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84
상당히 기분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이미 황태자 왕현과 황태자비인 채윤의 나이가 약관을 넘겼고 어느덧 초야를 치른 것이 거의 2년 전의 일이었다.
오히려 조금 늦은 편이었다.
“혹시 모르니 직접 진맥을 해주시오.”
나는 아직 침전을 나가지 않은 설주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가진과 채윤을 담당하는 의녀를 못 믿는 것은 아니다.
워낙 중요한 문제라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 즉시 채윤이 쉬고 있는 곳으로 가서 다시 진맥을 한 설주는 확실하다는 확인을 해주었다.
그 순간의 느낌은 뭐랄까.
상당히 기뻤으나 조금 헛헛했다.
갑자기 엄청 늙어버린 느낌이었다.
아직 40대 중반에 들어서기도 전인데 벌써 손주를 보게 되었으니 그럴 만 했다.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이제 늙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단계에 들어섰다.
그래도 좋은 점이 있기는 했다.
더는 내게 압박을 주진 않을 것이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뒤부터 도당에서는 후궁을 더 들이라는 상소문이 빗발쳤다.
황태자 왕현과 황자인 왕곤만으로는 불안하다는 의미였다.
혹시라도 모를 일을 대비해서 몇 명의 자손을 더 봐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거의 십여 년 이상을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가진이 대놓고 말을 하지는 않았으나 극도로 싫어하는 탓이었다.
그건 원래의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었는데 공민왕이 마지못해 후궁을 들이자 가진은 질투하며 식음을 전폐했다.
하지만 그중에는 외교적인 문제가 걸려 있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기에 거절하기 어려운 순간도 정말 많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우량이 자신의 조카를 후궁으로 들여보내려던 시도였다.
장사성이 등을 돌린 이후에 현재 중국에서 고려와 가장 가까운 세력은 진우량이 이끄는 대한(大漢)국이었다.
탕화와 방국진이 이끄는 나라와도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나 거래를 하는 관계에 불과해서 동맹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실제로 현재 진우량은 고려와 가장 많은 무역을 하는 곳이라 그 비중이 작지 않아서 거절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장하구나,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앞으로 몸조리를 잘하여야 한다.”
“그러하겠사옵니다.”
“둘이 나눌 이야기가 많을 테니 우리는 그만 자리를 피해 주지요.”
한동안 옆에서 지켜보던 가진은 그쯤에서 눈치껏 자리를 피해주자며 제안을 했다.
아이는 아들 부부 사이에서 생긴 것이고 지금 누구보다 기쁜 것도 저들이다.
나는 알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가진과 함께 모처럼 담소를 나누기 위해서 만춘전으로 둘이 함께 걸었다.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습니다.”
“저 아이가 마두라이를 떠나 고려에 처음 왔을 때를 생각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오.”
“언제 크나 싶더니 막상 다 크니 서운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우리에게는 채윤도 딸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혼례를 올린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이까지 잉태하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기왕이면 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딸이라도 상관없소.”
“폐하와 고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저 아이를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지금껏 채윤이가 마음고생이 심했지 않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채윤이 황태자비가 될 때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이가 차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의 십 년 가까이 고려의 궁에서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처지로 눈치를 보면서 살아왔다.
심지어 중간에 마두라이에서 고려인이 밀려났고 고려와 마두라이 사이에 끼어있던 처지라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결과만 보면 랑카를 이인임이 다스리는 것으로 좋게 마무리되었으나 아마도 당시에는 상당히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첫 아이가 아들이라면 더는 마음을 졸일 필요가 없을 거라는 의미였다.
아마 가진도 나와 혼례를 올린 뒤에 상당히 오랫동안 회임을 하지 못하며 겪은 일이 있기에 더 마음이 쓰이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만춘전에 들어선 우리는 신소봉이 직접 차를 내려준 잔을 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아이들이 와서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황자와 공주가 오늘 문안 인사를 와서 황태자가 떠났던 것처럼 궐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고 하더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사옵니다.”
“미리 언질이라도 받은 것이오?”
