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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74화 (174/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4

아리크타이가 국경을 넘을 무렵.

고려의 도당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홍건적부터 시작해서 지금껏 여러 전쟁을 겪었지만, 미리 손을 쓴 덕분에 이렇게 많은 병사들이 밀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넋 놓고 있다가 허망하게 당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부여성의 병력보다 세 배 이상이나 된다고 하는데 최영 장군이 버틸 수 있을 만한 보급품은 있는 것이오?”

나는 고려 전체의 군사를 담당하는 우의정 변안열을 만춘전으로 불러들였다.

더구나 그는 우의정에 제수되기 전에 다른 곳도 아니고 부여성을 맡았었다.

누구보다 그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소신이 부여성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적어도 석 달 이상은 버틸 수 있는 식량이 항상 준비되어 있었사옵니다.”

“지금도 그럴 거라 보는 것이오?”

“최영 장군은 보급품의 관리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라 그러할 것이옵니다.”

그는 최영과 함께 여러 차례 전쟁에 나섰던 터라 평소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변안열은 자신이 있을 때보다 더 많은 보급품을 쟁여놨을 거라 여겼다.

무엇보다 부여성은 요서의 부신성과 함께 최전방으로 구분되는 곳이라 대비가 잘 되어 있었다.

만약에 요왕 오르케가 이번에 공격을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고려가 길어봐야 수년 이내에 만주 정벌을 떠났을 것이다.

당연히 화약이나 화살 같은 소모품도 부여성에 엄청난 양이 쌓여 있었다.

더구나 시기적인 면도 고려해야 했다.

“다행히 얼마 전부터 추수를 하던 중이었고 풍년은 아니더라도 평년 대비 작황이 좋은 편이었사옵니다. 그러니 식량 문제는 생기지 않을 것이옵니다.”

“아직 부여성의 성벽이 완전하지 않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게 보시오?”

“일부 구간에 한해서 성벽에 화포를 보호하는 벽을 세우지 못했으나 성벽 자체는 완성된 상태라고 하옵니다.”

변안열은 공부 상서에게 들었던 말을 고스란히 내게 다시 전달해주었다.

현재 영의정과 다른 이들은 보급품 등을 마련하고 수송하는 문제를 논의 중이었다.

아쉽게도 요동까지는 도로가 놓여 있으나 아직 부여성 방면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다.

“요동에서 출발한 안우 장군의 증원군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다는 의미로 보아도 되겠소?”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사옵니다.”

“그렇다면 전시 동원령은 어떻게 되었소?”

고려는 지난 몇 년간 성인 남성을 대상으로 군사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초반에는 여러 혼란스러운 일도 많았으나 지금은 다들 당연하게 여길 정도였다.

보름의 한번식 모여서 반나절 가까이 훈련을 받고 농사일이 없는 시기에도 최소 보름 이상은 제식 훈련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 정예병 수준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농민 수준은 벗어난 상태였다.

수많은 병력이 국경을 넘어왔으나 그들이 있기에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동원령을 내리면 최소 2백만 명에서 최대 4백만 명이 넘어가는 병력을 징집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예비군의 무서움은 역시 물량 공세지.’

하지만 아직 동원령은 부여성의 인근 지역에 한정되어 내려져 있는 상태다.

더구나 추수 시기였기에 전국적인 동원령을 내리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한 해 동안 애써서 지은 농사인데 그냥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굶주릴 수는 없었다.

“현재 부여성 인근 고을의 장정은 모두 징집되었고 속주(涑州)에 모여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고 있사옵니다.”

“지금이라도 부여성에 합류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오?”

“그들만으로는 포위하고 있는 병력을 뚫고 들어가기는 어려운 일이옵니다. 적어도 안우 장군이 도달하기 전까지는 대기하고 있어야 하옵니다.”

결국에는 적어도 보름에서 달포 이상은 최영이 잘 버텨야 한다는 의미였다.

당장은 이곳에서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5만 명이 넘는 고려의 병사들과 부여성의 백성을 버릴 수는 없기에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부여성은 절대 무너지면 안 되는 곳이니 최대한 서둘러서 반격할 준비를 하시오.”

*

안우가 부여성으로 달려갈 무렵.

