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80
쌍성 평원에서 펼쳐진 회전(會戰).
그 전투의 결과는 고려의 승리였고 역사에 중요하게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군사 전술에서 큰 변화가 일어난 전투였기 때문이었다.
실전에 처음 사용된 위진(蝟陣)은 향후 여러 변형된 진형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그 전술의 핵심은 장창이 아니다.
뒤에서 열을 맞춰서 복합적으로 섞인 원거리 투사 무기가 효과적으로 적의 진군을 저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장전 시간이 비교적 느리나 파괴력과 사거리가 긴 화승총과 쇠뇌의 단점을 활을 통해 보완하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전면에 서진 않는다.
이번에는 거기까지 보여줄 수 없었으나 장창병이 무너졌다면 뒤에 대기 중이던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서 막았을 것이다.
어쨌든 부여성에 이어 쌍성 평원에서 패배당한 옷치긴은 상당히 타격이 컸다.
부여성에서 잃은 병사보다는 적지만, 그보다는 심리적인 타격이 심각했다.
옷치긴이 자랑하던 기마 전술이 공성전도 아니고 평원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는데 박살 났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 영향은 곧장 나타났다.
가뜩이나 사기가 꺾인 상태에서 부여성에 이어 쌍성 평원에서도 옷치긴의 병사들이 패배하자 요왕이 있는 회령성까지 밀렸다.
역습을 가할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남은 병력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그나마 카치진이 늦지 않게 병력을 물렸으나 고려군이 그냥 놔줄 리 없었다.
이제 더는 성밖에서 고려를 막는 것은 불가능해졌고 남은 방법이라고는 성벽에 의지하며 수성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게 다 그대들 때문에 생긴 일이오!”
요왕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부족장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죽으나 성이 무너져서 고려군에게 끌려나가 목이 베이나 죽는 것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려고 손에 피를 묻혀가면 동생들을 죽이고 이 자리에 오른 게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꼬인 것일까.
처음부터 고려를 탐내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적어도 아리크타이 장군에게 제때 원군만 보냈어도 이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현재 회령성을 지키고 있는 6만 명의 병사 중에 절반 이상이 징집병이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장수들은 수성전을 치러본 경험조차 없으니 그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일단은 패전을 하고 뻔뻔하게 돌아온 카치진 장군부터 처형하시옵소서.”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오. 장군마저 없으면 이곳은 누가 지킨단 말이오.”
“심려치 마시옵소서. 회령성은 쉽게 함락되진 않을 것이옵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장들은 위기감을 못 느끼는 것인지 여전히 정치질을 했다.
어쩌면 이미 그들은 항복할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고려군이 지금까지 점령 지역에서 학살을 한 적은 없다.
아마 왕족만 처단하고 부족들은 그대로 받아줄 가능성이 컸다.
‘호락호락 당해줄 수는 없지.’
회령성의 백성 전부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옷치긴 왕가의 시작이자 영웅으로 추앙받는 테무게 옷치긴의 유산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의지는 곧장 회령성 전체에 전달되었다.
“수성 준비를 하거라. 절대 이곳을 고려 놈들에게 내줘서는 안 된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모두 나와서 수성에 손을 보태거라. 누가 진정 초원의 지배자인지 저놈들에게 알려주어라.”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 위기만 넘기면 된다.”
백성들은 마지못해 거의 반쯤 강제로 성벽에 올라 물자를 나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뭔가를 준비하기도 전에 최영이 이끄는 고려의 병사들은 회령성 앞에 도착해서 공성전을 준비했다.
지금껏 개발해 놓고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던 공성 병기도 나타났다.
그걸 개발하는 모든 과정을 맡았던 하윤린이 봤으면 기뻐했을 모습이었다.
그러나 화포의 위력보다 더 강할 것이라 기대하는 이는 없었다.
“거기 화포 간의 거리 조금 더 벌려!”
당연히 그 과정은 모두 최무선이 맡았다.
그는 자신의 휘하에서 십여 년 이상이나 화포와 화약을 다루며 숙련된 능력을 보여준 화통방사군을 배치하느라 바빴다.
이미 그들은 여러 차례 화포만으로 수성하는 적의 성벽과 성문을 박살 낸 경험이 있다.
당연히 이제는 거리를 계산하고 각도를 조절하는 것쯤은 눈감고도 했다.
재수 없게 초탄이 빗나가도 탄착점만 확인하면 곧장 영점을 잡을 정도였다.
병사들의 표정은 생각보다 밝았다.
화포를 쏘는 것은 여전히 목숨을 거는 일이었으나 이 순간을 위해 무거운 화포를 이곳까지 지고 오느라 개고생을 했다.
이제 그 결실을 볼 시간이 다가왔다.
