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85
황자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상당히 묘한 느낌을 받았다.
고려를 위해서 희생을 하려는 모습은 상당히 기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황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너무 과소평가를 한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아무리 왕곤이 어린 시절부터 똑똑했으나 아직은 십 대에 불과한 아이다.
이 정도의 정치적인 감각이 있을 리가 없었고 누군가 뒤에 있는 것 같았다.
가장 유력한 이는 역시 정도전이었다.
여전히 감찰 상서의 직을 수행하고 있는 그는 본학의 기본을 가르치기 위해서 아이들의 교육에 주기적으로 참여했다.
사나흘에 한 번씩은 한나절이 넘도록 같이 지내고 있을 정도였다.
정몽주와 함께 본학의 기틀을 만든 이가 정도전이고 그 학문이 곧 고려의 핵심 이념으로 삼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하지만 이건 추측에 불과한 것이라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누구더냐.”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누가 너의 미래를 가지고 나와 거래를 하라고 시켰냐는 말이다.”
“오해시옵니다.”
왕곤은 한사코 잡아뗐다.
하지만 도당에서 온갖 이들과 입으로 실랑이를 하는 나를 속이는 것은 아직 불가능한 일이었다. 딱 봐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는데 계속 추궁하자 결국에는 삼봉의 이름이 나왔다.
“역시 삼봉이더냐···.”
왕곤의 뒤에는 정도전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정도전은 언제나 개인보다는 국가의 안위를 더 신경 쓰는 유형의 사람이다.
아무리 황족이라고 하더라도 고려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이였다.
그런 그의 성향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까지 그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조선 왕조를 설계한 삼봉이라 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만든 설계 탓에 조선의 왕은 꽤 많은 제약을 받았다.
왕권(王權)을 견제하기 위해서 신권(臣權)을 높여야 한다고 여겼던 당시에 그가 가졌던 사상은 무척 위험하다.
폭군을 방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붕당 정치와 훗날 생길 온갖 폐해까지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조선 중기부터 시작되어 500년의 역사가 끝날 무렵까지 나온 행태들을 보면 아마 정도전도 생각을 고쳐먹었을 것이다.
권력욕은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더욱 높은 자리로 올라 가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 대부분이 가진 욕망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인간의 본성을 너무 쉽게 본 것 같았다.
“일단은 알겠다.”
“삼봉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옵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니 네가 신경을 쓸 필요는 없느니라.”
왕곤은 자신 때문에 정도전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당연히 나는 정도전을 불러서 아이들을 통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는 일은 더는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줄 생각이었다.
차라리 나에게 먼저 말하고 설득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큰 잘못이라고 말하기도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그 나름대로의 충심이었을 것이고 아마 내게 먼저 말했어도 황자를 해남성으로 보낼 생각은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이곳에 남아 있어봤자 황자는 계속 형의 눈치를 봐야 할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드러내면 언젠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사는 것이 황족의 숙명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가만히 있어도 주변에서 준동하여 위험에 빠뜨릴 가능성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강화도에서 서달의 손에 죽은 경창부원군이 있었다.
차라리 해남성에 가면 자신이 지닌 능력을 맘껏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더구나 진우량과의 더 강력한 동맹을 맺으면 고려에게도 이득이 될 게 많았다.
“네가 그렇게 결심했다면 대한국에 사신을 보내서 알아보겠다. 하지만 그 이전에 마두라이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텐데 언제 떠날 생각이더냐?”
우선은 무사히 다녀오는 게 먼저다.
혼례는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논의해도 늦지 않았다. 아직 마두라이로 오가는 배가 안전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너덧 번 중의 한 번은 적어도 상선 한 척 이상은 잃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었다.
예상대로 이미 배편도 알아본 것인지 왕곤은 곧장 자신이 생각하는 일정을 내게 털어놓았다.
“소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음 달에 마두라이로 떠나는 동오 상단의 배편이 있다니 그걸 타고 갈 생각이옵니다.”
*
쏴아아···.
파도가 배를 휘감을 때마다.
높게 튀어 오르는 하얀 포말은 마치 겨울에 내리는 함박눈 같았다.
