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5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였다.
심지어 부여성에서 수성하던 고려의 병사들조차 꽤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다.
요동에서 출발한 안우 장군이 언제 부여성에 도착할지는 기밀이었다.
하지만 거리를 계산하면 정확하진 않더라도 대충 가늠할 수 있기는 했다.
대부분 적어도 며칠 이상은 더 걸릴 것이라 예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원군이 도달한 것이었다.
“드디어 원군이 왔다!”
“살았다. 이제 우리가 반격할 차례구나.”
“이 위기만 넘기면 우리 쪽으로 흐름이 돌아올 테니 다들 조금 더 힘내거라.”
병사들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원군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 건지는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나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계기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고려군은 절대 지지 않는다는 지난 십여 년 이상의 성과 덕분이기도 했다.
반면에 아리크타이는 고민에 빠졌다.
한두 시진만 더 공략하면 보름 가까이 그를 괴롭히던 부여성을 드디어 함락할 수 있을 거라 예상이 되던 시점이다.
그런데 하필 이 순간에 원군이 왔다.
여러모로 상황이 무척 고약했다.
모든 병사들이 공성에 동원된 상태였다.
심지어 만여 명에 달하는 기마병조차 성벽에 다가가서 화살을 쏘고 있었다.
지금 후방에는 보급품을 지키는 소규모부대 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전투력을 기대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았다.
“후방에 배치한 보급대가 위험합니다. 그쪽으로 들이닥치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보급을 담당하는 장수 하나가 서둘러서 병력을 뒤로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그들에게 가장 취약한 부분이 보급이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만약에 보급품을 잃는다면 어쩔 수 없이 아리크타이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들의 보급품 수준은 무척 빈약했다.
선대 요왕께서 승하하신 후에 갑작스럽게 출정한 터라 제대로 준비할 틈도 없었다.
워낙 많은 병력을 데리고 온 것도 문제다.
거의 이십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하루에 먹는 양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겨우 보름쯤 버틸 수 있을까.
아리크타이의 원래 계획은 고려의 성을 정복해가며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마침 추수 시기라 가능한 일이었고 부여성 부근은 비옥하기로 유명한 곳이다.
성마다 엄청난 양의 양곡이 쌓여 있을 테고 부여성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함락시키며 보급을 하면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부여성에서 발목이 잡혔다.
생각 이상으로 부여성을 지키고 있는 최영이란 장수는 끈질기게 버텼다.
“절대 병력을 물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부여성을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집니다.”
반대의 목소리도 분명히 있었다.
자신의 부족을 이끌고 이번 전쟁에 참가한 김삼선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고려에게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에 나올 수 있는 예감이었다.
고려의 장수들은 교활했다.
적을 기만하고 허점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책략을 자주 펼치는 이들이다. 그렇게 여진족이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듣기로는 평양에 무관들을 모아서 아예 그런 것만 가르치는 곳도 있다고 했다.
당연히 그는 이번에도 기만 전술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원군으로 온 고려군의 진격 속도가 매우 느렸다. 기습의 묘미를 전혀 살리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당장 달려와서 공성 중인 병사들의 뒤를 쳤을 텐데 고려군은 거리를 두고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다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아리크타이 휘하의 장수들은 대부분 김삼선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았다.
“부족장의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아예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저들이 지금이라도 보급대를 노릴 수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일단은 병사를 뒤로 물린 뒤에 저들의 규모를 파악하고 다시 부여성을 도모해도 늦지 않습니다.”
등 뒤를 내주고 싸울 수는 없었다.
병력의 일부만 돌아오라 명령을 내리고 싶어도 그러한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진 신호기는 전군의 돌진과 후퇴 같은 대략적인 신호만 있기에 일부 부대만 콕 집어서 되돌리기도 어려웠다.
휘하의 장수들이 모두 같은 소리를 내자 아리크타이는 당연히 그들의 말을 들었다.
