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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73화 (173/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3

정확한 숫자가 파악되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옷치긴 왕국이 보낸 병사의 수는 많았다. 적어도 십오만 명에서 이십만 명이 넘는다고 예측될 정도였다.

오차 범위가 상당히 큰 편이나 워낙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에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부여성이 감당할 숫자는 아니었다.

크게 보면 고려에서 보유한 전체 병력과 거의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그것도 대마도 등에 있는 해군을 합쳐서 그 정도였다.

모든 병력을 다 불러야 수적인 열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시간적인 문제도 있었다.

지금 당장 모아도 가장 멀리 있는 곳에서는 달포 이상 걸릴 것이 분명했다.

부여성에 있는 병력은 5만 명.

어떻게든 그들을 데리고 아리크타이가 이끄는 병력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요동에서 안우 장군이 오면 얼추 십만 명이 넘어갈 테니 싸울 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진 정벌을 마친 뒤에 부여성의 축성을 진행했다는 것이다.

아직은 미완성 상태였지만,

성벽의 기능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하지만 고려군은 절망하지는 않았다.

부여성을 책임지고 있는 장군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영 장군이기 때문이다.

함경도에 있던 2군 사령부가 최북단에 있는 부여성으로 이동한 덕분이다.

최영의 존재감은 확실히 대단했다.

고려가 치른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고 있는 여러 장군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최영은 많은 이들의 신뢰를 받고 있었다.

올해 지천명(知天命)이 된 최영은 이제는 은퇴한 이방실을 비롯해 요동을 지키는 안우와 함께 고려군의 정신적 지주였다.

“옷치긴 왕국의 병력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소. 기존에 감찰사에서 말했던 전체 병력과 비슷한 수준이지 않소.”

최영은 그게 가장 이해가 안 되었다.

기존에 보고 받은 바에 의하면 옷치긴 왕국이 보유한 전체 병력이 십오만 명에서 이십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기면 아무리 많아야 십이만 명 내외라 추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옷치긴 왕국이 보유한 모든 전력이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후방을 위협할만한 존재가 없다고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임박이 했다.

“정찰대에서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그들 중의 일부는 여진족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감찰사에서 부여 지역을 담당하는 그는 최근에 들어온 정보를 최영에게 설명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아리크타이 병력에 섞여 있는 여진족은 송화강 너머로 도망쳤던 김삼선과 그의 부족이었다.

과거에 아리크타이를 찾아왔던 김삼선.

그리고 그의 부족은 여진족 상당수를 이끌고 아리크타이와 함께하기로 했다.

여진족의 터전을 빼앗긴 원한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그들에게 약속한 것은 한 가지였다.

감찰사가 얻어낸 정보에 의하면 기존에 김삼선과 여진족이 살던 두만강 일대의 땅을 일부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었다.

그걸 들은 최영은 혀를 찼다.

“그놈들을 놓치면 안 되는 것이었어.”

“당시 상황이 어쩔 수 없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들 외에도 왕자의 난에 줄을 잘못 섰던 부족들이 대거 징집됐습니다.”

“이번 기회에 정리할 셈이로군.”

“현재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정보를 보면 그러한 것 같습니다.”

만주의 정보망이 박살 났지만,

왕궁에 한정된 것이고 민간 영역에 깔아 놓은 것은 여전히 건재한 편이었다.

어쨌든 그런 여러 이유가 겹친 덕분에 생각 이상으로 많은 병력이 되었으나 따지고 보면 속 빈 강정에 가까웠다.

옷치긴의 기마병은 확실히 대단하지만, 나머지는 갑자기 징집된 이들에 불과했다.

고려처럼 수년간 훈련받은 정병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그와 별개로 옷치긴 왕가는 고려도 겪은 문제를 해결 못 했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경험이다.

칭기즈칸의 정복 전쟁이 끝난 뒤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만주를 차지한 것이 벌써 백여 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에 만주에 자리 잡은 옷치긴 왕가는 전쟁을 치른 경험이 전혀 없었다.

부족 간의 다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규모가 수백에서 수천 명 단위였다.