넘실거리는 바다 위를 바람을 타고 가로 가리는 배 위에는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얼핏 봐도 선원으로 보이지 않는 그들은 고려의 이황자인 왕곤과 그를 보필하기 위해 따라온 나세와 정룡이었다.
나세는 원나라에서 귀화한 이로 이방실 휘하에서 홍건적의 침략을 막아낸 공을 세워서 장군의 지위까지 오른 이였다.
반면에 정룡은 해군 소속으로 최근에 빠르게 승진을 거듭하고 있는 고려에서 가장 촉망 받는 무관 중의 하나였다.
그들이 이번 여정에 함께 한 이유는 단기적으로는 황자를 보호하는 것도 있었으나 더 길게 보면 해남성까지 동행하며 방어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기존의 해남성은 해군에서 파견한 수십 척의 함대만 머물고 있었을 뿐이었다.
더구나 나세는 원나라의 강남 지역 출신이라 이번 일에 적격이었다.
“바람이 차니 안으로 드시지요.”
나세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황자에게 권유했으나 왕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긴 항해를 마치고 이제 곧 마두라이에 도착한다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 없었다.
고려 밖으로 처음 나온 그는 중간에 자신이 머물게 될 해남성을 비롯해 여러 나라를 잠시 들리며 여기까지 왔다.
그건 정말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왕곤은 그제야 세계가 얼마나 넓은 곳인지 실제로 체감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 글과 그림으로 보고 배웠던 것은 정말 일부분에 불과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에 폐하께서 읽어주신 동화에서 나온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말이 그렇게 와닿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세상이 이렇게 넓은 줄도 모르고 살아가다니 안타까운 일이지 않소.”
“저마다의 쓸모가 있는 법이옵니다.”
“쓸모라···.”
왕곤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은 어디에 써먹어야 할까.
그게 어린 시절부터 그를 계속 괴롭히던 질문 중의 하나였다. 그걸 해소해준 것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모처럼 용기를 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만들었다.
그때 한 남성이 다가왔다.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는 이번 상행을 책임지는 동길이라는 이였다.
공적으로는 동오 상단에서 십여 척의 상선을 운영하는 행수이자 사적으로는 동오의 막내아들이기도 했다.
“위치상으로는 랑카가 더 가까운데 그곳부터 들리지 않으실 생각이십니까?”
“술탄께서도 무척 오래 기다리셨을 텐데 황태자비께서 회임하셨다는 소식부터 알려드려야 하지 않겠소.”
“소신이 예측하건대 술탄께서 그 소식을 들으면 아마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동길은 어린 시절부터 배를 탔다.
십대의 대부분은 배에서 지냈다고 봐도 되었는데 당연히 마두라이를 오가며 술탄을 직접 뵌 것도 수차례나 되었다.
어용 상단인 탓에 종종 그는 화물 외에도 폐하의 서신을 전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처음에는 사신도 동행하였지만,
여정이 꽤 고된 탓에 최근에는 그마저도 없었는데 그 덕분에 동길은 상단의 행수 외에도 관직을 겸하고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동오도 소속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내수사 소속의 관직을 받았던 터라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육지가 보입니다!”
그때 머리 위에서 선원이 소리쳤다.
돛대 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이였는데 보기만 하더라도 아찔했다.
하얀 해무가 가득한 바다에서 도대체 어떻게 본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왕곤도 눈을 가늘게 뜨며 선수에서 유심히 살폈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잘못 본 게 아니냐며 물어보려던 순간에 그제야 시야 가득 넓은 대륙이 펼쳐졌다.
마두라이가 있는 대륙은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았다.
지도상으로 보면 현존하는 세 개의 제국을 모두 합쳐도 고려와 비슷했다.
그마저도 연주는 제외하고 비교한 것이었다. 실제로 마두라이는 과거의 고려와 엇비슷한 수준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에는 천축국에 있다는 마두라이가 엄청나게 커다란 나라인 줄 알았는데 신기한 일이 아니오.”
“저 역시 그랬답니다.”
“황자께서 자라시는 것보다 빨리 고려가 발전한 것이니 놀라운 일입니다.”
