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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88화 (188/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88

고려에서 연방제를 논의할 무렵.

대한국에서 가장 크다는 관동성의 주해(珠海) 항구에 고려의 선박이 들어섰다.

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 선박에는 고려의 상단을 의미하는 돛이 걸려 있었는데 항구에 정박한 배들의 상당수가 고려의 배였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런 선박 대부분이 심부와 동오 상단의 것이었는데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중소 규모 상단도 제법 많아졌다.

지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두 상단이 얼마나 많은 재물을 벌어들인 지 잘 알고 있기에 다들 해양 무역에 뛰어든 결과다.

“방금 들어온 배는 뭔데 대기도 없이 곧장 항구로 들어오는 거야?”

“시골에서 올라온 촌놈다운 질문이네.”

“에이씨. 자꾸 그럴 거야? 너도 관동에 온 지 겨우 몇 년밖에 안 되었잖아.”

“그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 저기 돛에 그려진 푸른 빛이 감도는 상괭이 문양 보이지?”

그가 손가락으로 돛을 짚어주자,

부둣가 노동자는 보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어린 시절 고향 친구이자 하역 반장은 동오라는 고려의 어용 상단에서 사용하는 문양이라고 알려주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물론이지. 심부 어르신의 상단과 함께 고려 최고의 상단이자 고려의 황제가 직접 관리하는 어용 상단이잖아.”

“어쩐지···.”

“해적들도 저 문양이 그려진 배는 절대 안 건드리는 걸로 유명해.”

하역 반장의 말에 남자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되물었다. 그가 아는 상식으로는 해적이 그런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러자 그는 수년 전에 방국진이 다스리는 지역을 지나가던 동오 상단의 배를 털어갔던 해적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때 난리도 아녔지. 어떻게 찾아낸 건지 해적들 본거지에 고려 해군 백여 척이 나타나서 싹 쓸어 버렸어.”

“쓸어 버려?”

“그 인근에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전혀 없었다고 하더라.”

“에이~ 말도 안 돼.”

하지만 노역 반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친구에게 당시에 방국진이 그 일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려주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항구에서 일하는 이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방국진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그 인간이 바다에서 남들 눈을 피해서 해적질을 한 것이 워낙 많잖아.”

“그 이야기는 들어본 것 같아.”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는 방국진도 바다 위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고려의 해군이야.”

당시에 방국진이 필사적으로 중재하지 않았다면 해적을 소탕한다는 핑계로 그가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도 있었다.

수많은 상선을 띄우는 고려 입장에서 보면 가장 거슬리는 존재가 방국진이다.

“어쨌든 그때 이후로 방국진이 관리하는 해적들은 고려의 상선을 보면 오히려 피해갈 정도야.”

두 사람이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그들이 지켜보고 있던 배는 접안을 마치고 간단한 절차를 거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에 누가 타고 있던 건지 평소 콧대가 높던 항구의 관리 하나가 서둘러 관리 사무소로 뛰어갔다.

그런 뒤에 머지않아 배에서 고려의 관복을 입은 이들이 연달아 내렸다.

그들 중의 절반가량은 주해는 처음인지 주위를 살피느라 상당히 바빠 보였다.

그들의 정체는 이황자 왕곤의 혼례를 논의하기 위해서 보낸 고려의 사신이었다.

“절강이 남포항 못지않게 커다랗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으나 관동의 주해도 상당히 큰 것 같습니다.”

감탄사를 터트린 이는 신라 경순왕의 부마였던 황경의 후손인 황군서였다.

그는 이번에 사신단을 이끌고 온 한천을 보필하는 역할로 동행하게 되었다.

한천은 얼마 전까지 경상도 안렴사의 자리에 있던 이로 과거 우정승 자리까지 올랐던 한악의 손자이기도 했다.

“요즘 절강 지역의 무역량이 대폭 감소했다니 아마 이곳보다는 규모가 작아졌을 것이오.”

“그게 다 장사성의 욕심 때문이지요. 고려와 척을 져서 그들이 얻은 것이라고는 고립되는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황군서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장사성의 대주국은 동맹이던 고려에게 등을 돌린 이후에 화약을 직접 생산했다.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실패였다.

그들이 만든 화약은 기존에 고려에서 사들이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한 수준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터져서 사고가 났고 심지어 사거리도 5할 수준에 불과했다.