그들은 화포로 무너뜨리지 못할 성문은 없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화포의 화력을 버텨낸 성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이틀 정도 준비 기간을 거친 뒤.
최무선을 비롯한 장수들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보고를 최영에게 하였다.
이곳까지 행군을 해온 병사들도 교대로 휴식을 가졌기에 다들 쌩쌩한 느낌이었다.
“동문은 서달 장군이 맡고, 서문은 조인벽 장군과 이원계 장군 그리고 북문은 요동의 병사를 이끌고 온 김귀 장군이 맡으시오.”
나머지 남문은 최영의 몫이었다.
사령관이라고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대부분 평소 그의 성향을 알기에 토를 달진 않았다.
호명되지 않은 이지란과 같은 장수들은 병력의 균형에 맞춰서 배분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공성이 시작되었다.
성문 앞에 나열된 화포가 동시에 방포되는 것이 신호였다. 하지만 무턱대고 달려드는 무책임한 장군은 전혀 없었다.
화포가 버텨줄 수 있을 때까지 최대한 쏘고 가야 병사의 손실이 줄어든다.
“뭣들 하는 것이냐 화살을 쏴서 저것들을 저지하거라!”
“하지만 화살이 닿지 않습니다.”
“이런 제길···.”
같은 성능의 활을 가지고 있더라도,
성 위에 있는 이들의 화살이 멀리 간다.
고저 차가 가져다주는 이점인데 화포는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을 정도로 먼 곳에서 심지어 정확하게 타격하고 있었다.
몇 발 쏘지도 않았는데 이미 그들의 포환은 성벽과 성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거기에 공성 병기에서 날리는 바위도 상당히 위협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회령성을 지키는 병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머리를 숙이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지 말라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기도는 통하지 않았다.
몇몇 포환은 성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성안으로 떨어저서 병사들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그중의 일부는 바닥에 떨어진 뒤에 폭발까지 일으켰다.
조선 시대에 나왔어야 할 비격진천뢰의 응용 버젼이었다. 그게 수성 중인 병사들에게 준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
스무 발의 한두 번은 섞여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터지는 터라 옮기는 것도 쉽게 생각할 수 없었다.
“에잇! 이거는 안 터지잖아. 괜히 쫄았네.”
그래도 다른 포환과 구분하기는 쉬웠다.
완벽한 구형이 아니라 외형이 다르기에 옷치긴의 병사들도 천천히 적응했다.
심지어 불발도 종종 나왔는데 오히려 그게 상당히 혼란을 주기도 했다.
불발인 줄 알고 옮기다가 터져서 신체가 산산조각이 난 병사도 생길 정도였다.
비격진천뢰 내부에 감긴 도화선의 길이를 일부러 제각각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근접해서 터진 비격진천뢰가 만들어낸 참혹함은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이들이었다. 피와 살점이 튀는 전장을 경험한 병사들마저 구토할 정도인데 일반 백성은 못 견뎌 했다.
일부 마음 여린 이들은 그 자리에서 혼절할 정도였다.
“도대체 고려군은 화약이 얼마나 남아돌면 저렇게 쏜단 말이냐.”
요왕 오르케는 끊임없이 들리는 화포의 굉음에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그들에게도 화포가 있기는 하나 쓸모가 전혀 없었다. 대주국에서 비싼 값으로 사 왔으나 품질이 너무 떨어졌다.
성벽 위에서 쏴도 고려군에게 닿지 않을 정도였기에 사기를 당한 기분마저 들었다.
고려군이 지금껏 쌓은 명성은 익히 들은 바가 있으나 직접 당하니 이건 도대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게 반나절 가까이 지나자,
마침내 회령성이 박살 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튼튼한 성문이라도 철환을 두들겨 맞고 멀쩡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반쯤 부서진 성문 앞에는 철환이 여기저기 굴러다녀서 오히려 발길을 막을 정도였다.
성벽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간신히 버티던 성벽도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병사들이 기어서 올라갈 수 있을 정도까지 허물어진 곳도 나왔다.
회령성이 지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생긴 일이었다.
지금껏 감히 이곳까지 쳐들어오는 이들이 없으니 보강 공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회령성이 전쟁을 치른 것도 거의 백 년 전이다. 당시에 제4대 왕인 나얀은 원 세조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토벌당했다.
그 이후로는 제대로 된 전쟁조차 없던 곳이 옷치긴이었다.
“전구우운, 돌격하라!”
최영이 마침내 신호를 보내자,
동시에 고려군이 회령성으로 달려들었다.
옷치긴의 장수들은 병사들을 독려하며 어떻게든 막으려 했지만, 제구실을 못 하고 있던 성벽과 성문은 버티지 못했다.
이내 고려군은 곧장 회령성 내부로 쏟아져 들어갔다.
