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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71화 (171/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1

요왕이 사망한 직후.

만주는 커다란 혼란에 휩싸였다.

지금껏 후계자 발표를 하지 않고 있던 요왕 아자스리는 죽기 직전에 장남인 오르케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았다.

후계자 책봉 과정부터 문제가 많았다.

아자스리는 어린 나이부터 왕자끼리 경쟁을 시켰다.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갑자기 쓰러진 탓에 2년 가까이 왕자들 사이에서 온갖 암투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생긴 희생도 적지 않았다.

그게 1차 왕자의 난이었다.

다행히 아자스리는 다시 일어난 덕분에 중간에 멈췄으나 그때까지 쌓인 감정의 골은 무척이나 깊은 상태였다.

그런데 아자스리가 죽기 직전에 장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르케를 요왕의 후계자로 삼아 버렸다.

그 덕분에 ‘2차 왕자의 난’이 터졌다.

아자스리마저 사망한 터라 왕자들은 예전처럼 눈치 보면 물 밑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움직였다.

문제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한 그들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서로가 왕좌에 앉기 위해서 사력을 다했고 각자 만들어 놓은 세력이 있기에 내전에 가깝게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 왕좌에 앉은 것은 장남인 오르케였다. 적어도 그에게는 명분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가장 큰 변수가 있었다.

지금껏 어느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던 아자스리의 사위이자 옷치긴 왕가의 수호자인 아리크타이가 오르케 편에 섰다.

장춘에서 빠르게 군대를 몰고 온 그를 막을 수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반란을 일으킨 저들을 모두 참수하여 성문 위에 걸어 놓거라!”

오르케에게는 자비심조차 없었다.

자신에게 칼을 겨룬 배다른 형제들을 모두 처형해서 성문 위에 내걸며 잠재적인 정적에게 경고를 보냈다. 하지만 정작 다른 왕자의 밑에 있던 장수들에게는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들을 모두 다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된다면,

옷치긴 왕가의 세력은 대폭 줄어든다.

가뜩이나 북부로 올라오고 있는 고려의 성장세에 위기감을 느끼던 오르케였다.

현재는 그들이 가진 전력을 최대한 유지해야만 했다.

“즉위를 경축드리옵니다.”

거기까지 모든 일이 마무리된 뒤.

아리크타이는 왕궁을 차지한 오르케를 향해 축하의 인사를 했다. 하지만 내심 찜찜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원래부터 오르케의 편에 설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꿈꾸던 미래는 옷치긴 왕가의 영향력을 벗어나 자신만의 왕국을 장춘에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주변의 세력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확률이 높은 오르케의 편에 섰던 것이다.

장춘은 위치가 워낙 좋지 않았다.

서쪽으로는 원나라가 있었고 동쪽으로 여진족 그리고 남쪽과 북쪽에는 고려와 옷치긴 왕국이 있으니 둘러싸인 지점이다.

더구나 규모의 차이가 있기에 어느 곳과 싸워도 승리를 장담하긴 어려웠다.

“장군이 시기적절하게 병력을 이끌고 와준 덕분에 큰 피해 없이 반란을 잠재울 수 있었소.”

“소장이 한 것이라고는 전하께서 지금껏 쌓으신 공적을 잠시나마 뒷받침하는 것이 전부였사옵니다.”

“이 일은 잊지 않고 갚겠소.”

오르케의 그 말은 진심이었다.

처음부터 자신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아리크타이가 아니었다면 셋째에게 당할뻔한 위험한 순간이었다.

그 순간에 나타난 것이 아리크타이였고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했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옷치긴 왕국은 사분오열이 된 상황이다.

저마다 꿈꾸던 방향이 다른 이들을 데리고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 계속 놔둘 수는 없었다.

언젠가 반란의 깃발을 세울 이들이다.

오르케가 그 부분에 대해서 걱정이 가득하다며 말을 꺼내자 아리크타이는 한 가지의 제안을 했다.

“혼란스러운 내부가 아니라 잠시 밖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는 것도 방법이옵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공통의 적이 생기면 다들 협동하여 움직이는 것이 대대로 내려오는 초원의 전통 아니옵니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나 어디를 적으로 돌리겠다는 말이오?”

원나라는 아닐 것이다.

자신에게 왕위를 주며 선왕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신신당부한 것이 있었다.

절대 신의를 저버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백여 년 전에 천하를 제패했던 칸이 현재 그들이 머물고 있는 땅을 영토를 주었다.

