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6
고려군의 추격은 집요했다.
지금까지 수성하며 당한 게 있었다.
참아오던 울분을 0 터트린 터라 부여성의 병사와 원군으로 온 병력은 쉬지 않고 아리크타이와 그의 병사들을 뒤쫓았다.
한 명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일 정도였다.
이미 기세는 고려 쪽으로 넘어왔다.
거의 엇비슷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려군의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야습을 당한 터라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곧장 항복을 선택한 병사의 수가 수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대부분 강제로 징집된 이들이었다.
병장기보다는 농기구를 잡던 이들이 버틸 수 있는 재간은 없었다. 그런 이들은 끝까지 저항하기보다는 어떻게든 목숨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포기했다.
그들 중에는 왕자의 난으로 인해 강제로 고기 방패로 내몰린 부족도 상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요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 싫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항복! 항복할 테니 칼을 거두시오.”
“목숨만 살려준다면 뭐든 하겠소.”
“우리는 농사를 짓다가 억지로 끌려온 것이니 사정을 봐주십시오.”
그렇게 잡은 포로만 4만여 명이었다.
이번에 야간 기습으로 사망한 병사들의 수와 거의 엇비슷한 수준의 숫자였다.
거기에 공성 과정에서 압도적인 화력에 의해 죽어 나간 병력의 수도 적지 않았다.
모든 것을 고려하면 현재 도망치는 이들의 수는 많아야 5만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뭉쳐있지는 않았다.
정작 아리크타이는 기마병 중의 일부만 데리고 빠른 속도로 도망치고 있었다.
겨우 2천 명에 불과한 숫자였고 그게 의미하는 바는 일반 병사들은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병사들도 알아서 살길을 찾았다.
그들은 자신을 버린 장수의 뒤를 쫓지 않고 아예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중에는 방향 감각을 잃고 고려의 영역으로 더 깊숙하게 향하기도 했다.
당연히 고려군은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지 모르는 그들을 먼저 차단해야 했다.
그런 탓에 정작 아리크타이를 뒤쫓는 이는 고려의 서별초와 동별초가 유일했다.
속도 차이 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래도 두 부대를 합쳐서 대략 4천여 명에 달했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고려군은 바꿔 탈 여분의 말도 가지고 있기에 이원계와 조인벽은 꾸준히 아리크타이의 뒤를 압박했다.
하지만 그를 잡는 것은 실패했다.
사력을 다해서 도망가던 그들은 중간에 여러 갈래로 흩어졌고 김삼선과 적장인 아리크타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춘 그들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갈림길에서 잠시 말을 멈춘 조인벽은 이원계를 바라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에 김삼선 그 자식도 잡았어야 했는데 아쉽군!”
“조만간 다시 기회가 있겠지.”
“이대로 부여성으로 돌아갈 수는 없어.”
“물론이지. 아직 보병들은 근방에 흩어져 있을 테니 나눠서 소탕하자고.”
긴 기다림 끝에 나선 두 장군이다.
그냥 되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수성에 참가하지 않았기에 말도 그렇고 병사들도 체력이 부족하지 않았다.
모처럼 활약할 기회인데 그걸 놓치고 싶진 않았다.
“너무 깊숙하게 가지는 말고 적어도 이틀 이내에 성으로 복귀하자고.”
이원계는 곧장 말을 돌리며 외쳤다.
그가 선택한 방향은 부여성의 서쪽이다.
만주 방면으로 줄기차게 뛰어왔는데 아리크타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은 최단 거리가 아닌 옆으로 빠졌다는 뜻이다.
당연히 조인벽도 동쪽 방향으로 말을 몰아서 동별초를 이끌고 떠났다.
그들이 흩어져서 추격을 할 무렵.
부여성에서는 뒷수습을 하느라 바빴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도 전이나 시신을 수습하고 포로를 수용하느라 정신없었다.
그중에는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도끼질을 하던 서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 덕분에 귀중한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진 마십시오.”
이지란은 그런 그를 위로해주었다.
