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2
요서 지역의 부신성(阜新城).
그곳은 한때 요서에서 가장 번화한 성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고려가 그곳을 차지한 이후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오히려 부신성은 점점 쇠락 중이었다.
다른 고려의 도시 대부분이 눈부시게 발전하는 것을 생각하면 의아한 일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부신성은 고려의 군사 요충지였다.
도시의 기능은 오히려 줄이고 있었다.
대대로 그곳에 살던 이들 중의 대부분은 심양성 너머의 요동으로 이주되었다.
전술적인 선택 때문이었다.
부신성은 지키는 용도가 아니었다.
정찰대의 본거지인 그곳은 외침이 생기면 언제든 성을 버리고 요동까지 물러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적의 행군을 저지하며 시간을 버는 것이다.
애초에 요서 지역은 요동을 위한 완충 지대에 불과한 곳이었다.
그리고 화창한 어느 가을날.
부신성에 새롭게 무관 하나가 배정됐다.
중사 계급장을 달은 그는 부신성에 들어서자 감회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 지나가던 병사 상당수가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아는 척을 했다.
“하사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여기 달린 계급장 안 보이나.”
“엇! 드디어 중사로 진급하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자네도 하사가 된 것 축하하네.”
서로 덕담을 나누며 돌아선 중사의 정체는 얼마 전에 개성에 염병이 퍼질 당시에 움막촌에 갇혀 있었던 달영이었다.
추노꾼이던 그는 목숨을 걸고 혜민국의 의원 문봉을 도와 전염병을 퇴치한 공을 인정받아서 중사 계급을 받았다.
추노꾼 생활을 접고 2년여 만에 돌아온 부신성이지만, 다시 고향에 온 느낌이 들 정도로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추노 짓을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가능성이 있으나 경멸 어린 시선을 받는다.
그걸 생각하면 군대에 있는 것이 몸은 고단해도 마음은 훨씬 편했다.
더구나 정찰대는 또 다른 집이었다.
피와 땀을 흘리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장에 섰던 형제이자 가족이 있는 곳이 바로 이 부신성이었다. 그런 그의 뒤를 쫓아오던 병사가 있었는데 달영과 함께 발령받게 된 노비 말석이었다.
말석도 이번에 자유 신분을 얻었다.
하지만 5년간의 군 복무가 조건이었다.
그의 노비 문서를 태워주는 데 들어간 비용이 제법 컸기 때문이었다. 달영은 그런 그를 자신의 밑으로 데려왔다.
움막촌에서 지독하던 역병과 싸우며 두 사람 사이에 동지애가 싹 튼 탓이었다.
정찰대는 아무나 오지 못하지만,
평생 도움 되지 않던 주인 덕분이었다.
그가 모시던 이는 역참의 관리였다.
말석은 관노와 함께 대부분의 일을 도맡아서 했기에 능숙하게 말을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합격이었다.
정찰대는 항상 인력이 부족했다.
말을 탈 줄 아는 이는 한정적이다.
그런데 대부분 고된 정찰대보다 서별초 같은 곳으로 발령받기를 원했다.
그렇다고 새로 가르치자니 쉽게 배울 수 있는 기술이 아니라 들어가는 시간이 적지 않아서 인력 보충이 쉽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 병사 중에 중사님을 모르는 이들이 한 명도 없습니까?”
“정찰대 소속으로 이 성에서 함께 보낸 세월이 몇 년인데 당연한 일이지.”
“중사님을 따라 오길 다행입니다.”
“갓난이도 데리고 오지 그랬나.”
이번에 발령받으며 말석은 딸인 갓난이를 요양성에 아예 맡기고 왔다.
부녀 사이가 유독 애틋한 사이인 것을 잘 알기에 달영은 그들이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 안타까웠다.
“전쟁이 터지면 이곳은 버리고 전선을 요동으로 옮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원나라가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고려의 적이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한 번 정찰 나가면 며칠씩 있다가 온다고 하셨는데 어린아이 혼자만 놔두기도 애매하지 않습니까.”
말석의 말에 달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이유로 부신성에 있는 대부분의 고려군은 가족을 요동 지역에 뒀다.
상당수의 고려군이 자신의 주둔지에 가족과 같이 부임 된 것을 생각하면 이곳이 조금 독특한 곳이기는 했다.