이미 그곳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아리크타이도 지원군이 올 거란 예측을 했기에 반나절도 쉬지 않고 곧장 성벽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여성의 성벽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튼튼하게 축성되어 있었다.

이 무렵, 고려의 성벽은 두꺼웠다.

기존에 사용하던 판축법(版築法) 등의 축성 방식에서 여러 개선점을 더한 덕분이었다. 거기에 콘크리트까지 겉면에 바른 탓에 기어 올라가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매끄럽고 튼튼했다.

“준비된 화포부터 방포하라!”

“화포 방포를 마칠 때까지 서둘러서 화승총을 재장전하거라.”

“여기 화약이 부족합니다.”

수성전을 하는 과정 중에 가장 큰 활약을 하고 있는 것은 최무선이 이끌고 있는 화통방사군(火筒放射軍)이었다.

그들은 여진 정벌 후에 계속 부여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고려 전체를 뒤져봐도 그들만큼 화포에 능숙한 이는 없었다.

다른 일반 병사가 보았을 때.

그들의 실력은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가장 오래된 병사의 경우에는 이제는 각도기를 쓰지 않아도 높이와 거리를 고려해서 쏘는데도 정확도가 엄청났다.

십 년 가까이 여러 전쟁에서 수천 회가 넘게 화포를 쏘다 보니 가능한 일이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컸다.

화포로 인한 사고가 적다는 뜻이다.

과거처럼 쏘는 과정 중에 화포가 터져서 병사들이 몰살당하는 일은 적어졌다.

아예 그런 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으나 내부적으로 여러 요령이 쌓인 탓에 터지기 전에 새로운 화포로 교체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소모는 늘어났지만,

숙련된 병사들이 화포보다 소중했다.

화포 제작에 들어가는 자원은 기존까지 대주국을 통해 많이 들여왔었으나 지금은 요서부터 부여까지 북부 지역에서 채광하는 양이 많아진 덕분이기도 했다.

“북문으로 화살을 날라주실 분은 저를 따라오세요.”

“수성 중인 병사들의 식사 준비를 도와주실 분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자자! 다들 힘냅시다.”

부여성의 백성들도 손 놓고 있진 않았다.

그들 중에는 원래부터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던 여진족과 몽골족이 섞여 있으나 대부분이 고려에서 이주한 이들이었다.

심지어 손을 거들고 있는 이들 중의 일부는 랑카와 마두라이에서 일을 하러 온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크지 않았다.

어렵게 일군 자신의 땅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전부였다. 고려는 과거와 달리 부정부패가 눈에 띄게 사라졌다.

거기에 세금도 정해진 대로만 받아 갔다.

기존처럼 막무가내로 뜯어가는 부패한 관리는 얼마 못 가 패가망신을 했다.

한마디로 살기 좋아진 것이다.

그걸 잃어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 탓인지 백성들은 수성을 하는 병사를 도와서 혼신의 힘을 다했다.

더구나 부여와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후예라 여기는 이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장군! 이대로는 얼마 못 버팁니다.”

“지금이라도 저희가 성문 밖으로 나가서 저들의 후방을 공략하겠습니다.”

이원계와 조인벽은 자신들이 이끄는 별초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 그들은 수성에 거의 도움이 안 되고 있었다. 최영이 끝까지 그들을 성벽에 올려놓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대들은 더 중요한 임무가 주어질 테니 자중하고 기다리고 있으시오.”

최영은 단호하게 다시 거절했다.

아무리 야음을 틈타서 그들을 내보낸다고 하더라도 포위된 상태라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더구나 기마 전력은 저들이 훨씬 더 강한 상황이다.

요왕의 기마병은 경기병이 주를 이뤘으나 그중에는 중무장을 한 중기병도 있었다.

그들과 정면으로 붙어서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기에 애초에 최영은 성밖에서 저들을 상대하지 않은 것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수성을 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 많았다.

더구나 기마병은 최대한 아껴야 했다.

두 장군이 이끄는 서별초와 동별초가 지금 허물어지면 고려가 보유한 기마병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초반에 정찰대의 절반 가까이 잃었기에 더는 의미 없는 피해를 볼 수 없었다.

“밖의 상황은 어떻게 되고 있소?”

최영은 두 혈기 왕성한 장군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옆에 있는 이에게 물었다.