김삼선이 하는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의견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역시 장수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 퇴각 신호를 보내거라. 진형을 다시 재정비해서 고려의 원군부터 각개격파하고 다시 부여성을 노린다.”
신중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
만주에서도 고려군의 명성은 자자했다.
두 차례나 이어진 홍건적의 침략을 커다란 피해 없이 막아낸 전력이 있었다.
더구나 성을 지키고 있는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패의 신화를 쓰고 있는 최영 장군이다.
그의 지시는 곧장 시행되었다.
퇴각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지자 뒤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모른 채 성을 공략하고 있던 장수들과 병사들은 의아해했다.
오늘은 어떻게든 결판을 낼 분위기였다.
아니 꼭 그래야만 했다.
조금만 더 공격하면 부여성은 함락할 수 있을 거라 여겨졌다. 그런데 갑자기 퇴각을 지시하는 신호가 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된다고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후퇴하는 병력이 훨씬 많았다.
그들이 물러선 공간에는 무려 3만여 명에 달하는 시신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린 건지 부여성은 피가 말라붙어서 검붉게 보일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은 역시 화포였다.
화포가 한번 쏘아질 때마다.
넓게 퍼지는 작은 철환에 당한 병사가 제일 많았다. 근접한 상황에서 쏘는 조란탄은 학살에 가까운 성능을 보였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도 분명히 있었다.
부여성은 남문에 이어서 북문까지 벽돌로 막아놨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서둘러서 진형을 정비하라!”
공성 중이던 병력이 물러서자.
아리크타이는 직접 병력은 통솔했다.
이번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고려의 원군을 처치하면 승기를 다시 잡을 수 있다.
하지만 진형을 다시 꾸린 뒤에 보니 뭔가 이상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 사이에 원군으로 온 고려군은 뒤로 물러났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모습도 엿보였는데 뒤늦게 이상한 것을 눈치챈 아리크타이는 기마병을 보내 추격했다.
잠시 후에 돌아온 소식은 가관이었다.
시야가 트여있는 서쪽에서 다가온 2만여 명의 고려군을 제외하면 나머지 방면은 고려군의 규모가 천여 명에 불과했다.
한마디로 저들의 술수에 놀아난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허망한 표정을 하고 있는 옷치긴의 장수들을 지켜보며 김삼선은 속으로 혀를 찼으나 이미 상황은 끝났다.
“뭐라고? 그 말을 믿으라는 말이오?”
“수많은 깃발을 흔들며 흙먼지를 피워올린 것을 보면 아무래도 허장성세(虛張聲勢)였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제길!”
아무래도 당한 것 같았다.
이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남쪽 지역에 있는 2만여 명에 달하는 고려군을 치거나 다시 부여성의 공략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부여성을 공략하여야 합니다.”
김삼선은 다시 한번 자신의 주장을 내세웠으나 이번에도 묵살됐다.
온종일 공성전에 매달려 있던 병사들의 피로감이 극심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실제로 탈진하여 쓰러진 이들과 공성 과정에서 다친 병사들의 수가 생각 이상으로 많은 상황이었다.
거의 수만 명에 달하는 이가 전투가 불가능할 정도의 상태가 되었다.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리크타이는 그런 상황을 고려해서 원군으로 고려의 병사는 내일 공격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내일 결판을 내겠소!”
*
그리고 그날 밤.
다시 한번 고려의 기습이 있었다.
이번에도 사방에서 나타난 고려의 병사들은 고함을 치며 수없이 많은 깃발을 흔들며 아리크타이의 병사들을 도발했다.
하지만 낮에 당한 것이 있기에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이들은 없었다.
“저것들이 누굴 바보로 아는 건가. 똑같은 것을 두 번이나 당할 줄 아나.”
여진족의 병사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정작 김삼선의 표정은 심각했다.