“그나마 기숙사라 불리는 새로운 형태의 학당이 생겨서 다행입니다.”
“거기 비용이 적지 않다고 들었는데···.”
“다행히 부신성에 파견 가는 병사에게는 약간의 에누리를 해줘서 생각보다 저렴하게 아이를 맡길 수 있었습니다.”
정찰대의 병사들은 받는 녹봉이 다른 일반 병사에 비해서 조금 높은 편이다.
최전방에 배치되는 이유도 있었으나 정찰 중에 죽는 일이 생각보다 높은 탓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이를 학당에 맡기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조금 걷자,
그들이 배치된 병영의 막사가 나왔다.
고려군은 상사 계급이 되기 전까지는 병사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낸다.
그러나 달영은 칸막이가 쳐진 자신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하사 시절에는 생각도 못 하던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하사까지는 병사로 구분되고 중사부터 하급 무관으로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배속된 병사들과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에 짐을 풀려고 하자 당번병 하나가 달영을 찾아왔다.
“대장이 찾습니다.”
그가 말하는 대장은 정개였다.
과거에 요동 방어전과 요서 토벌에서 정찰대의 일원으로 공을 세운 그는 거듭 승진을 하며 정찰대의 대장이 되었다.
상당히 빠른 승진이었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성균관에서 군사학을 수석으로 수료하며 성공 가도를 밟던 이였다.
오히려 다들 그가 출세가 보장된 서별초나 동별초가 아닌 요서 지역의 정찰대에 지원한 건지 의문을 가졌다.
“대장이 왜? 신고는 내일로 예정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혹시 무슨 일인지 알면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귀뜸이라도 해줘.”
“잘 모르겠습니다.”
당번병은 뭔가 아는 눈치였지만,
입이 상당히 무거운 편인 것 같았다.
어차피 가보면 알게 될 일이라 달영은 짐보따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로부터 한 시진이 지난 뒤에 막사로 돌아온 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달영은 곧장 병사들부터 불러모았다.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다는 말에 추수를 위해 지원을 나선 이들까지 불러왔다.
앞으로 자신의 지시를 받아야 할 병사가 모두 모이자 그는 한차례 얼굴을 확인한 뒤에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다들 주목! 내일 동틀 무렵에 출정을 떠나야 하니 지금 당장 준비를 한다. 식량과 무기는 한 시진 후부터 보급을 시작한다고 하니 가서 수령하도록.”
“내일이요?”
“새로운 즉위한 요왕이 군대를 일으켜서 국경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전쟁에 병사들은 술렁였다.
여진 정벌을 마친 뒤에 모처럼 찾아온 평화로운 시기가 끝났다는 말이었다.
지금껏 고려는 최소 두어 해마다 한 번 이상의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다.
그나마 여진 정벌을 마친 뒤부터.
고려의 병사들은 조금 여유를 찾았다.
그런데 그 평화를 요왕이 깨뜨린 것이다.
병사들은 수많은 질문을 했지만, 달영이 해줄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그가 아는 것이라고는 옷치긴 왕가의 병력이 장춘에 집결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현재까지 확인된 병력이 최소 십만 명이 넘는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으나 그것을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어디로 가는 겁니까?”
말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지리적인 정보가 훤한 것은 아니나 옷치긴 왕국의 위치를 보면 요서 아니면 요동 그리고 부여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현재 그들이 있는 부신성을 놔두고 이동하는 것이라면 요서는 아니었다.
더구나 위치상으로 보면 요서는 그냥 지나치는 것이 그들에게는 훨씬 이득이다.
평양으로 진격하는 길목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빗나간 위치였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요동과 부여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가장 유력한 곳은 부여성이었다.
장춘과 인접한 그곳을 장악할 수 있다면 부여와 요동 지역 전체가 위험해진다.
부여성 너머 동쪽과 남쪽은 아직 대규모 공세를 막을만한 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 부여성으로 갈 가능성이 가장 크다. 우리는 최대한 서둘러서 부여성에 합류해야 한다.”
달영의 말에 말석은 그나마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다른 정찰대의 병사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아마 병사들 대부분의 가족이 요양성에 머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옷치긴 왕국의 병력이 훨씬 많기에 부여성에 있는 병력만으로 버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걸 알기에 달영이 닦달하기도 전에 병사들은 서둘러 출정을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왕좌왕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훈련이 이뤄져 있는 덕분이었다. 거기에 기존에 배치되어 있던 하사들도 한몫했다.
