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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77화 (177/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7

복수만큼 확실한 동기부여는 없다.

부여성의 피해는 적지 않았고 병사들은 그만큼 갚아주려는 의지가 강했다.

당연히 이듬해 봄에 진행될 역습에 대한 준비는 어느 때보다 발 빠르게 이뤄졌다.

부여성을 비롯해 요동을 포함한 북부 전체가 전시 체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백성들도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전쟁은 상당히 많은 물자를 소비한다.

수성 과정 중에 사용한 화살과 탄환의 사용량이 엄청났는데 그중에 다시 회수한 숫자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화살은 대부분 망가졌고 탄환은 땅에 박혀서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화포로 쏜 철환은 회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곧장 다시 쓸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수철연의환은 겉면에 납을 씌웠는데 발포 중에 훼손된 게 많았다.

결국에는 다시 손을 봐야 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꽤 빨랐다.

북부 지역은 대부분 이앙법을 하기에 겨울에도 보리농사를 짓지만, 그래도 여름철보다는 농사일이 적은 편이다.

더구나 백성 대부분이 수년간 전쟁을 치러온 경험이 있기에 전쟁 물자를 생산하는 기술이 거의 장인급이었다.

“슝하고 날아가서 외이(外夷) 아새끼들 대갈통에 콕! 박히거라.”

“내가 만든 화살이면 백발백중이지.”

“일어들 나소~ 일어들 나소~ 어리시구나 야야, 저리시구나 야야”

성안 곳곳에서 작업을 하며 부르는 노동요가 들릴 정도였다. 작업을 하는 백성들의 표정은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들에게 쥐여 주는 돈은 그리 많지 않았으나 스스로 참가하는 이가 많았다.

수성 중에 그들의 피해가 없지는 않았다.

성이 함락된 것은 아니었으나 백성들 중에 사망한 이들도 적지 않게 나왔다.

직접 정벌에 나서지 못하는 아녀자와 노약자들은 이렇게나마 한몫 거들며 나름대로의 복수에 참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만 바쁜 것은 아니었다.

부여성을 향해 고려 전역에서 전쟁 물자의 이송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화약은 성안에 있는 창고에 가득 채워졌고 대장간은 겨울인 것을 잊을 정도로 뜨거운 불길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도 훈련을 거듭했다.

그들은 맹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있을 전쟁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서달과 이지란의 병사들은 눈에 독기가 가득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수성 과정에서 흘린 동료의 피를 몇 배로 갚아줄 날만을 기다렸다.

병사들의 죽음에는 보상이 뒤따랐다.

고려는 결정적인 공을 세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해줬다.

상당수가 무공훈장을 받았고 개성과 평양에 조성된 현충원에 시신이 안장되었다.

현충원에 안장되는 일은 고려에서 가장 명예로운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죽은 무관 외에도 안보와 이공수 같은 문관도 그 공을 인정받아 현충원에 묻혔다.

가문에서 쓰는 선산이 있는 이들이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폐하께서 즉위한 이후로 계속해서 무덤을 쓰는 것보다 화장을 권장한 덕분인지도 몰랐다.

“하나, 둘, 찔러! 하나, 둘, 막아!”

서달이 우렁차게 구호를 외치자.

삼천여 명의 병사는 동시에 움직였다.

그들은 대부분 수년간의 경험이 쌓인 정예라 할 수 있지만, 언제나 훈련의 시작은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했다.

찌르고, 막고, 베는 행위.

그것은 매일 훈련해도 부족했다.

단조로운 이 시간이 켜켜이 쌓여서 전장에서 생존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고려군은 체력적인 부분도 상당히 중요시했다. 그래서 모든 부대는 매일 구보를 했고 겨울이 아니었다면 이레마다 행군도 했을 것이다.

부우웅!

하지만 공들이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서달의 부대가 장기로 삼고 있는 것은 그들의 손에 쥐어진 도끼였다. 돌진하며 휘두르는 도끼는 그들의 상징이었다.

오죽하면 폐하께서 내려준 멧돼지 문양의 부대기보다 도끼가 더 유명할 정도였다.

서달의 부대가 한겨울에도 굵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을 무렵에 그들 못지않게 훈련에 힘을 쏟아붓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여성의 수성 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부대 중의 하나인 정찰대였다. 천여 명에 달하던 정찰대는 7할이 사망하여 삼백여 명만 남았다.

“하아···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네.”

