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8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트릴 무렵.
최영은 드디어 부여성의 성문을 열었다.
검은색의 윤기가 흐르는 흑마를 타고나서는 그의 뒤로는 무려 8만 명에 달하는 중무장한 고려군이 뒤따랐다.
그들의 발걸음은 우렁차고 절도 있었다.
병사들 모두가 고려군 특유의 고무를 덧댄 전투화를 신은 덕분이었다.
병사들의 좌우에서 늘어서서 배웅을 하는 백성들의 표정도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일부 가족들은 눈물을 흘리며 걱정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축제에 가까웠다.
선두에 선 최영을 믿기 때문이었다.
이미 그는 이방실과 함께 고려에서는 무신 반열에 오른 상태다. 지금껏 그가 이끈 전쟁에서 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아리크타이도 옷치긴에서 명장이라 불리는 이였고 막강한 기마병도 있었으나 최영의 상대는 아니었다.
더구나 그의 뒤를 따르는 장수들.
고려 최고의 무장이라 불리는 많은 이들이 최영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중에는 서별초와 동별초를 이끄는 이원계와 조인벽을 비롯해서 고려 최고의 돌격대를 이끄는 서달과 이지란 그리고 최무선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같이 쉽게 볼 만한 장수는 없었다.
지금 이 시대가 아니라면 다들 최영의 자리에 올라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수차례나 되는 대규모 전투를 통해 상당히 많은 경험을 쌓았다.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살던 요왕의 장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들이었다.
그만큼 고려가 이번 정벌에 온 힘을 쏟고 있다는 의미였고 옷치긴 왕국이 차지한 만주의 중요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곳만 가져오면 동북아 지역에서 고려를 감히 넘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만큼 전선의 배치도 수월해진다.
분열되어 있는 여진족 일부를 제외하면 요서 지역 서쪽으로 전선이 옮겨진다.
거기에 해군이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영향력을 투사하면 완벽에 가까워진다.
고려가 앞으로 해양 강국의 위상을 유지하기만 하더라도 적어도 백여 년 이상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럇! 작은 이상함이라도 느끼면 곧장 돌아와서 보고하거라.”
달영도 말에 올라타서 달렸다.
그의 뒤로는 말석을 비롯해 정찰대의 병사들이 줄지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본대보다 5리(里, 2km) 정도를 앞서서 이동하며 상황을 살폈다.
아직 국경을 넘으려면 한참 남았으나 매복 등의 위험 요소를 미리 살펴야 했다.
하지만 달영의 조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발각되어서 사로잡힐 경우에 뒤에 있는 본대는 무방비로 노출된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50명 단위로 구성된 여섯 조가 교대로 추월 중이었다.
만약의 경우가 생기더라도 후속 정찰대가 경고를 해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탓에 부담이 가중되었으나 투덜거리는 이는 없었다.
“상사님, 이쪽 길이 맞습니까?”
한참 달리던 중에 뒤에서 하사 한 명이 주위를 살피더니 달영에게 물었다.
달영이 향하는 길은 옷치긴 왕국의 수도로 가는 방향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북서쪽이 아닌 정서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첫 목적지는 장춘이다.”
“장춘이요?”
“일단 그곳에 있는 아리크타이부터 처단하고 수도로 갈 예정이다.”
달영은 그제야 목적지를 밝혔다.
그 역시 장춘으로 향할 거라는 소식을 들은 것은 어제저녁 무렵이었다.
상사 계급 이상 되는 무관에게만 알려준 소식이었고 출병식을 하기 전까지는 절대 발설하지 말라는 당부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비밀이 아니었다.
“요동에서 출발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4만 명도 그쪽에서 합류합니까?”
“그렇겠지. 요서 지역에 남겨져 있던 정찰대도 거기서 합류하기로 되어 있으니 그때까지만 조금 고생하자고.”
달영은 그렇게 말하며 말을 멈췄다.
이제는 뒤에서 달리는 다른 조가 그들을 앞질러 나갈 차례였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려서 병사들의 표정을 살피니 생각보다 다들 상당히 평온해 보였다.
이제 막 부여성을 나선 것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아리크타이 그 자식도 똥줄 좀 타겠지. 안 그런가?”
*
고려군의 출정 소식은 곧장 옷치긴 왕국에서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심어 놓은 정보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부여성을 공격당한 고려가 보복을 할 거란 사실은 이미 다들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일이 있었다.
옷치긴 왕국에서는 고려군이 곧장 수도를 향해 진군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전쟁은 상대방의 왕만 잡으면 그걸로 끝나버리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려군은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고 장춘 방향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옷치긴 입장에서는 팔짝 뛸 일이었다.
그들은 부여와 요동에서 수도로 향하는 길목에 온갖 함정을 놓고 매복하는 것을 주요 작전으로 세워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춘을 통해서 오면 그 노력이 다 부질없어지는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이오?”
“장춘에는 아리크타이 장군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잠시나마 시간을 벌어줄 동안에 다시 병력을 배치하면 되옵니다.”
“장춘에 있는 이들은 고려군의 보급대를 습격할 기마병이 주축인 데다가 기껏해야 만오천여 명에 불과하지 않소.”
장춘에도 병력은 있었다.
하지만 수성을 위한 용도는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병력은 수도인 회령(會寧)에서 막아내는 동안에 아리크타이가 기동력을 앞세워 뒤를 칠 예정이었다.
보급선을 잘라내기 위한 책략이었다.
비록, 아리크타이 장군이 부여성에서 무려 14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잃었으나 옷치긴에 그만한 장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번 일을 맡긴 것인데 전쟁이 시작도 되기 전에 완전히 꼬여버렸다.