이번에도 그의 촉은 반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지 알 수는 없으나 이번에는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아까와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 것이 뭔가 일이 터질 것 같았다. 매번 이런 느낌이 올 때마다 생사의 고비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와 달리 사방에서 화포를 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말거라!”
“다들 덤비거라. 내가 고려군의 무서움을 직접 보여주마.”
“아하하! 널린 것이 표적이니 계속 방포하라.”
그게 신호라도 되는 것이었는지 어둠을 사이로 사방에서 고려군이 몰려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앞장선 병사들이 휘두르는 도끼질은 굉장히 흉흉했다.
악에 받친 듯한 표정과 눈빛만 봐도 옷치긴 병사들이 질려서 뒷걸음질 치고 있을 정도였다.
“내가 고려 최고의 선봉장 서달이니라!”
그들의 정체는 서달의 병사들이었다.
그리고 그 못지않은 활약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지란이 이끄는 여진족 출신의 병사들이었다. 마치 두 장군의 병사들은 경쟁이라도 하듯이 적진을 휘젓고 다녔다.
하지만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습 작전의 주력은 요동에서 온 안우 장군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부여성에 도착한 후에 한 시진만 쉬고 곧장 기습에 투입되었으나 지친 기색도 없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애초에 그들은 보급품을 챙기지 않았다.
각자가 이레 정도 먹을 식량만 챙긴 뒤에 요동에서 부여까지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지방관에게 식량을 보급받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민간에서 차출된 것인데 이번에 사용된 식량은 다시 고려에서 되돌려 준다는 약속을 믿고 내준 것이다.
“땅개비 아새끼들한테 지면 주둔지로 돌아서 크게 혼꾸멍을 내주갔소!”
거기에는 해군도 섞여 있었다.
요동반도에 있던 3함대를 이끌고 온 양관과 부동항에 있던 4함대의 윤호 장군의 병사들까지 합류해 있었다.
거기에 예비군으로 징집된 이들까지 후방에서 받쳐주니 그렇게 합쳐진 숫자만 하더라도 거의 10만 명에 달할 정도였다.
심지어 부여성의 성문도 모두 열렸다.
아직은 건재한 서문과 동문을 통해서 약 4만여 명에 달하는 병사들을 이끌고 최영까지 합세하자 옷치긴과 고려의 병력은 거의 엇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계속되는 공성 중에 아리크타이가 잃어버린 병력이 적지 않은 덕분이었다.
당연히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됐다.
그동안 수적인 열세라 밀렸던 것뿐이라는 것을 직접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려군은 요왕의 병사들을 완전히 밀어붙였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고려군에게 오히려 역으로 포위된 그들은 벌써부터 항복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있을 정도였다.
지금까지는 병력의 차이만을 믿고 싸웠으나 유일하게 우위에 섰던 강점마저 무너진 탓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포기하지는 않았다.
아리크타이르 비롯한 일부 장수들은 죽을힘을 다해서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다.
그중에는 김삼선과 그의 부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이 뚫은 활로를 통해서 수많은 병사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전장에서 안우 장군과 합류한 최영은 도망치는 이들을 어찌할 건지 물어봤다.
둘의 관직은 동일하나 규정상 1군의 지휘자인 안우가 조금 더 높기 때문이다.
같은 전장에 있으면 최영이 아닌 안우가 지휘권을 잡아야 했다.
“당연히 지금 당장 추격해야 하지 않겠소? 감히 고려의 땅을 넘본 저들을 그냥 돌려보낼 생각은 없소이다.”
“하하!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최영은 모처럼 크게 웃었다.
지난했던 수성 과정에서 쌓인 울분을 풀어낼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고개를 뒤로 돌리자 그동안 적과 싸울 수 있기만을 기다렸던 이원계와 조인벽이 눈을 반짝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쥐고 있던 그들의 고삐를 놓아줄 때가 된 것이었다.
“지금 당장 추격하여 저놈들을 한 놈도 살려서 돌려보내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