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82
이 세상에 들어온 게 언제더라.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이 흐릿해졌다.
즉위한 직후에 내가 겪었던 고려의 궁궐 생활은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그맘때는 비교적 자유로웠던 똘루게 생활이 차라리 그리웠었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내게는 궁궐이 감옥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었다.
아니 인간의 적응력은 대단했다.
이제는 궁궐 밖의 삶이 상상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원래부터 공민왕이었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자주 있었다.
대한민국에 살던 고민완.
그 시절의 기억은 흐릿할 뿐이다.
애써 떠올려봐도 누군가가 지우개로 지우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내가 처음에 대도에서 급하게 기억나는 모든 것을 정리한 것을 봐야 떠오를 정도였다.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했다.
과거에 내가 알던 역사는 쓸모없다.
이십여 년 동안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고려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평행 우주 속의 다른 역사를 가진 고려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확실히 많이 달라지긴 했구나.’
만춘전에 걸려 있는 고려의 지도.
그걸 보면 확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의 고려는 과거 고구려와 발해 못지않은 영토를 지니고 있었고 심지어 부여 지역까지 모두 되찾아온 상태였다.
한반도의 모든 왕조를 통틀어서 이런 시대가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물론, 장수왕이 있기는 했다.
고구려의 최대 전성기를 추측해서 그린 지도를 떠올려 보면 지금과 꽤 흡사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통일하지 못했고 한반도 크기만 한 연주가 있는 지금과 비교하긴 어려웠다.
참고로 연주는 엄청난 성장 중이었다.
과거에 원주민이 살던 그곳은 또 다른 고려를 꿈꾸며 개발의 열풍이 불었다.
그들이 자리를 잡은 도시는 나날이 커지고 있었고 광산을 개발하여 상당히 많은 자원을 고려로 보내고 있었다.
그 비중이 작지 않을 정도였다.
인구도 고려 못지않게 폭증한 덕분에 이제 연주의 전체 인구는 10만 명이었다.
처음에 오백 명으로 시작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속도의 발전이었다.
원래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흡수하고 추가로 보내진 고려인 덕분이기는 했다.
그리고 연주 안렴사 왕수와 이주한 고려인이 들인 노력이 적지 않았다.
한동안 지금까지 들인 노력의 결실이라 할 수 있는 전국 지도를 바라보고 있자 신소봉이 만춘전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덧 그도 흰머리가 성성했다.
올해 내 나이가 마흔넷이 되었으니 이제 곧 신소봉의 나이도 지천명이다.
젊은 시절에 나를 따라 대도에 머물며 온갖 고생을 다 했으나 무예 훈련을 꾸준히 한 덕분인지 다행히 잔병치레는 없었다.
“오늘 오전에는 다른 일정이 없는 거로 아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건 아니옵고 황자님과 공주님이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셨사옵니다.”
왕곤과 왕혜가 왔다는 의미였다.
원래대로면 왕곤은 친왕의 자리를 받았어야 했으나 황자라 불리고 있었다.
지금의 고려는 중국에서 전해진 황실 예법 대부분을 뜯어고치고 있는 중이다.
고려가 중원에 있는 나라도 아니고 그들이 만든 법도를 따를 이유는 없다.
“들라 하여라.”
내 허락이 떨어지자,
잠시 후에 아이들이 들어왔다.
콩나물 자라듯이 쑥쑥 크는 두 아이는 어느덧 나의 키와 엇비슷한 정도였다.
벌써 2차 성징이 지나간 열다섯이라 왕곤의 목소리는 제법 걸걸해졌고 왕혜도 어느덧 어여쁜 아가씨가 되어갔다.
누구 딸인지 몰라도 참 예뻤다.
왕곤보다 5분 먼저 태어난 왕혜는 똑 부러지는 성격이라 가진의 어린 시절을 보는 기분이 종종 들 정도로 쏙 빼닮았다.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이었으나 훗날 태어났으면 얼짱이라 불렸을 것 같았다.
반면에 왕곤은 문약해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몸이 약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갑자기 키가 커서 생긴 일이었다.
두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붙어 다녔는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백성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었다.
“지난밤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셨사옵니까?”
만춘전 안으로 들어온 왕곤과 왕혜는 내 앞에 엎드려서 문안 인사를 올렸다.