만약에 장춘이 먼저 무너지면 그나마 살려서 돌아왔던 기마병 대다수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막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요왕 오르케는 마음이 급했으나 그 자리에 모인 부족장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아리크타이가 이번 기회에 고려군의 손을 빌려서 사라지길 바랐다.
“추가로 병사를 보내지 않아도 아리크타이 장군이라면 적어도 어느 정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응원군을 보내지 말라는 의미인 것이오?”
“지금 병력을 보내봤자 고려군이 먼저 도달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그러면 차라리 이쪽으로 병력을 모아서 대항하는 방법도 있지 않소.”
“차라리 그가 버텨주는 동안 회령 중심으로 병력을 재배치하시옵소서.”
아리크타이 장군을 버리라는 의미였다.
오르케는 속으로 욕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 티를 낼 수는 없는 상황인 것이 요왕의 권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부족장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기존에 그의 왕권을 세워주었던 정예 병력을 모두 부여성에서 잃은 탓이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은 했으나 그렇게 완벽하게 패하고 돌아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지금은 수도에 배치된 병력 대부분이 이 자리에 모인 늙은 부족장들의 부족에서 내놓은 이들로 채워졌다.
부족장 중에는 강제로 고려 원정에 부족민을 밀어 넣은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서로 원수처럼 싸우던 이들이나 대부분의 부족이 혈연으로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부족장들의 입장에서는 다음 차례가 자신의 부족이 되지 않을 거란 장담을 할 수 없었다.
“그대들의 뜻대로 하시오.”
오르케는 마지못해 동의를 해줬다.
그건 아리크타이 장군에게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파악한 고려의 병력은 최소 10만 명이 넘어갔다.
장춘에서 아무리 기를 쓰고 막아도 결국 고려군에게 무너질 것이 분명했다.
기왕에 이렇게 된 바에 그가 조금이라도 오래 버티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목숨으로 실수를 만회하시오.’
*
요왕이 결심을 내리던 순간.
아리크타이는 애타게 원군을 기다렸다.
설마 자신과 장춘을 통째로 버릴 거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많은 수를 잃었으나 여전히 옷치긴 왕국에서 기마병은 핵심 자원이었다.
일반 병사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제대로 활용하면 몇 배나 되는 병력도 박살 낼 수 있는 수준의 병사들이었다.
패배자로 낙인찍힌 자신은 몰라도 적어도 그들은 어떻게든 살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전령을 보내도 확실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어떻게든 장춘을 지켜내시오.]
이런 말만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쯤 되자 아리크타이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챌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자신과 척을 지고 있었던 부족들 때문일 것이다.
더는 기댈대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아리크타이는 속이 후련해졌다.
차라리 피 터지게 싸우다가 죽는 것이 자신에게는 더 어울리는 결말 같았다.
지금 당장 여기서 도망치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옷치긴 왕가에 대한 충성심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국경을 지키던 초소에서 보내온 것이 사실이라면 고려군은 최소 8만 명에서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병력을 물려야 합니다.”
부관인 율차크는 아리크타이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 중의 하나였다.
부여성에서 퇴각할 때도 그가 아니었다면 중간에 고려군에게 붙잡혔을 것이다.
율차크는 퇴각해야 한다는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었다. 이곳 장춘에 있는 병력을 가지고 고려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수도에 있는 병력과 힘을 합쳐도 막을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명령을 무시하고 수도로 복귀해봤자 돌아오는 것은 처형 명령일 것이다.
그렇다고 동쪽과 남쪽으로 향할 수도 없는 것이 부여와 요동에서 동시에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막다른 길에 도달한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제 와서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직 서쪽 방향이 열려있지 않습니까.”
“원나라로 가란 말이냐?”
“어차피 옷치긴 왕가는 원나라의 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장군께서 지금 보유한 병력을 가지고 가면 크게 환대를 해줄 것입니다.”
일리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뜻 당기는 제안은 아니었다.
이미 망조가 든 나라로 가봤자 결국에는 결말이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
“지금 당장의 문제만 생각하시고 훗날의 일은 그때 다시 고민해도 늦지 않습니다.”
율차크는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 늦어지면 빠져나갈 시간도 없기 때문이었다. 고려군의 추격을 받지 않으려면 반나절 내에 정해야 했다.
그걸 넘기면 따라잡힐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장춘성에서 죽을힘을 다해서 버텨봐야 옥쇄 당했다고 추앙받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아리크타이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회령에 남아 있는 가족 때문이었다.
그는 장군이라는 직책 외에도 공주의 남편이라는 부마 자리에 올라 있었다.
당연히 그의 아들과 딸도 요왕이 있는 왕궁에 머물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인질과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이었다.
“장군! 서둘러야 합니다.”
율차크도 그가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기에 최대한 기다려주려 했다.
하지만 고민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자 다시 한번 시간이 없음을 강조해야 했다.
병사들에게 가족을 버리라고 할 수도 없기에 일부 백성도 같이 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해야 하는 것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하자꾸나. 서둘러서 움직일 준비를 하거라.”
결국에는 아리크타이도 율차크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버텨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서둘러서 성을 빠져나갈 준비를 했고 해가 저물기 전에 장춘성을 떠나 서쪽으로 기나긴 행렬이 움직였다.
그리고 며칠 후.
고려군이 도착할 무렵.
장춘성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걸 본 고려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안우의 1군 병사를 이끌고 온 김귀도 비슷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당연히 들 수밖에 없었다.
최영은 신중한 편이라 병사들을 곧장 성안으로 들여보내지는 않았다.
대신 이지란과 감찰사의 관리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기로 했다.
장춘에도 정보원이 아직 있었다.
적어도 그들을 통해 이게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에 이지란은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안에서 본 것을 그대로 최영 등의 장수들에게 전달해줬다.
“다들 어디로 도망친 것인지 성안에는 일반 백성들 외에는 병사로 보이는 이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