가장 큰 문제는 정량의 화약을 사용해도 균일한 효과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하는 곳으로 쏘지 못하는 화포는 전쟁에서 커다란 활약을 하지 못한다.

결국에는 대주국의 장군들조차 화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당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관리는 금방 올 것 같습니까?”

“우리가 예정되어 있던 사신단은 아니기에 상부에 보고하려면 생각보다 꽤 시간이 걸릴 것이오.”

“확실히 다른 나라보다 고려가 그런 체계는 잘 잡혀 있는 것 같습니다.”

한천은 황군서의 말에 동의했다.

사신으로 이곳에 온 것은 두 번째지만, 그때마다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항구의 관리가 잠시 보고를 하러 간 틈에 한천은 씁쓸하게 주변을 바라봤다.

솔직히 이번에는 사신단을 이끌고 이곳에 오고 싶지는 않았다.

이황자의 혼례는 문제가 많았다.

대한국과 혈연을 맺는다는 발상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고려의 귀족들 사이에도 흔하게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마마님들의 출신이었다.

원나라 황실의 핏줄부터.

멀리는 마두라이 술탄의 핏줄까지.

선왕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황태자까지 계속해서 타국의 피가 섞이니 이러다가 고려의 피가 희석되어 버릴 것 같았다.

실제로 그와 관련된 우려 섞인 목소리가 은근히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지만 쉽게 볼 문제는 아니었다.

현재의 황후마마를 비롯해서 황태자비도 누구보다 백성을 아끼시는 분들이었다.

황후마마가 계시기에 폐하가 온전히 정사를 돌볼 수 있다는 것은 도당의 관리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별거 아니오. 그나저나 이번에 아들이 폐하께서 직접 관리하시는 영재 학당에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오?”

“그건 또 어떻게 아셨습니까?”

“항해 중에 다른 이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되었소.”

황군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정확하게는 정실에게서 얻은 아이가 아닌 서얼이지만, 굳이 그걸 먼저 자신의 입을 꺼내서 좋을 것이 없었다.

최근에 주자학을 배우는 이들이 신분의 귀천을 논했으나 고려에서는 서얼이라고 고위관직에 못 오를 것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우둔한 저와 달리 제 아들을 좋게 봐주시어서 올해부터 학당에 들어가서 공부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한천은 조금 부러웠다.

영재 학당을 거쳐서 진방회까지 들어가면 성공은 이미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다.

실제로 그 과정을 거친 하륜과 같은 이들은 어느덧 도당에서 중요한 자리 하나씩은 맡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탓인지 영재 학당을 다니는 아이를 둔 이들은 가문의 영광처럼 여겼다.

아쉽게도 고려의 개국공신의 피가 흐르는 청주 한씨 집안에서는 아직 영재 학당과 진방회 출신이 아직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황군서도 고민이 없진 않았다.

그의 둘째 아들이 천재라 일컬어지면서 정실의 아들인 맏아들이 어린 시절부터 계속 비교당하며 꽤 고통받고 있었다.

차라리 그 재능이 맏이에게 갔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오?”

그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한천은 둘째 아이의 이름을 물어왔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 사신단을 이끄는 이였기에 타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군서는 어쩔 수 없이 둘째 아이의 이름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초명은 수로(壽老)라 하고 이름은 황희라고 지었습니다.”

“그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데···. 아! 어린 시절부터 영특하고 기억력이 좋기로 평양에서 꽤 유명하지 않았소?”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렇습니다.”

“그 이름은 꼭 내가 기억하고 있겠소. 혹시 아는가. 지금처럼만 잘 크면 언젠가 삼정승 자리에 오를지도 모를 일이지.”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하하!”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소리였다.

한천과 달리 그의 집안은 도당에서 주요 직책을 맡은 것이 꽤 오래된 일이었다.

그나마 조부가 호조에서 참의였던 것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이력이었다.

하지만 우정승까지 올랐던 한천의 조부와 비교하면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대한국의 관리가 다가왔다.

관복을 보니 아까 보고를 하러 간 이보다 더 높은 관직을 가지고 있는 이로 보였다.

그는 상당히 정중했으나 그렇다고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대한국도 칭제건원을 한 터라 고려와 동등했다.

영토의 크기와 병력의 규모.

모든 것을 놓고 봐도 부족하진 않았다.

