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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91화 (191/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91

방국진의 여양국이 무너지자,

인근의 정세는 급격하게 바뀌었다.

기존에도 고려가 영향력을 펼치던 바다의 넓이는 상당했으나 이제는 그 범위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일종의 독점 체제와 같다고 할까.

그 덕분에 해적들도 난리가 났다.

과거에는 고려 해군의 눈을 피해서 중국 바다에서 나름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불가능해졌다.

고려의 해군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니며 해적의 본거지를 박살 냈다.

아직 소규모 해적이 감시를 피해 활동하고 있으나 예전처럼 많은 수의 해적이 몰려다니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그들이 숨어 있을 수 있는 곳은 절강 지역을 포함한 대주국 부근이 전부였다.

그런 일련의 과정은 모두의 평화를 위한 고려의 헌신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고려는 왜국을 상대로 비공식으로 운영하던 사략 함대를 증설하여 절강 지역 부근에 배치하고 있었다.

고려의 허가 받지 않은 상선.

그리고 대주국과 원나라로 들어가는 배들은 사략 함대에 의해 나포되었다.

당연히 고려에서 운영하고 있는 것은 어림짐작하고 있었으나 직접 고려로 사신을 보내 성토하는 이는 없었다.

당연히 대주국은 펄쩍 뛰었다.

자신들의 젖줄이라 할 수 있는 절강의 무역이 점차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고려와 척을 진 이후부터 점차 교역량이 줄어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일이 틀어지면 그걸 빌미 삼아 고려의 해군이 난입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걸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새로운 해상 세력이 나타난 것이다.

고려의 이황자인 왕곤은 마두라이 등을 돌아보고 돌아온 뒤에 곧장 대한국의 공주와 혼례를 올리고 해남성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해왕(海王)의 자리에 오른 뒤에 대만과 해남성을 자치령으로 삼았다.

“나세 장군은 잘 도착했는지 모르겠소.”

“지금쯤이면 대만에 도착해서 해적 무리의 잔당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것이옵니다.”

그에 대한 답을 한 것은 정룡이었다.

이황자의 여정에 함께 따라왔던 나세 장군은 대만을 관리하기 위해 떠났다.

당분간은해남성과 해왕의 안위를 책임지는 자리는 정룡이 맡아야 했다.

현재 그는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정도였는데 해군의 훈련부터 온갖 일을 도맡아서 처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해남성이 일개 무역항 수준에 불과했을 때와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었다.

엄연히 왕이 있는 나라가 되었다.

당연히 도당 등의 체계를 도입해야 했다.

하지만 해남성에 있는 고려의 관리는 턱없이 부족했고 원주민 중에 일을 맡길 이들은 정말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적어도 중요한 직책을 맡길 믿을 만한 이들이 필요하옵니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폐하께서 보내신 칙서를 통해 올해 학당을 졸업하는 이들 중의 일부를 지원해주시기로 약조를 하셨소.”

“가능하다면 경력이 많은 이들도 포함되어야 균형이 맞을 것이옵니다.”

학당에서는 대부분 이론을 배운다.

정룡 역시 학당과 성균관을 거쳐 해군이 된 터라 졸업을 하는 이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대충 예상은 되었다.

아무리 똑똑한 이들이라도 경험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다음에 보내는 배편에 그렇게 청하겠소.”

왕곤도 그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가능하면 스스로 일어서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으나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기본적인 부분은 염치 불고하고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래야 폐하께서 내리신 지시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한국의 공주와 혼례를 치를 무렵.

폐하께서는 그에게 임무를 하나 주었다.

그건 해남성과 대만을 잘 다스리라는 것을 넘어서 평생을 바쳐서 일궈내야 하는 일종의 업적과도 같은 것이었다.

해남성은 일종의 발판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바라시는 것은 자신이 이곳을 기반 삼아 더 확장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해남성과 마주 보고 있는 교지국(베트남)이 될 수도 있고 대만 남쪽에 바랑가이라 불리는 여러 개의 소국도 있었다.

“지금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있는 곳들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시오.”

