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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79화 (17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9

원나라로 도망친 아리크타이.

그를 놓고 많은 논의가 벌어졌다.

지금이라도 추격대를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그가 고려에게 위협이 된다기보다 기마병이 문제였다.

나중에 후환이 될 수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숫자였고,

원나라에 힘을 보태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리크타이의 뒤를 쫓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쫓기 위해 머뭇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그를 뒤쫓을 경우.

기마병만 따로 보내기는 어려웠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당하게 될 것이다.

적어도 일반 병사도 같이 보내야 할 텐데 그만큼 적지 않은 시간이 뺏길 것이다.

최영은 옷치긴 정벌이라는 원정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었다.

만약에 그들이 요양성 등의 후방으로 방향을 바꾸어도 적지 않은 병력이 남아 있기에 위험 요소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여파가 작은 편이 아니었다.

옷치긴의 수호신이라 불리며 추앙받던 아리크타이가 도망친 것은 상당히 큰 충격을 주었다.

비록 지난해 가을 대패를 당했지만, 지금까지 쌓아온 신망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싸우지도 않고 도망친 것이다.

다른 성에 있던 장수들은 그 영향을 받은 것인지 감히 고려군의 앞길을 막을 생각도 못 하고 도망가는 일이 잦았다.

“이곳도 성문을 열어 놓고 도망갔네요.”

말석은 혀를 차며 성안으로 들어섰다.

정찰대가 도달하는 곳마다 다들 이랬다.

고려의 병사들이 오기 전에 도망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고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어야만 했다.

“그만큼 회령에 더 많은 병력이 몰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

달영은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차라리 중간에 병사들을 차례대로 정리하며 북진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이대로 회령에 도달하면 생각보다 더 많은 병력이 모여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대규모 징집 징후가 보였다.

지금껏 지나온 마을과 성에서 성인 남성은 거의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옷치긴의 인구가 고려에 비해서 적다고 말할 수는 없기에 수도 부근에 얼마나 모여 있을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그 덕분에 고려군은 회령까지 믿기지 않는 속도로 진군할 수 있었다.

화포와 여러 전쟁 물자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의 속도는 나오지 않았으나 어차피 장춘에서 회령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800리(310km) 남짓에 불과했다.

기마병 위주인 부대는 빠르면 사나흘 만에 도착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하지만 회령을 200리 앞둔 지역부터 더는 쉽게 볼 수 없게 되었다.

“와··· 저게 도대체 몇 명입니까?”

말석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가 내려다보고 있는 평원에는 옷치긴의 병사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산 너머에서 들리는 소음을 확인하고자 말을 매어두고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다들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여기에 모여서 기다리고 있었군.”

“어서 가서 알려야 합니다.”

“잠시 기다려봐. 일단 어느 정도 규모인지 확인부터 해야지.”

달영은 자리를 뜨려는 말석을 잡았다.

매복을 하고 있는 병력은 아니라 급할 것은 없었다. 지형과 저들의 위치를 보면 평원에서 고려군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선택이었다.

비록 기마병의 대부분을 잃었지만,

여전히 옷치긴의 장점은 기마병이었다.

정규군이 비록 야반도주를 했어도 각 부족에서 차출한 병력은 일반 보병보다는 기마병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실제로 옷치긴의 병력이 가득한 평원에 사람 못지않게 많은 숫자의 말이 있었다.

대충 헤아려봐도 2~3만 마리 이상은 될 것 같아 보였다. 그 정도면 고려군도 쉽게 볼 수 없는 수준이 아니라 위험할 정도다.

“저 정도면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아니, 저 정도로 우리 고려군이 질 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합니까?”

“지금까지 본 게 있으니 그렇지.”

달영의 표정은 생각보다 여유로웠다.

말석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여기서 그런 논쟁을 벌이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언제 옷치긴에서 보낸 병사가 이곳을 지나갈지 알 수 없다.

이 자리에 오기 전에 그들의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은 옷치긴의 병사가 적지 않았다.

“조만간 저들도 눈치챌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서두르지요.”

“자네가 말만 안 걸었어도 이미 다 헤아렸을 것이네. 그러니 그 입 좀 다물고 다가오는 이가 없는지나 살피게.”