달영은 부하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봐도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중요성을 알기에 당장 신병이 충원이 되었으나 제대로 써먹을 수준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나마 동별초와 서별초 소속의 하사와 중사 계급이 보충된 것이 다행이었다.

“저들에게도 적응할 시간은 주어야지요.”

옆에서 지켜보던 말석은 조급해하는 달영을 달래주었다. 훈련을 지켜보는 달영의 상태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수성 중에 화살이 날아와 그의 목덜미 부근을 찢고 지나갔다. 아주 살짝만 어긋났어도 그 자리에서 즉사할뻔했다.

지금도 그의 목덜미는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는데 아직 완벽하게 아물진 않았다.

하지만 교육을 담당할 중사와 상사 계급의 하급 무관 대부분이 사망한 터라 그가 이렇게 나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출정하기로 예정된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으니 그렇지.”

“어차피 이번 출정에는 정찰대에 새로 보충된 병사들은 가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떠난 뒤에 공백은 누군가 메꿔야 하지 않은가.”

고려의 전술에서 정찰대는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수성 중에는 적을 미리 감지하고 공성 과정에서는 매복의 위험을 차단하는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런 중요한 임무를 신병에게 맡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장 과거와 같은 수준의 병사를 다시 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십여 년 가까이 복무하며 경험을 쌓은 기존의 병사와 같은 수준을 하루아침에 만들 수는 없었다. 이번 출정에서는 기존의 병력만으로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기는 했다.

이미 요왕의 주력 부대는 와해되었다.

아리크타이를 포함해서 살아서 돌아간 옷치긴의 병력은 많아 봐야 4만 명이었다.

징집병을 제외하면 원정에 참전하지 않은 병력을 합쳐봐야 대략 6만 명 내외에 불과하다고 추측되고 있었다.

“이번 원정은 최영 장군님이 맡기로 하신 것 맞지요?”

“글쎄··· 요동으로 복귀한 안우 장군님이 맡으실지도 모르지. 출정하기 전까지는 어디가 주력인지 감출 생각이신 것 같네.”

“그럴 의미가 있을까요?”

“상대방이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는 전장에 들어가는 것은 피해야지.”

그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었다.

저들도 고려군이 겨울이 지나면 보복을 위해 출정할 거라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달영은 중사 승진을 위해 예전에 공부했던 전술서의 내용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던가, 수성전의 공로를 인정받아 상사가 되자 시야가 달라졌다.

이제 그는 대장인 정개 다음으로 네 명의 부대장 중의 하나로 올라선 것이다.

전쟁 중이기에 가능한 승진이었다.

얼마 전까지 만년 하사 계급에 염증을 느끼고 추노꾼 노릇을 하던 그가 순식간에 이백오십 명을 지휘하는 상사가 되었다.

죽을힘을 다하던 시절에는 계속 물만 먹었는데 오히려 손에서 놓으니 승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걸 떠올리며 달영은 사람의 인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대놓고 기뻐할 수는 없었다.

그가 그 자리에 오른 것은 그만큼 기존에 있던 중사와 상사 계급의 무관이 많이 죽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승진에 대한 갈망이 있다고 하더라도 동료의 죽음을 기뻐하며 그 자리를 차지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적어도 인간이라면 그럴 수는 없었다.

“어디가 주력이든 우리가 이번 출정에서 선두에 서는 것은 변하지 않아.”

“그래서 말인데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혹시라도 잘못···.”

달영은 말석의 표정만 봐도 그가 뭘 말하려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전쟁을 나서기 전에 비슷한 일이 제법 많았다.

아마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아이를 부탁한다는 그런 비슷한 말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들어주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아비를 대신할 수 있는 이는 없다.

갓난이를 위해서라도 말석만큼은 어떻게든 살려서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의 말을 들어줄 필요는 없기에 남은 기간 동안 더 빡세게 굴릴 생각으로 그의 말을 끊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가서 훈련이나 하게!”

*

그렇게 시간이 흘러 봄이 오자,

부여성에 있던 최영은 황궁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준비한 것을 보고함과 동시에 직접 출정 명령을 받아 가기 위함이었다.

안우와 최영 중에 이번 출정의 지휘관이 된 이는 역시 복수라는 명목이 있는 최영이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평양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 보통은 장계와 칙서를 주고받으며 지시를 내리는 편이었다.

이번에 평양에 온 이유는 공적인 것 외에도 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최근에 최영의 둘째 아들인 최언이 아들을 보았기에 잠시 온 것이었다.

