직에서 쫓겨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렇게 밀직사로 들어선 두 사람은 따로 잠시 면담을 가졌다.
“내 소개는 아까 했으니 그건 넘어가고 앞으로 자네가 할 일부터 먼저 알려줘야 할 것 같은데 괜찮은가?”
“뭐든 지시만 내려주십쇼.”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했겠지만, 자네에게 이걸 맡기려고 하네.”
신덕린은 곧장 서책을 꺼냈다.
얇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두꺼운 수준인데 적어도 수십 장을 엮은 것처럼 보였다.
살짝 앞 장을 들춰보려 하자 신덕린은 그보다 먼저 자신의 손을 위에 올려놨다.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일이네. 이걸 펼치는 순간부터 모든 일은 함구해야 하니 신중하게 결정하게.”
그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여민은 가슴 속이 뜨거워졌다.
그에게 있어서 황제 폐하는 하늘 같은 분이셨다. 그분을 위해 일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관직을 얻은 것이었다.
자신이 얻은 모든 것이 폐하께서 내려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러겠다며 다짐을 한 이후에 신덕린이 건넨 서책을 펼친 그는 곧장 후회가 되었다.
“설마 이걸 다 깎으라는 말입니까?”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도무지 말이 안 나올 정도였다.
서책에 쓰여진 글씨는 생각보다 작아서 모두 합치면 수천 자는 될 것 같았다.
글자를 돌에 새기는 일이 그의 장기인 것은 사실이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작업 중에 정을 두드리다가 힘 조절에 실패하거나 각도가 어긋날 경우도 있다.
그렇게 획이 하나라도 틀리면 모든 게 수포가 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훈민정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당연히 한글이 한자에 비해 쉬웠다.
일부 한자는 획이 너무 복잡해서 여민도 쉽게 파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 글씨가 여럿 있으면 작업하는 시간이 곱절이나 걸렸다.
“지역마다 나오는 돌의 성질이 미묘하게 다른데 혹시 이건 어디에 세우실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자네에게 아직 알려줄 수 없네.”
신덕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에 잠시 살펴본 서책의 내용을 떠올려 보면 마치 폐하의 일대기와 업적을 그대로 옮겨 적은 것처럼 보였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실제로 밀직 제학은 다시 한번 지금 본 내용과 작업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작업 기간이었다.
신덕린은 자신에게 준 서책을 모두 돌에 새기길 원했고 주어진 시간이라고는 고작 반년에 불과했다.
솔직히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성벽에 글자를 새기는 것도 아니고 돌의 표면은 한계가 있으니 새끼손톱 정도의 크기로 작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글자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작업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기간 내에 완성하려면 고려 전역의 석공이 모여야 가능한 일이었다.
신덕린도 여민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곧장 눈치채고 선수를 쳤다.
“설마 혼자 하라고 하겠는가. 자네 밑으로 석공 여럿을 붙여줄 걸세.”
“혹시 몇 명인지···.”
“최소 서른 명은 염두에 두고 있는데 사람 구하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그렇겠죠.”
자신의 밑에 석공을 붙여준다고 했으나 언제 구해질지 알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자칫 돌을 깎다가 제명에 죽지 못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여민은 살짝 고민됐는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하아··· 관직이고 뭐고 그냥 지금이라도 도망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