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81
요왕의 처리는 간단했다.
내게 보고할 필요도 없었다.
최영이 출정을 떠나기 전에 평양에 왔을 당시에 내가 내린 칙서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회령에서 요왕을 잡으면 나는 그를 곧장 효수하라고 지시했다.
멸망한 왕국의 왕이 어떻게 될까.
살려두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화근이 될 싹은 당연히 미리 잘라야 했다.
더구나 그는 먼저 병사를 일으켜 가만히 있는 고려를 공격한 죄가 있다.
그런 의미로 옷치긴 왕가는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사형대에 올라야만 했다.
하지만 그 숫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옷치긴에서 생긴 왕자의 난 때문이다.
고려가 회령을 차지하기 전에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서 요왕 오르케는 이미 자신의 손으로 많은 왕족을 죽였다.
덕분에 고려에서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일은 상당히 간소화됐다. 오히려 문제는 권력을 쥐고 있는 지방의 부족장들이었다.
이번에 회령에 있었던 유력한 부족의 부족장은 모두 처형했으나 아직 수많은 부족이 여기저기 나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싹 쓸어버리고 싶으나 백성 전체와 싸우는 일은 미련한 짓이다.
어떻게든 민심을 잡아야 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옵니까?”
영의정 유숙과 좌의정 이달충.
우의정 변안열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고려의 최고위층인 삼정승과 이번 출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했다.
영토를 확장하는 것보다 그걸 관리하고 현지인이 고려의 지배를 받아들일 때까지 걸리는 과정이 훨씬 더 어렵다.
단시간에 끝낼 일은 아니었다.
일단 행정 구역부터 정리해야 했다.
기존에 옷치긴 왕국이 있던 자리는 만주로 이름을 바꾸고 고려의 열두 번째 도로 지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면적이 너무 크다는 것에 있었다.
“옷치긴의 영토는 너무 커서 하나의 도(道)로 지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사옵니다. 세 곳 이상으로 나눠야 마땅하옵니다.”
“좌의정의 말이 맞사옵니다. 기존에 옷치긴의 영토 외에도 여진족이 밀려나며 추가로 확보된 지역이 적지 않습니다.”
옷치긴이 차지하고 있던 만주.
그곳의 넓이를 다른 도와 비교하면 최소 다섯 배에서 열 배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팔도로 구성된 한반도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크니 확실히 문제가 되었다.
당연히 좌의정 이달충이 내놓은 의견에 다른 두 정승도 적극적으로 동의했다.
회령에 안렴사로 한방신과 병마사 서달을 보낼 예정이나 워낙 넓어서 그들만으로는 고려의 영향력이 닿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영의정 유숙이 말한 대로 이번에 고려가 확보한 땅은 옷치긴의 영토 외에도 여진족이 머물던 지역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고려가 옷치긴과의 전쟁을 꺼리는 것을 이용해서 국경을 오가며 버텼으나 믿고 있던 옷치긴이 사라져버렸다.
단숨에 고려는 송화강을 넘어 우수리강과 흑룡강 인근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대규모 병력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아직 남아 있는 여진족이 이제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더 북부로 올라가서 굶어 죽거나 고려에 내투하는 것이 전부였다.
“짐도 삼정승의 의견에 동의하오. 하지만 이걸 어떻게 나눠야 좋겠소?”
나는 지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은 천문과 지리 등을 맡고 있는 서운관(書雲觀)에서 분리되어 지도 제작을 전담하는 지리관에서 만든 것이었다.
당연히 지리관은 여주부터 고려 전역의 지도 제작을 담당했던 진영서가 맡았다.
하지만 직접 그가 가서 지도를 만들 수 있던 상황은 아니기에 완성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소신의 의견을 내놓자면 서와 동 그리고 북으로 나누었으면 하옵니다.”
유숙은 지도에 손을 올렸다.
그는 회령성이 있는 곳은 회령도로 이름을 가져가고 동쪽에 있는 우수리강 유역은 가목도(佳木道) 그리고 흑룡강 일대는 발해가 어떠냐며 제안했다.
드넓은 땅을 셋으로 나눠도 상당히 큰 편이었나 지금은 그게 최선이었다.