왕곤은 해도를 펼쳐서 바랑가이 국가들이 있는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고려가 십여 년 전에 제작한 해도에는 동남아부터 인도양까지 일정 크기 이상의 섬은 대부분 표시되어 있었다.

지도를 내려다본 정룡은 잠시의 고민도 없이 곧장 알겠다며 왕곤에게 답했다.

왜 그걸 시키는 건지 묻지도 않았다.

폐하께서 보낸 칙서의 내용을 아는 유일한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확실히 덩치가 큰 교지국보다 바랑가이부터 도모하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당장은 교지국을 넘보는 것은 힘들었다.

아직은 오히려 이쪽이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왕곤은 언젠가는 폐하처럼 원나라를 상대로 열세였던 상황을 뒤집을 자신이 있었다.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닌 것이 이미 그의 휘하에는 이백여 척의 배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건 모두 고려에서 받은 것이었다.

얼마 전에 여양국을 공격한 이후에 완파된 배를 제외한 나머지는 수리한 고려는 그걸 모두 해남성으로 보냈다.

남쪽 바다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고 그 덕분에 해왕의 자리에 오른 왕곤은 순식간에 영향력을 키울 수 있었다.

문제는 배에 태울 해군의 부재였다.

그건 시간을 두고 양성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고려의 해군에서 보낸 교관이 있기에 다행이었다.

과거 고려가 겪은 시행착오를 다시 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큰 도움이었다.

대한국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

장인어른이 된 진우량은 해남성의 고질적인 문제가 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백성 중에 신체가 건장한 이들을 뽑아서 수만 명이나 해남성으로 보냈다. 지난 전쟁에서 고려에게 빚진 것이 제법 많기에 그걸 해소하기 위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교지국을 시작으로 그 인근의 대륙 전체를 가졌으면 하오.”

왕곤의 포부는 상당히 컸다.

지금까지 이황자로 머물며 일부러 꾹 누르고 있던 야심이 폭발한 것이었다.

어쩌면 상당히 현명한 처사였다.

만에 하나 어린 시절부터 황태자가 척을 지고 그의 자리를 탐했다면 폐하께서 이런 기회를 주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제약이 풀렸다.

고려와 대한국을 제외하면 어느 곳을 도모해도 문제 될 것이 없는 상황이다.

어쩌면 폐하께서도 그걸 알기에 일부러 해남성에 자신을 보낸 것은 아닐까.

지금까지 곁에서 보아온 바에 의하면 아무래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할 것들이 상당히 많사옵니다.”

“무엇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시오?”

“징병을 하더라도 일단 인구가 많아야 가능한 일이옵니다. 교지국만 보더라도 해남성의 수십 배에 달하는 곳이옵니다.”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라 생각되오. 폐하께서 하셨던 것처럼 목표는 높게 세우되 멀리 보아야 할 것이오.”

정룡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역시 폐하의 아들답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황태자께서는 황후 마마를 쏙 빼닮고 이황자께서는 황제 폐하를 닮았다는 말이 괜히 시중에 나도는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해왕께서는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였기에 앞날이 창창했다.

질풍노도와 같은 나이인데 이렇게 차분하게 멀리 바라보다니 향후 이 나라가 어디까지 발전할지 기대도 되었다.

이황자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기로 마음먹고 따라온 거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나저나 어제 들어온 동오의 상선을 통해 들었는데 폐하께서 태손(太孫)을 보셨다는 소식이 있었사옵니다.”

“확실한 것이오?”

“다음에 오는 사신을 통해 들어야 정확하겠지만, 이미 평양의 백성 대부분은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하옵니다.”

아이가 태어났다고 곧장 알리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적어도 백일 이상은 지켜보는 것이 이 무렵의 관습이었다.

갓난아이의 사망률이 워낙 높으니 생기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 아이가 장차 고려를 이끌 위치라면 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아들인지 딸인지 알려진 바는 없소?”

상당히 민감한 질문이었다.

듣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이 가능한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곤은 불충한 의도를 담아 물은 것은 아니다.

정룡도 그걸 잘 알기에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었다.