여진 정벌을 하면서 두 장군은 상당히 많이 친해졌는데 그가 서달보다 한 살이 많았으나 사적으로는 친우처럼 지냈다.
그가 그렇게 위로를 하는 이유는 서달 앞에 놓인 수백 구에 달하는 고려군의 시신 때문이었다. 그중의 일부는 이번에 부여에서 징집한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들에게 내가 내린 명령은 죽으라고 보낸 것이나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서달은 고려군에 몸을 담은 지 십여 년이나 되었기에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부하들을 잃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언제나 가장 선봉에 서기에 다른 어떤 부대보다 죽을 확률이 높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대항도 거의 못하고 허무하게 부하들을 잃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미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줬고 스스로 이번 작전에 자원한 이들입니다.”
이지란은 펄쩍 뛰며 반론을 펼쳤다.
그는 서달과 함께 가장 먼저 도착한 원군 가운데 하나였기에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징집당한 이들을 강제로 밀어 넣은 것도 아니었다.
강제성은 전혀 없었다.
대부분의 병사가 스스로 나섰다.
부여성에 있는 백성과 고려를 지키겠다는 의지 하나로 나올 수 있었던 용기였다.
그 무렵의 부여성은 함락되기 직전인 절체 절명의 위기였고 가장 필요했던 것은 겨우 반나절이라는 시간이었다.
공교롭게도 원군의 도착 시기는 거의 비슷했기에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부여성이 함락되면 오히려 고려군에게는 큰 위기였다.
부여성의 병사가 몰살당하고 나면 오히려 원군으로 오고 있는 병사들이 각개격파를 당할 가능성이 컸다.
“그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이곳의 모든 백성과 병사들을 살린 것입니다.”
“이렇게 보내기에는 아까운 이들이었어.”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닙니다.”
이지란도 가슴이 쓰린 상태였다.
희생된 이들 중에는 그의 휘하에 있던 여진족 출신의 병사도 제법 많이 있었다.
그는 서달과 함께 부여성에서 가장 가까운 속주(지린성) 부근에 있었으나 간발의 차이로 부여성에 들어서진 못했다.
대신 그들은 징집된 병사 만여 명을 추가로 얻을 수 있었고 언제든 부여성와 합심하여 공격에 나설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그럴 만한 틈이 전혀 없었다.
막무가내로 들이밀어 봤자 엄청난 병력의 차이로 인해 피해만 보았을 것이다.
더구나 서달 장군의 명령은 적당한 시기를 봐서 뒤로 물러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적을 기만하기 위해서 긴 시간을 버티다가 뒤늦게 아리크타이가 보낸 기마병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걸 서달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때 최영 장군이 나타났다.
거의 다섯 시진 이상이나 격렬한 수성을 한 탓에 그의 갑주는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만 봐도 부여성이 얼마나 급박했던 상황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충(忠)! 늦게 합류해서 송구합니다.”
두 장군은 벌떡 일어나 그를 맞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2군의 병마사인 최영은 고려에서 무관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비록 변안열이 다소 빠르게 우의정 자리에 앉아 있으나 언제든 그 자리에 최영이 앉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가 도당에 들어가지 않는 이유는 안우와 마찬가지로 현장에서 병사들과 함께 있는 것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문관들과 입을 가지고 싸울 바에는 칼을 휘두르는 것이 더 속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달 앞에 놓인 여러 시신을 보고 곧장 무슨 일인지 알아챘다.
“저들의 희생을 헛되이 할 생각인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번 전쟁에서 이겨야지. 그래야 저세상에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야.”
거기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고려라는 나라가 존재해야 작게나마 저들의 희생에 대한 보답을 해줄 수 있다.
그러니 일단은 당장은 발 등에 떨어진 불부터 끄고 생각하자는 뜻이었다.
따지고 보면 부여성에서 수성 중에 잃은 병력의 수를 보면 최영이 훨씬 많았다.
그라고 속이 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종종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감수했지만, 누구보다 병사를 아끼는 장군 중의 하나가 바로 최영이기 때문이었다.