고려의 행정 구역이 열네 개의 도로 확장된 것인데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한반도의 구역도 손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스케일이 커지다 보니 지도로 보면 행정 구역이 콩알만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한방신과 서달을 보낸 회령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가목도와 발해는 누굴 보내야 좋을 것 같소?”
“탐라에 있는 정몽주와 대마도의 이성계를 이제 슬슬 불러 들여야 할 시기인 것 같사옵니다.”
“소신도 영의정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원계가 북방에서 활약할 동안.
그의 동생인 이성계는 벌써 십 년 넘게 대마도에서 거의 유배나 다를 것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게 다들 은근히 마음에 걸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지난해 다섯째 아들이 태어났다는데 그 이름이 이방원이란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를 대마도에서 불러들이기로 했다.
더는 남은 핑계도 없기 때문이다.
이미 이원계가 이성계를 대신해서 북부에서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고 이지란 같은 이도 그와 연을 맺지 못했다.
여진족도 이미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가 북방으로 돌아가도 뭔가를 할 수 있을 가능성은 현저하게 떨어졌다.
대신 그 자리는 고려 후기에 수군에서 활약했던 정지와 정룡 등의 신진 무관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자 변안열은 뒤이어 군사 배치에 대한 나의 의견을 물어왔다.
“현재 회령에 모여 있는 병력은 새롭게 배치를 하여야 하옵니다.”
“기존에 논의한대로 1군은 요소와 요동 방어를 하고 2군은 여진 등의 세력을 견제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것이오?”
“최영 장군이 이끄는 2군의 편제를 조금 바꿀 필요가 있사옵니다.”
변안열은 영토의 크기를 강조했다.
그곳을 일반 병사들이 행군하며 방어하는 것은 효율이 너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여진의 세력도 예전만 못한 상태였다.
그러니 그는 양보다는 질이 좋아야 한다며 일반 병사는 요동으로 보내고 기마병을 주력으로 배치하기를 바랐다.
“현재 고려가 보유한 말은 대부분 서별초와 동별초에서 가져가서 지금 수준을 유지하는 중인데 가능하겠소?”
“이번 정벌을 통해서 옷치긴의 군마를 상당수 확보하였으니 적어도 만여 명의 기마병을 추가로 조직할 수 있사옵니다.”
그가 말하는 숫자는 확보한 말의 숫자와 동일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여분의 말을 끌고 다니는 전략을 포기한 것이다.
일단 그는 병력부터 확보한 뒤에 교배 중인 말들에게서 망아지를 얻으면 그때 추가로 배치하면 된다고 보았다.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병사들이 걸어서 다니면 싸우기도 전에 지칠 것이다.
아니 다리가 남아나질 않겠지.
제아무리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걸어도 도착하면 상황이 끝나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유지비가 무척 많이 들어갈 것이 분명하기에 좌의정 이달충의 표정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기마병을 확충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재정은 그가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삼정승끼리 말을 맞춘 것인지 딴지를 걸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이번에 요왕을 잡은 공을 세운 것이 과거에 개성에서 공을 세워서 면천이 되었던 자와 추노꾼이라 들었소.”
“그러하옵니다.”
“그것참 장한 일이 아니오.”
나는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염병이 퍼질 무렵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두 사람에 베풀었던 내 나름의 아량이 이렇게 되돌아올 줄은 몰랐다.
물론, 그들 외에도 공을 세운 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와 동시에 나는 변안열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훈련도감을 이끌며 만든 게 고슴도치 형태의 위진(蝟陣)이다.
그가 훈련도감에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간 들인 노력이 보상받은 느낌이 들었다.
“우의정은 이번 정벌에서 장수들과 병사들이 세운 공적을 세세하게 파악하여 제출하시오.”
“이미 전공을 취합하고 검토 중이오니 이른 시일 내에 올리겠사옵니다.”
어차피 그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고려는 정벌을 떠날 때마다 모든 것을 기록하는 사관을 비롯해서 심지어 화공도 따라다니며 그림으로 기록할 정도였다.