그는 달영과 말석이 소속된 정찰대와 합류해서 부여성의 성문이 닫히기 전에 간신히 들어온 감찰 어사 한방신이었다.

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감찰사 소속의 정보원과 연결점이 부여성에 없는 탓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와야 했다.

그 덕분에 최영은 생각보다 자세하게 현재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아리크타이가 이끌고 온 병력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어제저녁에 붉은 화염이 서쪽 능선에서 한 차례 쏘아 올려졌으니 머지않아서 안우 장군과 원군이 도달할 것입니다.”

“곧이라면 언제쯤을 말하는 것이오?”

“제법 긴 행군이라 근방에 도달하면 일단은 휴식부터 할 텐데 그걸 고려하면 길어야 이틀 이내일 것입니다.”

요양성에서 부여성까지.

대략 천 리에 달하는 거리다.

무기와 보급품을 들고 보름도 안 되는 사이에 그 거리를 돌파하는 것은 아무리 고려군이라도 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휴식도 없이 곧장 전장에 투입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최영은 마음이 급했다.

아무리 튼튼한 성벽을 가지고 있더라도 성문이 뚫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고려의 성문은 나무 재질이지만, 격자로 철심을 덧대어 만든 덕분에 상당히 튼튼하고 육중했다.

그러나 거의 보름 가까이 계속 공격을 당하니 보니 언제 허물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심지어 남문은 뚫리기 직전의 상황까지 생겼던 탓에 아예 벽돌을 쌓고 콘크리트를 발라서 아예 막아놨을 정도였다.

이렇게 며칠 더 지나면 모든 성문을 틀어막고 부여성 안에서 고사하게 생겼다.

우와아아아아!

그때 우렁찬 함성이 들렸다.

무려 십오만 명이 넘는 이들이 소리치니 땅이 울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건 곧 다시 본격적인 공성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 최영을 비롯한 모든 장수는 곧장 성벽 위로 올라갔다.

확실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아리크타이의 병력 전체가 부여성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기존에는 여유를 두고 교대하며 공성을 했으나 오늘만큼은 어떻게든 부여성을 함락시킬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돌격하라!”

“절대 돌아서지 마라. 등을 돌리거나 머뭇거리며 발걸음을 멈추는 이들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오늘 중에 부여성을 무너뜨리면 저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죽이고 약탈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졌으니 앞만 보고 달려라.”

성난 파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전장에서 오랜 시간 보낸 병사들조차 얼어붙을 정도였다. 이걸 과연 막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걸 그냥 지켜보고 있을 고려군이 아니었다.

성벽에 올라 있던 무관들과 장수들은 최선을 다해 사기를 끌어 올렸다.

조금만 더 버티면 안우 장군이 온다며 애를 썼으나 그런 노력은 빛이 바랬다.

진짜 끝장을 보려는 것 같았다.

화포와 화승총 그리고 화살에 의해 많은 이들이 죽었으나 요왕의 병사들은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피가 고이고 시체가 쌓인 땅을 딛고 넘어와서 악착같이 성벽과 성문을 공략했다.

“조금만 더 공격하면 된다. 함락이 코앞까지 왔으니 다들 있는 힘껏 싸워라!”

요왕의 장수들도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병사들 앞에서 사기를 북돋아 주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진 가까이 접전을 펼치자 성문은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옷치긴 왕국의 병사 중의 일부는 성벽 위로 올라와서 고려군과 칼을 맞대고 있을 정도로 상황이 위태로워졌다.

어쩔 수 없이 최영을 비롯한 장수들까지 칼을 뽑고 싸우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그쯤되자 밖에서 공성전의 상황을 지켜보던 아라크타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지긋지긋하던 부여성이 함락되기 직전이엇다.

김삼선이 한 말에 의하면 이곳만 허물면 그 너머에 있는 두만강까지 무주공산이기 때문이었다. 이 기세를 몰아서 요동까지 밀어붙일 생각이나 삼강평원만 가져와도 지금의 피해를 고려해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섣부른 망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부여성을 주변에서 다양한 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와 함께 우렁찬 함성을 지르며 동서남북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고려군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병력이 부여성을 향해 달려왔다.

“설마···! 지원군이 벌써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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