오히려 대한국의 관리라는 자부심마저 엿보였는데 한천과 황군서를 비롯한 고려의 사신들에게는 꽤 우호적이었다.

두 나라가 동맹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는 덕분의 가능한 일이었다.

“황궁까지 이동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사신단은 그의 안내를 받아 배를 타고 주강(珠江)을 거슬러 올라가 대한국의 황궁이 있는 광주로 곧장 향했다.

물길이 여러 갈래로 나눠지며 삼각주 위에 건물이 지어진 모습은 꽤 이국적인 터라 사신단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고려와는 꽤 다른 모습이었다.

그래도 상당히 번성한 느낌이었다.

예로부터 남해 무역의 중심지로 절강 못지않은 무역량이 오가는 곳 다웠다.

실제로 이곳은 과거에 남한 왕국이란 곳의 수도였기에 인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평양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계획 도시로 만들어서 수도를 옮긴 고려와 달리 이 도시는 무척 혼잡했다.

마치 난개발이 성행했던 과거의 개경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사신단 중에서 그걸 입 밖으로 꺼내놓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감찰사에서 해준 말 덕분이었다.

고려에서 여러 나라와 해상 무역을 하는 터라 대주국은 물론이고 대한국에도 고려의 말과 글을 사용하는 이가 많았다.

더구나 항구의 관리라면 그 확률이 상당히 높다고 보아도 되었다.

그 덕분에 사신단은 쓸데없는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 입을 꼭 다물었다.

“이곳까지 오시는 길에 파도는 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리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행이군요. 이 부근은 며칠 동안 바람이 심상치 않아서 발이 묶인 배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오히려 말은 저쪽이 더 많았다.

적막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인지 계속 말을 걸어오는 터라 귀찮을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궁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물길을 타고 높게 올려진 성벽 앞에 있는 곳에 멈추자 마중 나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천 등의 사신단을 궁궐 외부에 있는 각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건물로 안내를 해주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하루 뒤.

한천은 드디어 진우량을 만났다.

보통 사신이 와도 며칠 뒤에 약속이 잡히는 것을 생각하면 대한국도 서둘러서 시간을 내준 것이었다.

황궁 안으로 한천이 들어서자 구면인 진우량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구려.”

“그간 무탈하셨사옵니까?”

“물론이오. 일단 자리에 앉아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합시다.”

진우량은 상당히 호탕했다.

쓸데없는 허례허식은 차리지 않았다.

태생이 어부의 아들인 것을 생각하면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한천이 모시는 폐하와는 태어날 때부터 신분의 차이가 엄청났으나 이런 점에 있어서는 비슷한 부분이 많아 보였다.

어쨌든 그는 진우량과 서로 덕담을 나누면 차를 마시다가 이내 자신이 가져온 서신을 환관을 통해 그에게 전달했다.

진우량은 곧장 그걸 펼쳐보지 않고 한천에게 내용부터 물어보았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은 탓에 미리 들어보고 싶은 눈치였다.

“안 그래도 궁금하던 참인데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오신 것이오?”

“폐하께서 이황자의 혼처를 알아보고 계신대 가능하다면 대한국과 혈연을 맺었으면 하시옵니다. 앞으로도 양국이 돈독한 사이가 되는 것은 어떠시옵니까?”

“오호라! 그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소.”

혼례에 대한 묻는 것이라 말하자,

진우량은 곧장 환한 웃음을 지었다.

안 그래도 그 역시 공주의 혼처를 찾고 있는 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장 아끼던 막내 공주가 이제 막 혼기가 됐다.

워낙 늦은 나이에 본 공주였다.

다른 언니들과 달리 가능하면 오래 곁에 두고 싶어 할 정도로 예뻐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번에 고려에서 제안한 것이 황태자가 아닌 이황자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후궁으로 공주를 보내는 것은 격에 맞지 않을뿐더러 이미 때가 늦은 상태였다.

최근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황태자비가 이번에 회임을 하였다고 했다.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아들일 경우.

경쟁이고 뭐고 이미 끝난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너무 아쉬웠다.

마두라이에서 어린 나이의 공주를 미리 보내놨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탓이 컸다.

그러나 서신의 마지막 부분.

그곳에 적힌 것을 읽은 진우량은 크게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쓰인 내용은 그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하하! 이런 조건은 거절할 수 없지 않소. 당장 날부터 잡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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