이쯤 되면 너무 과하다고 여겨질지 몰라도 기록의 힘은 무시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동영상으로 찍어서 고려가 지금 벌이고 있는 태평성대를 영원히 보존하고 싶으나 그게 안 되니 답답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훗날 화폐에 내 얼굴이 그려지는 게 아닌가 하는 기분 좋은 상상도 종종 들 때가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라를 빛낸 100인이 아니라 순위권에도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렇게 시작된 회의는 끝이 없었다.
새롭게 확장된 영토에 대한 논의를 삼정승과 도당에서 나눴는데 체력이 약한 이들은 나가떨어져 졸도할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심도 있게 다룬 것이 바로 인구 문제였다. 넓은 땅을 실질적인 소유하기 위한 조건은 몇 가지가 있었다.
인구와 식량 그리고 물류.
이 문제만 해결되어도 충분했다.
세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식량이 있어야 인구가 늘어나고 물류를 통해 생필품과 식량을 옮겨야 한다.
적어도 사람답게 살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은 만들어놔야 이주 정책도 먹혔다.
‘그래도 상황이 아주 나쁘진 않아.’
옷치긴과 여진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태어난 아이들을 합치면 이미 고려는 1,700만 명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아직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나 6년 전인 임인년(1362년)에 천만 명을 돌파했던 것을 생각하면 가파르게 상승 중이다.
이대로 계속 유지할 경우.
삼천만 명의 인구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겨우 십여 년 정도라 추측되었다.
거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노비의 해방과 감자 등의 보급이었다.
일단 여러 경로를 통해 자유를 찾은 노비들은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은 아이들을 낳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마을은 노년층보다 아이들의 수가 열 배 이상 기록된 곳도 있을 정도였다.
아마 지금 당장 고려의 평균 연령을 산출하면 이십 대도 안 될 것 같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더는 저주받은 삶을 물려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있지만, 나라에서 임대한 땅을 소작하기 위해서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시대는 얼마나 많은 아이가 있냐에 따라서 노동력의 차이가 나타난다.
거기에 감자의 보급이 상당히 빨랐다.
이미 북부 지역에서는 쌀과 같은 기존의 곡식보다는 감자를 재배하는 농사꾼의 수가 훨씬 많아졌을 정도였다.
일단 노동력이 들어가는 것이 벼보다는 훨씬 적고 수확량도 생각 이상이었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품종 중에 고려의 흙에 적응한 것들이 나온 덕분이었다.
식생활도 당연히 바뀌었다.
감자떡부터 시작해서 감자를 이용한 여러 종류의 음식이 북부에서 유행했다.
반면에 남부에서는 고구마가 엄청나게 생산되었는데 오죽하면 쌀농사를 포기하는 이들의 수를 줄여야 한다는 상소문이 줄지어서 올라올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우려에 불과했다.
고려인의 밥심이 어디 가겠는가.
결국에는 쌀농사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실제로 고려인들은 유럽 사람들처럼 감자와 고구마를 주식으로 여기는 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난하진 않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도로의 설치였다.
고려는 각 지역의 대도시를 잇는 도로를 설치하려고 했다. 이번에 얻은 회령과 부여성과 요양성 그리고 평양과 부동항 등의 북부를 연결하는 것이 목표였다.
문제는 이어야 하는 거리였다.
고려에서 지금껏 만든 도로보다 훨씬 더 긴 거리였다. 진영서의 계산으로 나온 수치만 보면 7천 5백 리(3,000km)에 달하는 대공사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예측이었다.
실제로 도로를 놓다 보면 산지를 피해 꽤 먼 거리를 돌아가는 일도 허다했다.
수레가 올라가지 못하는 경사는 도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북부의 삼강 평원 등은 이제 고려의 곡창 역할을 하기에 다른 지역으로 식량을 이동하는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했다.
한반도 지역처럼 수로와 해안선을 따라 조운선을 띄울 수도 없는 곳이었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내가 즉위하고 있는 중에는 반드시 마무리해야 할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사였다.
당분간 고려에서 얻는 재물 중에 상당수가 그곳에 투입되어야 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은 산더미 같았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무수하게 많은 일을 처리해야 했다.
그걸 하나씩 처리하다 보니 순식간에 5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1373년(계축년)의 해가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