하지만 이게 매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보통은 황태자인 왕현만 오는 편이고 왕곤과 왕혜는 사나흘의 한 번쯤 온다.
원래는 공주가 문안 인사를 오는 법도는 없으나 딸은 자식도 아니냐고 난리를 부려서 왕곤과 함께 오기 시작한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면 공주가 올 때마다 뭔가 목적이 있는 경우가 많아 내심 긴장됐다.
‘왜 학당에는 남자만 들어갈 수 있나요?’
수년 전에 만춘전에 들어와서 천진난만한 얼굴로 왕혜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곧장 할 수 없었다.
고려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정작 배울 수 있는 기회와 도당에 들어와 뜻을 펼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었던 왕혜는 그날부터 집요하게 만춘전으로 찾아왔다.
“왜 여자는 배울 기회조차 없죠?”
“왜 여자는 관직에 오를 수 없나요?”
“왜 여자는···.”
결국, 나는 두 손을 들어야 했다.
왕혜 공주 덕분에 고려는 여자들도 배울 수 있는 학당이 시범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여러 개선안을 찾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학당까지는 어떻게 통과시켰으나 다른 대부분의 문제는 극심한 반발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내수사의 하급 관리에 여성을 앉히는 것이었다. 어차피 공방을 관리하는 이들은 여성인 경우가 많았다.
지금의 고려는 상업 활동 부분에서 여성의 참여도가 상당히 높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부 특수한 자리를 제외하면 아직 폭넓게 시행되지는 않고 있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모든 관리가 반발하고 있으니 속도를 조금 조절해야 했다.
시간이 흘러서 어느 정도 잠잠해지면 천천히 하나씩 범위를 늘릴 생각이었다.
“그래, 너희들은 좋은 밤이 되었느냐?”
“물론이옵니다.”
“지도를 보고 계셨던 것이옵니까?”
자리를 권하며 앉으려던 나는 왕혜의 질문의 발걸음을 멈췄다. 대신 아이들에게 지도 쪽으로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이제 고려에서 지도가 군사 기밀처럼 여겨지는 일은 없으나 이렇게 거대하고 세밀하게 그려진 지도는 보기 어려웠다.
“그간 도로가 상당히 많이 깔린 것 같사옵니다.”
왕곤이 가장 눈여겨본 것은 검은색의 실선과 점선이었다. 그것은 현재 공사 중인 도로 현황을 표시해 놓은 것이었다.
점선은 아직 공사 중인 곳이었고 실선은 공사를 마친 곳을 의미했다. 그 비중은 점선이 더 높았는데 6할쯤은 되었다.
쉽게 끝날 일은 아니었다.
5~6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했다.
확실히 7천 리는 엄청난 거리였다.
그나마 부여성에서 잡은 옷치긴의 포로가 모조리 공사에 투입되어서 이 정도였다.
그와 함께 기존에 설치해놨던 도로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길을 따라 여러 공사 자재가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지난해 요동과 부여는 연결되었고 지도를 보니 조만간에 회령도 부여와 연결될 것 같사옵니다.”
“우선순위에 두고 있으니 그래야지.”
요동과 부여 그리고 회령.
이렇게 세 곳은 서둘러야 했다.
도로가 깔려 있어야 병력과 물자의 이동이 더 빨라질 테니 방어 측면에서 꼭 필요한 도로였다. 나는 쌍둥이들과 지도를 보며 여러 이야기를 해줬는데 어느 순간에 아이들이 눈치를 보는 것이 보였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이냐?”
확실히 뭔가 목적이 있었다.
왕혜는 내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재차 묻자 그제야 왕곤은 자신의 누이를 대신해서 오늘 온 목적을 털어놓았다.
“저희도 과거에 황태자 형님이 다녀오신 것처럼 바깥세상을 보고 싶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이냐?”
“그게···.”
왕곤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황태자의 견문을 넓히는 일은 황위에 오르기 전에 백성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론과 현실의 차이가 어떤지 알아야 백성의 생명을 가지고 숫자 놀음을 하지 않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자의 경우에는 달랐다.
제왕 수업의 일환으로 편성된 탓에 자칫 잘못하면 황위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이라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왕혜가 말을 거들었다.
“훗날 오라비께서 폐하의 뒤를 이어 즉위를 하면 곁에서 돕기 위함이옵니다.”