지금처럼 십만 명이 넘는 대규모 전장을 경험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경험의 차이는 생각보다 상당히 컸다.

그들이 감찰사의 예상보다 늦게 국경을 넘어온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어떻게든 저들의 진군 속도를 늦춰야 하는데 좋은 책략이 있다면 주저 말고 말해보시오.”

“지금이라도 정찰대를 보내주시면 최대한 저들의 발걸음을 붙잡겠습니다.”

“정찰대는 이미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는데 괜찮겠소?”

출전을 갈망하는 정개를 보며 최영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며 되물었다.

지금까지 정찰을 하러 나섰던 병사들 상당수가 옷치긴의 기마병에 쫓기다가 잡히거나 죽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과거에 홍건적에게 쓰던 방식은 옷치긴 왕국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고 있었다.

은밀하게 다가서서 화승총을 쏜 후에 거리를 벌리며 싸우던 방식은 한두 번은 먹혔으나 그 이후로는 소용없었다.

유목민의 기상을 잊은 원나라보다 옷치긴 왕가가 훨씬 더 칭기즈칸의 후예다웠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말 위에서 자라난 탓에 고려군보다 더 마상 전투에 능했다.

같은 수준의 말을 타면 당연히 그들이 훨씬 더 빠르기에 정찰대가 따라잡혔다.

더구나 그들은 사람보다 말이 많았다.

여분으로 끌고 다니는 말의 숫자가 고려보다 훨씬 많았다. 어느 정도 추수를 해놔서 망정이지 일 년 내내 농사지은 것을 모두 옷치긴의 말이 뜯어 먹을 뻔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정개는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은 하루라도 더 시간을 벌어놔야 하는 상황이었다.

최영도 그걸 잘 알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부여성에는 동별초도 있었지만, 그들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써야 하기에 아껴야 했다. 평원에서 정면으로 맞서봤자 손해를 보는 것은 이쪽이 될 것이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오.”

*

최영의 당부와 달리.

정찰대의 전투는 치열했다.

그들은 최대한 기습의 묘미를 살렸다.

밤낮없이 습격하는 터라 아리크타이의 진격 속도는 다소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희생도 따르고 있었다.

“제길··· 이번에는 몇 명이나 죽은 거야?”

“조 하사님까지 포함해서 네 명이나 당했어.”

“이러다가 다 죽는 거 아니야?”

“정찰대가 개죽음당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인가. 유서를 괜히 써놓는 게 아니잖아.”

정찰대의 사기는 점차 떨어졌다.

작전을 거듭할수록 희생도 많아졌다.

매번 이중삼중으로 함정을 파놓고 적군의 기마병을 잡고 있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죽거나 다치는 이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정찰대의 피해보다는 쌓아 올린 전공이 훨씬 더 많은 편이었다.

그들은 적의 기마병과 정면으로 싸우는 것보다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 놓고 유도하며 싸우고 있었다.

예를 들면 좁은 산길로 뛰어든 후.

그들이 뒤쫓아오면 쇠사슬을 걸어 말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방식도 있었다.

그런 뒤에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마무리를 했는데 지금까지는 가장 좋은 효율을 보이고 있었다.

“반 시진 휴식 후에 다시 움직인다.”

그때 가장 앞장서서 달리던 달영이 말을 멈추며 휴식을 지시했다. 그들이 멈춘 곳은 부여성 인근의 마을 뒷산이었다.

그런 뒤에 절반 이하로 줄어든 병사들의 상태를 천천히 살펴봤다. 아무래도 더는 작전을 진행하기 어려워 보였다.

인정하기 싫으나 한계에 도달했다.

보유한 화살과 화약도 거의 떨어졌다.

다시 싸우려면 적어도 보급을 받아야 했고 어느덧 아리크타이가 이끄는 병사는 부여성 코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자칫 때를 놓치면 성안으로 들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달영은 이제 그만 복귀하기로 결심했다. 나름 최선을 다해서 버텼으니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보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 가지 있었다.

“말석이는 아직인가?”

“살아 있다면 이쪽으로 올 테니 조금 더 기다려보시죠.”

“일각만 더 기다려보고 돌아오지 않으면 곧장 부여성으로 복귀한다.”