“그건 아니고 요즘 궐 밖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강해지는 것 같았기에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습니다.”
역시 어머니는 위대한 것 같았다.
궁궐 내에 있는 궁녀나 내시가 아무리 애를 써도 지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그녀만큼 황자와 공주에 대해 잘 아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황자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알면 다들 반대가 심할 것입니다.”
“황태자가 다녀왔을 때처럼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할 테니 심려치 마시오. 더구나 황세손을 잉태하였지 않소.”
안타까운 일이지만,
황자의 위치가 정말 애매했다.
혹시라도 황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사용 가능한 스페어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황실의 사람이라면 자신의 지위를 누리는 대신에 그 정도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다만, 두 아이를 같이 궐 밖으로 보내는 것은 조금 마음에 걸립니다.”
“순차적으로 보내자는 이야기인 것이오?”
“그게 아니고···.”
가진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차마 자신의 입에 담고 싶지 않은 말인 것 같았는데 단숨에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
아마도 고려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쌍둥이에 대한 인식 때문일 것이다.
황자와 공주가 태어난 이후부터 나는 의도적으로 쌍둥이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상당히 기울였다.
쌍둥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동화책의 숫자도 상당히 많았고 심지어 극장에서 쌍둥이를 주제로 공연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인식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쌍둥이는 오히려 축복이라는 인식이 젊은 층을 기반으로 퍼져나가고 있으나 장년층과 노년층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실제로 매일 붙어 다니는 두 아이를 향해 은밀하게 온갖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당연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입에 담는 이들은 황실을 모욕한 죄로 목이 잘려도 할 말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소. 그리합시다.”
*
가진의 승낙이 떨어지자,
나는 며칠 후에 두 아이를 불렀다.
이왕에 보낼 거면 날이 좋은 시기가 지나기 전에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최소 1년 정도를 보고 있으나 노상에서 겨울을 두 번 맞이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하다면 고려의 사계절을 모두 온전히 느끼고 봄과 가을의 아름다움을 눈에 고스란히 담아서 돌아오게 만들어야 했다.
어쩌면 두 아이보다 내가 더 그런 나날을 바라고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근처에 온천이라도 있으면 다녀오고 싶은데 그런 것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고려에서 가장 유명한 온천 대부분이 평양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리 있었다.
어쨌든 최종적인 나의 승낙까지 떨어지자 공주는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서 춤이라도 출 것처럼 무척이나 반겼다.
“감사하옵니다. 아바마마.”
“허나 둘이 같이 떠나는 것은 불허한다.”
“두 무리로 다니는 것은 오히려 인력 낭비가 아니옵니까?”
“서로 보고 싶은 것이 다를 것이 아니더냐.”
두 아이는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각자가 가진 취향은 상당히 달랐다.
아마도 블링블링한 것을 좋아하는 공주는 풍경 좋은 곳을 위주로 다닐 것이 분명한데 황자가 끌려다닐 가능성이 컸다.
왕혜는 입을 삐죽 내밀며 그렇지 않을 거라며 부정했으나 그게 통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왕곤의 반응이었다.
아직 특별한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던 것을 들어줬으나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초에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녀석의 반응을 본 공주도 이상하다는 표정을 하며 왜 그러냐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나는 폐하와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너 먼저 나가 있어.”
“내가 있으면 안 되는 이야기야?”
“부탁이니 그렇게 해줘.”
둘은 나직하게 이야기를 나눴으나 조용한 만춘전에서 내 귀에 안 들릴 리가 없었다.
한동안 그걸로 실랑이를 하더니 마침내 공주는 툴툴거리며 만춘전 밖으로 나섰다.
그제야 황자는 내 예상에서 벗어난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바마마, 소자는 고려가 아닌 마두라이와 랑카를 비롯해 해남성까지 모두 둘러보고 돌아오고 싶사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왕곤이 꿈꾸는 미래가 무엇인지 대충 감이 왔다. 이 녀석은 자신의 형인 황태자와 다른 길을 가려는 것이었다.
황자는 아예 고려를 떠나 외지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었다.