“황태자님의 뒤를 이를 왕자님이라 하오니 경축할 일이옵니다.”

“오호라! 안 그래도 황실의 손이 귀하다고 폐하께서도 긴 시간 동안 곤욕을 겪었는데 잘 되었소.”

“이번에 고려로 가는 배에 선물을 채워서 보내는 것은 어떠시옵니까.”

“좋은 생각이오. 그렇게 준비하시오.”

왕곤에게는 쌍둥이 누이가 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진짜 누나처럼 따른 것은 황태자비가 된 채윤이었다.

궁궐에서는 몇 안 되는 또래의 아이인 쌍둥이를 챙겨주고 같이 놀아주었던 덕분에 오히려 형보다 우애가 깊었다.

그런 누이가 첫 출산을 한 것이다.

몸은 괜찮은지 걱정됨과 동시에 곁에서 직접 축하해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그제야 왕곤은 자신이 가족과 멀리 떨어져 어쩌면 평생 다시 볼 수 없을 거란 사실을 서서히 실감하고 있었다.

매일 붙어 다녔던 쌍둥이 누나인 왕혜를 비롯해서 이제 막 태어난 조카와 부모님 그리고 형님까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었다.

고려를 떠나기 직전에 폐하께서 직접 그려준 가족들 초상화가 있었다.

그게 작게나마 위안을 주고 있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벌써 향수병이 생겨 오매불망 고려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이곳은 고려와 달리 발전하지도 않았고 문화적인 부분도 매우 뒤처졌다.

평양에 있는 궁궐에 살 때는 전혀 모르던 불편함이 있었는데 평생 살아야 하는 곳이 이 지경인 것은 조금 충격에 가까웠다.

서서히 훈민정음과 고려의 말이 보급 중이기는 하지만,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에 길게 봐야 했다.

고려의 영향력 아래 놓인 것인 꽤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해남성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이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하지만 누굴 탓할 수 없었다.

이제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다.

그 책임감은 상당히 무거웠는데 지금까지 폐하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무게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있다면 이미 고려는 그런 과도기를 거쳐서 체계가 마련됐다.

그걸 그대로 가져오면 된다.

현지 상황에 맞춰서 수정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여러 곳이 있으나 시행착오는 대폭 줄어들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해남성은 고려와 마두라이를 오가는 상선의 경로에서 중간 지점이다.

무역선이 이곳에 머물면 일정량의 비용을 내고 있기에 벌어들이는 재물도 많았다.

워낙 기반 시설이 잘되어있는 덕분에 긴 항해를 멈추고 쉬어가는 이들도 많았다.

그걸 잘 활용한다면 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었다.

*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뒤.

해왕의 출현은 큰 충격을 주었다.

고려와 대한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덕분에 그곳은 기존과 다르게 순식간에 발전을 거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해왕은 백여 척을 더 추가하여 삼백 척이란 함대를 구성했다.

그중의 수십 척은 고려에서 만든 쾌선 중에 퇴역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차피 폐기할 예정이던 배를 수리하여 다시 쓰는 것이라 수명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화포와 화약이 있었다.

고려에서 마두라이로 보내는 양 중의 일부를 해남성에 할당해준 덕분이었다.

그만큼 마두라이의 판매하는 양은 줄었으나 최근에 그 지역은 전투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서 가능한 일이다.

당연히 인근 바다는 해왕의 영역이 되었고 해왕의 영토로 흡수되는 섬도 그사이에 제법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루손섬이었다.

아직은 이름조차 짓지 못했으나 훗날 필리핀의 영토가 되는 그곳은 해남성보다 더 큰 곳이었는데 전체를 다 귀속시키지는 못하고 일부만 가져왔다.

해상 전력에 비해 육상 전력이 부족한 탓에 지배력이 제대로 닿지 않은 탓이다.

그것 역시도 시간이 어느 정도 해결해줄 문제이기에 크게 아쉬워하진 않았다.

그렇게 해왕이 차근차근 동남아 해역을 장악하고 있는 사이에 시간은 빠르게 흘러 1381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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