가능하면 오래 기다려주고 싶었지만,

그 이상은 이곳에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잠시 쉬고 있는 이곳은 수풀로 뒤덮인 꽤 은밀한 장소였지만, 언제 뒤쫓아오던 적군의 기마병이 들이닥칠지 모른다.

제대로 훈련조차 받지 못한 그가 아직 살아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을힘을 다하더니 하필 이번 습격에 낙오되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낙마를 하던 모습이라 기대되진 않았다.

전장에서 말에서 떨어지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스럭···.

그때 인기척이 났다.

그걸 들은 달영은 물론이고 병사들은 곧장 칼부터 뽑아 들고 경계를 했다.

잠시 후에 나타난 것은 말석이었다.

그를 본 달영은 크게 기뻐하며 다가서려 했지만, 그 혼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석의 뒤로 옷치긴 병사 몇 명이 거의 동시에 나타났고 그걸 본 달영은 크게 노했다.

“망할! 집결지를 누설한 것이냐.”

동료를 팔아먹은 것이다.

하지만 말석은 그런 게 아니라며 절뚝이는 걸음으로 필사적으로 걸어왔다.

낙마를 하는 과정 중에 다친 것 같았다.

달영이 그를 베려고 하자 옷치긴의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생각지도 못한 유창한 고려말로 그를 만류했다.

“오해이니 그만두게. 나는 옷치긴의 병사가 아니라 고려의 감찰 어사일세.”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못 믿겠다면 나를 포박해도 되니 어서 빨리 부여성으로 가야 하네.”

그는 자신의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믿지 못한다면 묶어도 좋다는 의사 표시였다. 그걸 본 달여는 살아남은 병사 중에 가장 고참인 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혹시라도 포위당한 건지 살펴야 했다.

그가 병사 두 명을 데리고 살피고 돌아왔으나 아무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달영은 긴장을 풀었다.

스무 명 남짓한 병사들이 있는 반면에 자신이 감찰 어사라 주장하는 이는 겨우 네 명의 병사만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들 한 가닥 할 것 같은 인상이라 달영은 서둘러 그들을 포박했다.

“지금쯤 나를 잡기 위해 기마병을 보내 성문을 막으려고 할 테니 서두르게.”

“그렇게 대단하신 분이 왜 옷치긴 병사의 옷을 입고 다니시는 겁니까?”

“감찰사의 일은 알아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중사 계급쯤이면 잘 알 텐데.”

그는 나지막하게 경고를 했다.

그쯤 되자 달영은 더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심문할 이유도 없고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다. 방금 그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서둘러야 했다.

“최대한 빨리 부여성으로 복귀한다.”

달영의 지시를 받은 정찰대는 곧장 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닌 여분의 말에는 포박된 이들이 탔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자 달영은 스스로 감찰 어사라 밝힌 이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뒤로 수많은 기마병이 달려왔다.

추격대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수였는데 부여성을 포위하기 위한 배치 같았다.

그리고 얼마 뒤에 그들은 간신히 성문이 닫히기 전에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성문을 닫아라! 지금부터는 개미 한 마리라도 이곳을 통과하지 못한다.”

“사정거리에 들어오더라도 지시를 내리기 전까지는 절대 발포하지 마라.”

이제 더는 누구도 부여성 밖으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건곤일척의 승부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껏 싸운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려는 언제나 원하는 시기에 준비를 철저히 마친 상태에서 상대와 싸웠다.

폐하께서 내리신 명령에 따라 싸우면 지는 일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상황이 달랐다.

적의 기습에 의해 전쟁이 시작됐다.

그나마 언젠가 요왕을 상대로 싸울 거라 예상은 했었기에 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던 것은 아니었다.

만주를 다스리는 요왕과의 싸움은 무척 중요했다. 원나라가 쇠퇴한 터라 향후 동북아의 패권을 정하는 전쟁이다.

만약에 그들만 고려의 발밑에 둘 수 있다면 고려를 막아설 수 있는 곳은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최영은 성문 위로 올라가 어느덧 성을 포위하고 있는 아리크타이의 병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진짜 시작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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