옆에서 나세와 정룡도 말을 거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는데 왕곤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었다.
마두라이 출신인 채윤이 자신의 고향을 엄청나게 부풀려서 말한 탓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 고향을 떠난 탓에 실제보다 훨씬 더 커다랗게 기억하기도 했었고 마두라이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어쨌든 얼마 전에 이십여 년에 달하는 항해를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만든 해도(海圖)를 보면 고려가 엄청 커졌다.
어느 곳과 비교를 하더라도,
결코 작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아니 손에 꼽힐 정도로 엄청난 넓이였고 문화와 경제적인 중심지로 손꼽혔다.
해남성만 하더라도 인근의 나라에서 보낸 상선이 수도 없이 오가고 있을 정도였다.
잠시 후에 마두라이 최고의 항구라 불리는 첸나이에 도착한 왕곤은 그곳의 풍경을 보고 솔직히 상당히 놀랐다.
그곳은 고려의 벽란도나 남포항과 비교해도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저게 도대체 몇 척이나 되는 것이오?”
“이것도 비교적 적은 편입니다. 많을 때는 거의 수백여 척의 선박이 접안을 하기 위해서 바다 위에서 기다릴 정도입니다.”
“남포항보다 더 많은 수가 아니오?”
“그중의 절반은 마두라이의 다른 지역으로 물자 수송용이라 교역 규모는 고려를 따라잡긴 아직 어렵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역전될 수도 있다.
동길의 말에 의하면 마두라이도 고려 못지않게 매년 발전하고 있다고 했다.
모든 나라는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다.
왕곤은 자신이 그 쇠락의 길을 막아낼 수는 없어도 최대한 느리게 하고 싶었다.
그때 항구 한쪽 편에서 십여 명의 사람이 접안 중인 동길의 배 쪽으로 뛰어왔다.
“행수님! 오시는 길은 무탈하셨습니까?”
분명 외모는 마두라이 사람이 맞았다.
덥수룩하고 곱슬곱슬한 수염만 보더라도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분명히 고려의 것이었다. 심지어 더듬거리는 것도 아니고 상당히 유창했다.
왕곤도 고려에 사는 여러 인종을 경험해 봤기에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었으나 막상 고려 밖에서 그런 이들을 보니 놀라웠다.
처음에는 상단 소속의 사람이 그러려니 했으나 부둣가 곳곳에서 고려의 말이 들리고 훈민정음이 사용되고 있었다.
심지어 숙소를 잡으려고 들어간 여관의 주인도 눈을 감고 들으면 고려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유창하게 말을 했다.
그러다 보니 여기가 마두라이의 항구인지 아니면 고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허어··· 여기가 정말 마두라이가 맞소?”
“이곳이 조금 특별한 곳이기는 합니다.”
“고려의 상선이 오가기 때문인 것이오?”
“폐하께서 세우신 고려의 말을 배우는 어학당이 이 주변을 시작으로 퍼져나갔고 말씀하신 대로 고려와 관련된 일자리가 많은 것도 있습니다.”
마두라이의 한글 보급은 엄청났다.
술탄이 조사시킨 바에 의하면 문맹의 비율이 현저하게 낮아졌을 정도였다.
그전까지는 글을 아는 이들이 드물었는데 이제는 어린아이들 중에 글을 못 적는 이들이 오히려 더 적다고 했다.
그만큼 쉽게 배울 수 있는 덕분이었다.
하지만 아쉽게 언어는 조금 더뎠는데 타밀 지역에서 수많은 부족이 모여 있는 지역에서는 고려의 말을 공용어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곳곳에서 고려의 물건이 보였고 두어 해 전에 고려에서 유행한 동화책이며 공연도 길거리에서 찾아냈다. 심지어 고려에서 유행하는 고무로 만든 공을 차는 아이들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술탄이 계신 궁궐로 가기 전에 거리를 돌아다니던 왕곤은 그쯤 되니 숫제 고려의 거리를 통째로 가져다가 마두라이로 옮겨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제야 그는 폐하께서 그토록 강하게 주장하던 문화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가슴 속에서 뿌듯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고려의 사람인 것 이전에 그분의 아들이란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