씁쓸한 기분이 들었으나 황자의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일 것이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왕현이 황태자의 위치에 올랐고 왕곤에게는 어떤 기회조차 주지 못했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고려가 안정되려면 요왕이 그랬던 것처럼 황태자 자리를 놓고 피를 흘려가며 경쟁을 시킬 수는 없었다.
애써서 만든 고려를 다음 대에서 무너뜨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둘째인 왕곤은 아마 왕좌에 오르면 현명한 군주가 될 것이다. 황태자인 왕현보다 머리가 상당히 좋은 아이다.
백성을 위한 마음도 충분히 있어서 자애로운 치세를 펼칠 것이다.
하지만 황태자인 왕현이 부족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학문에 있어서는 왕곤에 비해서 부족한 면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마음이 단단한 아이라 뚝심 있게 자신의 길을 걸어갈 거라 기대가 되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너도 아는 것이냐?”
“물론이옵니다. 이미 소자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고 그게 제 운명이옵니다.”
“혹시 염두에 두고 있는 곳이라도 있는 것이냐?”
설마 랑카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그곳은 이인임이 완전히 장악했고 고려의 영토라 말하기는 어려운 곳이다.
그렇다고 마두라이에 있는 탄야의 밑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도 애매했다.
아직 고려의 영향력이 강하나 고려의 황족이 그의 밑에 들어가서 일하는 것도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차라리 탄야와 겹사돈을 만들어서 부마로 가는 것도 방법이나 그렇게 되면 술탄의 후계자에게는 정적이 되는 꼴이 된다.
“소자가 넓은 세상에서 경험을 쌓은 뒤에 해남성으로 가고 싶사옵니다.”
역시 예상은 안 벗어났다.
현재 고려에서 자치령으로 삼고 있는 곳은 연주 외에는 해남성 밖에 없었다.
과거에 옥새를 주고 받아낸 해남성은 백 년 동안 고려의 영토로 임대된 곳이다.
그곳은 고려에게 매우 중요했다.
고무나무도 재배 중이나 무엇보다 동남아 지역과 연결된 교역의 중심이다.
더구나 마두라이와 랑카에서 오는 교역선의 쉼터 같은 역할도 하고 있다.
“그곳은 고려의 영토가 아니라 임대한 곳이라는 것은 알고 하는 말이더냐?”
“물론이옵니다. 아직 그 기간이 90년 가까이 남아 있는 곳이 아니옵니까.”
“그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영원한 적도 없듯이 영원한 동지도 없는 것이 국가 간의 관계이니라.”
장사성이 가장 적절한 예였다.
아직 서로 칼을 겨누고 있지는 않지만, 서로가 지닌 힘이 세지고 작아짐에 따라 언제 등을 돌릴지 모르는 것이다.
황자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곳보다 앞으로 개발을 해서 고려의 땅으로 편입시킬 예정인 홋카이도나 사할린을 더 권하고 싶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없는 땅이나 위험한 일은 해남성보다 적을 것이다.
하지만 왕곤은 뜻을 꺾지 않았다.
“반대로 해남성을 완전히 고려의 영토로 가져올 수 있는 기회도 언젠가는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현재 상황을 보면 진우량이 언제 어떻게 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진우량의 대한국은 탕화와 방국진 등과 팽팽하게 싸우며 일진일퇴 중이었다.
하지만 무게추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급격하게 기울 수 있고 그게 해남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도 있었다.
아무리 고려가 해상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어도 해남성까지 닿진 않았다.
그곳에 배치된 수십 척에 달하는 전력을 가지고 제대로 마음먹고 쳐들어오는 병력을 방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건 힘들 거라고 만류할 수밖에 없었다.
“도박에 가까운 일이라 생각되는구나. 일이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
“그래서 말인데··· 외람되오나 소자가 한 가지 더 청을 드리고 싶사옵니다.”
“말해 보아라.”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였다.
꼼꼼한 황자의 성격상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잠시 후에 둘째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에서 완전히 빗나갔다.
“진우량의 혈육과 소자의 혼례를 올려서 양국 간의 혈맹을 맺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