“죄송합니다.”

“가만 보자···. 대충 8만 명쯤 되려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있는 언덕은 산이라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작은 동산 수준이었다.

저 멀리 깊숙한 곳까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단은 보이는 곳까지 헤아렸는데 대충 8만 명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병사들의 상태가 좋진 않았다.

군기가 잔뜩 들어간 고려군과 달리 옷치긴 병사들은 징집병티가 물씬 났다.

대부분은 들고 있는 무기도 정상적이지 않았고 갑주를 제대로 입은 이들은 고작 네 명 중의 한 명 정도였다.

달영은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어쩌면 저게 옷치긴의 마지막 남은 병력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작년 가을에 부여성에서 수많은 병력을 잃은 것이 확실하게 타격이었던 것 같다.

거기까지 확인한 그는 허리를 숙인 채로 일어나서 주위를 살피고 있던 말석의 등을 살짝 두드린 뒤에 손짓을 했다.

“그만 돌아가자.”

*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

고려군은 평원 지대에 들어섰다.

넓은 들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본 고려와 옷치긴의 병사들의 수는 엇비슷했다.

하지만 체력적인 면을 고려하면 고려군이 조금은 열세를 보였다. 부여와 요동에서 출발해서 이곳까지 걸어서 온 이들이다.

당연히 피로감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옷치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다소 높은 지대에 있었는데 그 이점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경사가 그리 심한 것은 아니나 고려군이 조금 더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들이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데 어찌합니까?”

장수 하나가 카치진에게 물었다.

카치진은 이번 방어전을 맡은 장수다.

그는 설마 자신에게 이 일을 맡길 거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더 적합한 이가 수없이 많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분에 있었다.

요왕과 부족장은 여전히 힘겨루기를 하고 있기에 수많은 장수가 물망에 올랐으나 상대방의 방해로 무산되는 게 반복됐다.

그러던 중에 카치진이 추천되었다.

옷치긴의 어떤 세력과도 연관이 없는 원나라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 같기에 사절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 자리를 받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쩔 수 없이 1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통솔하게 된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이곳 평원 지대에서 싸울 준비를 한 것이다.

그러나 양쪽 모두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이틀이나 대치를 하고 있던 중에 먼저 움직인 것은 옷치긴이다.

회령에서 온 전령이 왜 전투를 회피하고 있냐며 따졌는데 도통 말이 안 통했다.

어쩔 수 없이 카치진이 진군을 명령하자 옷치긴의 병사들이 진군을 시작했다.

“제자리를 지켜라!”

“절대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고려의 병사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발목을 땅에 묻어 놓은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고 옷치긴의 병사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에 서로의 병사가 맞부딪히자 생각보다 빨리 우열이 드러났다.

고려군의 전열은 무너지지 않았다.

처음 들이닥친 옷치긴의 병사들을 막아내며 몇 걸음 밀려났으나 그런 뒤에 오히려 그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지난해 부하를 다수 잃은 서달과 이지란이었다.

그들은 고려 최고의 돌격대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맹렬하게 돌진했다.

가장 치열하게 전투가 펼쳐지는 중앙을 아예 돌파해서 옷치긴의 사령관인 카치진의 목을 따러 갈 기세였다.

“이대로면 중앙이 무너질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기마병을 보내 측면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카치진의 부관은 전황을 살피다가 위험해 보였는지 옆에서 슬쩍 조언을 해줬다.

하지만 그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었다.

고려군은 숲을 등지고 있었기에 기마병이 운신할 공간적인 여유가 많지 않았다.

기마병에게 가장 최악의 경우는 돌파 중간에 멈춰서는 일이다. 그때부터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창칼에 위협당한다.

하지만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신호를 보내시오.”

그가 기마병의 진군을 지시하자,

뿔 고동 소리와 함께 양옆에서 대기 중이던 만오천여 명의 기마병이 곧장 고려 진영의 약점으로 보이는 측면을 향했다.

그들은 숲과 고려군의 경계선을 따라 한 차례 헤집고 빠져나오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계획대로 진행되진 않았다.