그들은 이미 여러 전쟁을 경험했기에 그리 긴장된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유서 새롭게 써야 하는 사람은 오늘 저녁까지 써서 가져오도록.”
“중간에 보급을 받으며 이동할 테니 짐은 최대한 가볍게 싸.”
“고참들은 신병도 챙겨줘.”
당연히 그중에는 적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었다.
달영과 함께 들어온 말석을 말하는 것이었다. 다른 병사들과 달리 그는 이런 상황을 생각지도 못한 터라 안색이 좋지 않았다. 말석에게 병사 하나가 다가서자 달영은 손짓을 하며 나섰다.
“이 친구는 내가 직접 챙길 테니 가서 다른 신병부터 챙겨.”
솔직히 말하면 조금 미안했다.
설마 전쟁이 터질 거라 예상치 못한 탓에 자신이 권유하여 이곳으로 온 것이다.
만약에 그게 아니었다면 후방 지역에서 신병 교육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 고려군은 절대 지지 않아.”
“설마 요양성도 위험해지진 않겠죠?”
“다른 성도 아니고 요양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바뀌었으니 걱정 말게.”
요양성은 수년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다.
최전방에 있는 이곳 부신성과 달리 그곳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성벽이 있다.
드높게 쌓아 올린 두꺼운 성벽과 심지어 해자까지 만든 그곳은 십만의 병력이 공격해도 버틸 수 있는 곳이었다.
말석도 그 웅장한 모습을 직접 보았기에 쉽게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
다음 날 해가 밝아올 무렵.
정개가 이끄는 정찰대는 요양성을 향해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부신성에 남은 이들은 이백여 명에 불과한 4개 조와 일반 병사 천여 명에 불과했다. 그렇게 서두른 덕분에 정찰대는 금방 요양성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멈추지는 않았다.
한 차례 보급을 받은 정찰대는 곧장 부여성을 향해 달렸다. 기동성 하나는 고려 최고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말을 바꿔가며 달린 덕분에 그들이 부여성 인근에 도달한 것은 옷치긴 왕국의 병사를 이끄는 아리크타이보다 빨랐다.
감찰사에서 병력이 집결할 무렵에 재빨리 정보를 보낸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국경을 넘어서 진군하기 시작한 터라 정개와 고려의 정찰대는 쉬지도 못하고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정개는 각 조를 이끄는 떠나는 중사와 상사 중에서 달영만 잠시 불렀다.
“수년 만에 복귀하자마자 출정이라니 참으로 애꿎은 일이지만, 중요한 일이니 한 치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되네.”
정개는 달영에게 주의를 줬다.
하지만 그리 걱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잠시 공백기가 있었으나 달영은 정찰대가 창설될 무렵부터 정개와 함께 모든 작전을 함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에 달영이 계속해서 승진하지 못 하는 것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신병은 오히려 작전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 부여성으로 전령으로 보낼 생각인데 어찌 생각하는가?”
“본인의 의지가 강하니 다른 이를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면천을 조건으로 군역을 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 그럴 리가 있나.”
“공을 세우면 기간을 줄여준다고 약조를 받은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정개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은 정찰조를 이끄는 달영의 몫이기 때문이었고 길게 이야기할 틈은 없었다.
달영은 그에게 경례를 올린 뒤에 곧장 자신에게 소속된 오십여 명에 달하는 병사를 이끌고 장우현 부근으로 향했다.
그가 받은 임무는 적군의 규모를 파악하는 것이다. 병력을 운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자 기본이었다.
규모와 이동 경로 정도는 알아야 대비할 수 있기에 그들의 진로를 막으며 시간을 끄는 것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다.
장우현의 작은 야산에 몸을 숨긴 그들은 얼마 후에 나타난 아리크타이와 그의 병사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껏 이렇게 커다란 규모의 병력은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십오만 명은 넘어갈 것 같은 수준이었다.
더구나 기마병이 너무 많았다.
적어도 고려의 몇 배쯤은 되어 보였다.
지금껏 그가 경험해본 전쟁과는 단위 자체가 달랐기에 달영은 침울한 표정으로 침을 뱉으며 육두문자를 입에 담았다.
“씨벌··· 더럽게 많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