“아직 팔팔한 제 아비를 삼도천에 빠지라고 등을 떠미는 것이더냐?”
“아니! 그런 게 아니고요.”
답답했는지 왕혜는 펄쩍 뛰었다.
아직 왈가닥 기질이 남아 있는 것이 가진의 옛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아내며 공주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그러면 왜 황궁을 나가려는 것이냐?”
“답답해 죽을 것 같아서 그렇죠. 마마께서도 궐밖에 공방을 자주 드나들고 황태자 오라비도 미복잠행을 나서는데 왜 저희만 새장 속의 새처럼 여기는 건데요?”
“밖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냐?”
“그러하옵니다.”
이번에는 왕곤이 대답했다.
왕곤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왕현이 거지꼴을 하고 시전을 방황하고 있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나마 왕곤은 매사에 진중하고 배려심이 깊은 아이라 믿음이 갔지만, 문제는 제 오라비보다 더한 성격을 가진 공주였다.
아마 그때 못지않게 감찰사와 현지의 관리를 들들 볶을 것이 뻔했다.
좋게 말하면 정의심이 강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 꽤 넓었다.
그래도 보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고려의 실태를 직접 보고 온 황태자는 완전히 철이 들었고 최근에는 나의 업무 중의 일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나이가 사십 대 중반에 접어들고 있는 터라 체력이 부족했는데 황태자의 그런 행보는 꽤 도움이 됐다.
“황후와 함께 진지하게 논의를 해보마. 혼자 정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구나.”
나는 당장 결정을 내리지는 않았다.
이 문제는 가진의 의견이 우선이었다.
여기서 승낙을 해봤자 결국에는 가진이 최종 결정을 하게 될 것이다.
워낙 일에 파묻혀서 살아온 터라 아이들 문제에 있어서는 그녀가 갑이었다.
아이들도 어차피 최종 결정자가 누군지 알고 있기에 그 이상으로 조르거나 떼를 쓰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편에 서주길 바라고 있는 게 전부였다.
더구나 신소봉이 때마침 우의정 최영이 왔다는 소식을 알려왔기에 쌍둥이들은 순순히 만춘전을 나서며 자리를 피했다.
그런 이후에 들어온 최영은 곧장 내게 보고서를 내밀었다.
지금껏 2군을 전체를 지휘하던 최영은 어느덧 그 나이가 환갑을 넘겼기에 도당에 들어와서 우의정 자리에 앉았다.
마지막 몇 년 정도는 편하게 일하라는 의미였고 무관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자리이기에 배려해준 것이다.
“이번에 치러진 무관 시험에서 급제한 이들이옵니다.”
고려는 인력난이 극심했다.
영토가 넓어지고 인구가 늘어나는 중이라 그만큼 도당을 비롯해 각지에 보내야 하는 관리와 무관의 수가 무척 많아졌다.
하지만 아무나 그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
전쟁 중이나 즉위 초기에는 병사들 중에서 무관 자리까지 오르는 일이 있으나 최근에는 그런 기회가 거의 없었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면 적어도 무관 시험을 거쳐서 자격을 얻어야만 했다.
정8품의 자격을 가지고 있는 중사도 시험을 봐야 했지만, 자격에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반면에 5품의 중랑장과 6품의 낭장은 성균관에서 1년 과정의 군사학을 수료해야 시험을 볼 수 있었다.
그 시험의 인기는 상당했다.
거기서 좋은 성적을 거둔 이들은 홀치와 응양군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초고속 승진을 위한 일종의 관례였다.
그래서인지 승진이 예정된 무관들도 그 기회를 잡기 위해 시험을 보기도 했다.
“가져와 보시오.”
솔직히 별다른 기대감은 없었다.
이미 예상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올해의 수석은 이성계의 차남인 이방과의 몫이었다.
이방과는 어릴 때부터 꽤 유명했다.
성균관에서 군사학을 수학할 때부터 상당히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발해의 병마사로 머물며 최북단의 국경선을 당당하고 있는 이성계를 가장 많이 빼닮은 이가 바로 이방과였다.
하지만 예상외의 이름이 보였다.
가장 윗줄에 적혀 있는 수석 합격자는 이방과가 아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의 이름이 그곳에 적혀 있었다.
그것도 나와 악연이 있는 이였다.
‘하필 홍륜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