“외침부터 막아내야 저들의 유족들에게 작게나마 보답을 해줄 수 있지 않겠나.”
최영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병사들의 시신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서달도 그걸 잘 알기에 추모를 잠시 멈추기로 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고려를 침략한 요왕의 병사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제 손으로 반드시 그 아리크타이라는 놈의 대갈통을 부숴버리고 말 것입니다.”
서달의 손은 벌써 허리춤에 꽂아 놨던 도끼에 올려져 있었다. 만약에 그가 서달 앞에 있었다면 벌써 반으로 쪼개놨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는 고려의 추격을 뿌리치고 달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 말은 잊지 않고 기억하겠네.”
최영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했다.
부여성을 사수하고 요왕의 병사를 쫓아낸 것으로 끝날 전쟁은 아니었다. 고려는 언제나 당한 만큼 그대로 갚아줬다.
더구나 만주는 언젠가 한 번은 고려군이 밟아야 할 땅이었다. 안우와 최영과 같은 병마사는 이미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비록 먼저 선공을 당했지만,
이제부터 다시 갚아주면 된다.
더구나 감찰사의 말에 의하면 옷치긴의 병력 대부분이 이번에 동원된 상태다.
여기서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으니 이제 만주는 무주공산인 상태였다.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 했다.
오히려 만주를 노릴 수 있는 기회였다.
이번에 도망친 병사들이 모두 만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수가 그리 많다고 보지는 않고 있었다. 그들이 다시 병력을 모아도 대부분 징집병일 것이 분명했다.
“설마, 만주를 치실 생각이십니까?”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서달은 눈을 반짝이며 최영에게 물었다. 이지란도 다르지는 않았는데 공을 세울 기회였다.
이지란은 여진 정벌에 적지 않은 공을 세웠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여겼다.
고려에서 무관으로 성공하려면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장군들 대부분이 쌓은 전공이 엄청난 상태였기에 다른 기회가 필요했다.
원나라를 향한 정벌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어쩌면 만주가 마지막 기회일 수 있다.
더구나 다른 곳도 아니고 만주 지역은 여진족에게도 작지 않은 의미가 있었다.
“그렇다네. 그러니 잠시 애도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당장의 일만 생각하게.”
하지만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만주로 출정하는 것은 아무리 병마사인 최영 장군이라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도당에서 여러 논의 끝에 승인이 떨어지거나 폐하께서 직접 지시를 내렸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혹시 전하께서···?”
“안 그래도 추격에 나선 병력이 모두 돌아오면 요동 병마사와 함께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생각이니 수습부터 하게.”
“알겠습니다.”
서달은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앉아있을 시간에 복수를 준비하는 것이 훨씬 더 그의 성격에 맞기 때문이다.
이지란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는데 추격에 나섰던 병력이 다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뒤였다.
부여성에 모인 장수들은 꽤 화려했다.
남부 지역에 주둔 중인 주덕유와 이성계 그리고 평양에 있는 변안열과 이원림을 제외하면 고려를 대표하는 장군들이 거의 대부분 모여있는 상황이었다. 부여성에 걸린 부대기만 여섯 개나 될 정도였다.
그만큼 상황이 위급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병력의 수도 적지 않았다.
이번에 수성 중에 잃은 병력이 만여 명이 넘어갔지만, 징집된 부여 지역의 장정을 제외해도 13만 명이나 되었다.
최근 고려의 역사상 이렇게 많은 병력이 모인 것은 처음이라고 봐도 되었다.
과거에 홍건적과 싸울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새로 즉위한 요왕은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것이었다.
지휘권은 안우 장군이 더 높으나 부여 지역의 병마사인 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폐하께서 보낸 칙서를 읽기 시작했다.
내용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았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시기였다.
추수가 끝난 이후에 북부 지역은 곧장 겨울이 오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칙서에 적힌 내용도 당장 출정하라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지금부터 준비해서 이듬해 봄에 만주로 출정하시오. 이번에 당한 것의 갑절로 되돌려주고 와야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