기마병이 다가오자 고려군은 오히려 뒤로 물러났다. 전투 중에 그런 행동을 할 거라 예상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군은 쉰 발자국 가까이 물러나서 진형을 꾸리는 데 성공했다.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진형이 어그러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군은 얼마나 많은 훈련을 했는지 물 흐르듯이 병력이 이동했고 그 뒤에서 나타난 것은 기다란 장창이었다.

사람의 키보다 두 배쯤 긴 창은 곧장 달려드는 기마병을 향해 내밀어졌다.

“빌어먹을···.”

그제야 카치진은 고려군이 왜 그토록 그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기마병을 어떻게 상대할 지 미리 준비하고 들어온 느낌이 물씬 풍겼다.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움직인 탓에 기마병이 운신할 공간은 더 줄어들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고슴도치 같았다.

실제로 고려군은 그걸 고슴도치 위(蝟)자를 써서 위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고려에서 기마병을 상대하기 위한 위진을 만든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과거에 훈련도감을 세울 무렵.

기마병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방안을 찾으라는 폐하의 명을 받아 만든 것이다.

이 전술이 완성된 것은 수년 전이었고 그간 수없이 많은 훈련을 거친 상태다.

언제가 북벌을 하는 중에 사용할 거라 여겼는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는 무적을 자랑하는 옷치긴의 철기이니라!”

“저들에게 초원의 기상을 보여주거라.”

“형제들이여, 나를 따르라.”

옷치긴의 병사들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더 빠르게 고려군을 향했다.

여기서 어설프게 속도를 줄여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장창을 쥔 병사를 상대하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나올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오만이었다.

고려의 장창병과 비교하는 게 실수였다.

그들은 손으로 장창을 쥐고 버티고 있는 게 아니라 아예 땅에 박아두고 있었다.

받침대까지 놓여 있기에 병사들은 기마병이 부딪히며 장창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지키는 이가 있었다.

병사들의 손에는 수노기를 포함한 쇠뇌와 활 그리고 화승총이 하나씩 들려있었다.

그들은 세 개의 열로 서서 끊임없이 각자가 쥐고 있는 무기를 쏘고 있었다.

장전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화승총과 쇠뇌가 준비할 동안은 활을 쥔 이들이 그 간격을 메꿔주고 있는 방식이었다.

대부분은 그 집중 사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장창병에 도달하기도 전에 바닥을 뒹굴며 뒤따라오던 동료까지 쓰러뜨렸다.

가장 압권은 중심부였다.

그곳은 화승총만 3열이었다.

한 개의 열이 총을 쏘면 다음 열이 나와서 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발포 중이었다.

고저 차가 약간 있었기에 전면에서 칼을 맞대고 싸우는 이들이 아니라 뒤쪽에 있는 이들을 노리고 있었다.

이 무렵의 화승총은 더 길어졌다.

총신이 길어지는 만큼이나 사거리도 늘어났는데 원래의 역사에서 사용하던 조총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앞선 이들이 운이 좋게 피했다고 하더라도 뒤따르던 이가 누군가는 맞았다.

한 마디로 어지간한 조준만 하더라도 빗나가는 일이 거의 없다는 뜻이었다.

갑주를 입은 이들조차 어지간한 거리를 두지 않으면 그대로 뚫어낼 정도였다.

퍼어엉! 퍼엉!

거기에 화포도 존재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고려군의 화력에 옷치긴 병사들은 거의 녹아버렸다.

제아무리 뛰어난 기마병이라고 하더라도 다가올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서 화살을 쏘자니 사거리는 고려군이 훨씬 더 길었고 그 숫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마디로 답이 없었다.

무엇하나 옷치긴이 우세한 게 없었다.

믿고 있던 기마병마저 박살나니 당연히 병사들의 전의는 순식간에 바닥을 쳤다.

이제는 전진하기보다 뒷걸음질 치는 이들이 곳곳에서 속출하고 있었다.

아무리 뒤에서 칼을 휘두르며 전방으로 내몰아도 소용이 없었다.

공포라는 감정에 전염된 것이다.

역시 고려군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괜히 동북아에서 패배를 모르는 무적의 병사들이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직접 진실을 눈으로 본 옷치긴의 병사들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 순간에 카치진은 전투의 승패가 이미 정해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자신의 목이 떨어질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병사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퇴각! 즉시 회령으로 퇴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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