“모두 무기를 버려라, 저항하는 자는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포로는 후속 부대에게 맡기고 전위는 곧장 요왕부터 확보하거라. 절대 회령성을 벗어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오르케의 목은 우리의 몫이다. 가자!”
성안에서 양군의 병사가 뒤엉켰지만, 저마다 맡은 역할은 제대로 해냈다.
그중에서도 서달과 이지란은 요왕의 목을 따기 위해서 가로막는 이들을 모두 칼로 베어가며 왕궁 방향으로 전진했다.
당연히 근접할수록 저항이 심해졌으나 그들을 막을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왕궁에서는 오르케를 찾을 수 없었다. 이미 어딘가로 내뺀 것으로 보였는데 서달과 이지란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회령성의 외부는 완전히 포위되어 있기에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차피 멀리 못 갔을 것이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자네는 궁궐 뒤편에서 북문으로 빠져나가는 길을 확인해보게.”
서달과 이지란은 흩어져서 요왕을 찾기 시작했는데 정작 그를 찾아낸 것은 인근에 있던 정찰대 소속의 달영과 말석이었다.
이번 공성전에서 원래 정찰대는 빠져도 되었으나 자원하는 이에 한해서 이원계가 배치된 서문 공략에 참가했다.
그들이 자원한 이유는 뻔했다.
이번 기회에 공을 세우기 위함이다.
운 좋게도 달영이 이끄는 마흔 명 남짓한 정찰대는 궁궐을 은밀하게 빠져나가려고 시도 중이던 몇 명의 궁인을 잡았다.
처음에는 지나치려고 했으나 심상치 않은 이가 그의 눈썰미에 잡혔기 때문이다.
추노꾼으로 살았던 세월 동안 쌓은 경험과 촉이 여기서 발휘된 것이었다.
달영은 평생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자란 얼굴과 피부를 가진 이들과 호위로 보이는 남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보통 이들이라면 이렇게 무사가 뒤따르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정찰대는 그들과의 싸움을 감수하며 사로잡았다.
호위하던 무사들의 무예는 범상치 않았으나 정찰대 역시 특수 부대 중의 하나였기에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거기에 정찰대의 숫자가 훨씬 많았기에 문제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최영은 회령성의 궁궐로 들어섰다.
승전을 올린 사령관답지 않게 피투성이가 된 그는 바닥에 무릎이 꿇려진 요왕으로 추정되는 이를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없었다.
왕을 상징하는 무엇도 지니고 있지 않았는데 요왕이라는 것을 확인할 방법이 없지는 없었다. 이번 원정에는 감찰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이면 가능했다.
한방신은 과거 이곳에서 궁인으로 잠입해 있다가 도망쳐 나온 감찰사의 관리를 데리고 와서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곱상하게 생긴 그 관리는 신중하게 사로잡힌 이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신중해야 하네. 확실히 요왕이 맞나?”
“확실합니다. 저쪽의 두 여인이 왕비와 후궁이고 이 남자가 요왕 오르케입니다.”
“오호라! 잘하였다.”
최영은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평소에 무표정한 얼굴로 습관적으로 감정을 감추던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충분히 그럴 만 했다.
요왕이 사로잡혔다는 것은 더는 희생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 소식은 곧장 회령성 전체에 퍼져나갔고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이들도 그제야 칼을 내려놓고 항복했다.
성밖에서는 말을 타고 필사적으로 도주하려고 하던 부족장들이 있었으나 하나둘씩 소탕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회령성에 깃발이 하나둘 올라갔다.
최영 등의 부대기뿐만 아니라 어느덧 고려를 상징하게 된 태극 문양이 그려진 거대한 깃발도 보였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무척 컸다.
이제 고려는 아래로는 대마도부터 삼강평원의 끝까지 차지한 것이었다.
그건 고려가 동북아 지역의 패권을 완전하게 차지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영토의 크기만 봐서는 중원 지역에 있는 어느 곳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껏 여러 방어전과 토벌을 해왔으나 하나의 나라를 통째로 무너뜨린 일은 이번 옷치긴 원정이 처음이었다.
한동안 깃발이 걸리는 것을 지켜보던 달영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쳤다.
“대고려 만세!”
머리로 생각하고 나온 행동은 아니다.
가슴 속에서 들끓는 이 감정을 토해내지 않으면 불타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옆에서 귀청이 찢어질 것처럼 외쳤음에도 말석을 비롯한 정찰대의 병사들도 입을 모아서 같이 외쳤다.
그건 다른 병사도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장면을 위해 십수 년 동안이나 전장을 전전하며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칼에 수많은 피를 묻혔던 것이 아닐까.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으나 병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두 손을 번쩍 들어 만세를 외치며 승리를 자축했다.
당연히 그 환호성에는 감회어린 눈빛으로 서 있던 최영을 비롯한 모든 고려의 장수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고려 만세! 황제 폐하 만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