“굳이 그런 핑계를 대지 않아도 되오.”

하지만 나는 그의 진심이 뭔지 대충은 알고 있었다. 손주의 얼굴을 보는 것만이 이유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번에 최영은 평양에 오며 상당수의 무관과 동행했다.

아마도 휴가를 다 써서 출정 전에 고향에 오지 못했던 이들일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쓰는 이유가 있다.

전쟁에 나가서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거란 장담을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우세한 상황이라도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아리크타이도 아마 고려의 국경을 넘어오기 전까지 승리를 확신했을 것이다.

작은 변수 하나가 결과를 바꾼다.

지난 전투도 서달이 반나절의 시간을 극복하는 묘책을 내놔서 이긴 것이다.

아무리 대군이라도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으면 한순간에 무너지기 마련이다.

고려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을까.

더구나 이번 출정을 맡은 최영이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적에게 혼란을 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장수가 출정 준비를 미루고 평양으로 향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감찰에서는 요동에 있는 안우가 출정의 주력이라는 허위 정보를 흘리고 있었다.

“송구하옵니다.”

“휴가가 필요한 이들이 있으면 차라리 장계를 올려서 우의정과 논의하시오.”

“하오나 불공평한 사례가 나오면 시간이 지날수록 관례처럼 굳어질 것이옵니다.”

“이제 이런 출정이 얼마나 더 있을 거라 보시오?”

이번에 옷치긴 왕가를 무너뜨려도 아직 원나라의 대도와 초원의 카라코룸 등이 남아 있기는 했다. 조금 더 넓게 보자면 고려를 배신한 대주국도 있었다.

하지만 최영은 끝내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소장은 그저 폐하의 명령대로 움직일 뿐이옵니다. 만약에 세상 끝까지 진군하라고 하시면 그에 따르겠사옵니다.”

“하하. 그럴 생각은 전혀 없소. 아마 이번 정벌이 끝나면 당분간 전쟁은 없을 테니 최선을 다해주시오.”

내가 즉위 초기에 그렸던 국경은 이제 거의 완성됐다. 만주 지역만 고려가 가져오면 더는 전쟁은 없을 것이다.

그 외에도 사할린과 홋카이도가 남아 있으나 전쟁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가서 점령하면 되는 땅이었다.

홋카이도는 왜국의 영향력이 조금씩 커지고 있으나 연주로 오가는 배와 4함대가 영향력을 펼치고 있기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폐하께서 평화를 원하셔도 지난 겨울 때처럼 주변에서 고려를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옵니다.”

“도발하는 적을 그냥 놔둘 생각은 없소. 안타깝게도 평화는 날카로운 칼을 쥐고 있는 자에게 찾아오는 법이오.”

“그러하옵니다.”

최영도 내 말에 동의했다.

강한 무력이 있어야 평화가 찾아온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그게 이 세상의 진리였다. 역사를 뒤져봐도 만만하게 보이면 오히려 전쟁이 터지기 쉽다.

“실제로 이번 정벌에 동행하고자 스스로 병사가 되려고 찾아오는 장정의 수가 적지 않았사옵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복수심에 불타서 스스로 병사가 되려는 이들이었으나 넓게 보자면 애국심 없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을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다.

과거에 우의정 변안열과 그와 관련된 논의를 했었는데 수성전에서 사망한 이들의 수만큼 받기로 했던 게 기억났다.

현재 고려는 감당할 수 있는 병력의 숫자를 넘은 지 오래되었기에 더는 늘릴 수 없었다.

얼추 출정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자,

신소봉을 불러서 술상을 들여왔다.

이제 곧 전장으로 떠나는 최영을 위해 직접 술을 한 잔 따라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출정을 하는 장수에게 금과 은으로 된 재물을 주기보다 이렇게 직접 술을 한 잔 따라주는 일을 자주 했다.

재물을 아끼려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공을 세우면 그 이상을 내주었다.

그보다는 그에게 맡기는 12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겨 달라는 부탁에 가까웠다. 하지만 소극적인 모습을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주변에 있는 원나라와 대주국 등에게 감히 고려를 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본때를 보여줘야 했다.

감히 두 번 다시는 고려에 칼을 겨눌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이번 원정의 목표였다.

나는 최영이 두 손을 들어 공손하게 쥔 잔을 가득 채우며 신신당부했다.

“저들에게 고려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각인시키고 돌아오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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