원나라가 망할 것처럼 보여도 선왕은 오히려 은혜를 갚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렇다고 여진도 아닐 것이다.

그들은 고려에 의해 뿔뿔이 흩어졌다.

거점을 만들어서 사는 이들도 아니기에 공격을 하는 것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결국에 아리크타이가 말하는 곳이 어딘지 뻔한 것이었다.

“설마··· 고려를 치자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쉽지 않은 상대인 것을 잊으면 안 되오. 아무리 우리가 보유한 철갑 기마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적지 않은 피해가 있을 것이오.”

옷치긴의 주요 전력은 줄지 않았다.

수도에서 꽤 큰 싸움이 있었으나 단시간 이내에 끝냈기에 선왕 몰래 수도로 들어온 일부 병력만으로 싸움을 치를 수 있었다.

만약 조금 더 길어졌다면 지지부진한 내전의 형태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나마 가장 먼저 도착한 아리크타이의 병력 덕분에 큰 싸움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생각보다 사망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편이라 충분히 고려와 결전을 치를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명분이 아예 없지는 않사옵니다.”

고려와 옷치긴의 국경은 애매했다.

여진의 땅을 정리하며 고려는 은연중에 옷치긴의 영역을 제법 많이 건드렸다.

국경이라고 표지를 세운 것도 아니고 서로가 생각하는 국경도 다른 탓이다.

지금까지는 좋게 넘어가고 있었지만, 옷치긴에서 충분히 의의를 제기할만했다.

더구나 고려는 선왕인 아자스리의 독살 기도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상태였다.

왕자들끼리 온갖 암투가 벌어지다 보니 우연히 고려에서 잠입시킨 정보원의 꼬리가 여러 곳에서 잡힌 상태였다.

“그걸 이번에 공개하시옵소서.”

아리크타이는 모든 분노가 고려로 향하면 옷치긴 왕국이 가지고 있는 내부의 문제가 단숨에 해결될 수 있다고 봤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아직 고려가 독살 사건의 배후에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거짓도 진실이 된다.

충분히 백성의 뜨거운 공분을 살만한 이야기였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지지와 사랑을 받던 지도자였다. 처음에 쓰러졌을 때만 보더라도 백성들의 분노는 상당했다.

당시에 고려가 배후에 있었다는 것만 알았다면 아마 고려는 옷치긴이 자랑하는 기마대에 완전히 짓밟혔을 것이 분명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부분이 항상 아쉬웠다.

고려가 더 크기 전에 막았어야 했다.

과거에 장춘을 다스리던 나하추가 고려와의 결전에서 패배할 당시에 선왕께서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당시에 오르케는 요동 정벌을 주장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으나 동조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 결과 나하추의 10만이 넘는 병사를 격파한 고려의 성과에 지레 겁을 먹고 비어있는 장춘에서 멈춰야 했다.

만약에 그때 고려를 억제했다면 지금처럼 옷치긴을 위협할 정도의 세력이 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이제라도 고려의 성장세를 막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그는 곧장 아리크타이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게 하시오. 그리고 이번에 얻게 되는 영토 중의 일부는 아리크타이 장군의 자치령으로 줄 테니 심기일전하시오.”

어차피 오르케는 영토를 늘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제안이었다.

당연히 아리크타이는 그 제안을 곧장 받아들였다.

“소장에게 맡겨만 주시옵소서.”

*

한편 만주의 감찰사는 비상이 걸렸다.

장자인 오르케가 왕위에 오를 거라 예상했던 것은 맞췄으나 하루가 다르게 옷치긴 왕국의 상황은 달라지고 있었다.

매일 들어오는 정보는 엄청난 양이라 한방신과 현지에 나가 있는 감찰사의 관리들은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최근 그들은 원나라보다는 옷치긴 왕가를 더 유심히 살펴보는 중이었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게 되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행보는 선왕인 아자스리처럼 현상 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바람일 뿐이었다.

아자스리와 다르게 오르케는 호전적인 인물이라는 분석이 나왔고 머지않아 고려에 위협이 될 것이라 여겨졌다.

한동안 서류에 머리를 박고 정리를 하던 한방신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감찰사의 정보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들었다.

“이것 좀 보십시오.”

“도대체 뭘 보았길래 그러는 건가?”

“이와 같은 내용의 벽보가 곳곳에 붙여지고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무슨 내용인가 싶어서 읽어 보니 경악할 만한 글귀가 쓰여 있었다.

[수년 전에 선왕이셨던 아자스리의 독살을 사주했던 것은 고려의 왕이었다]

그건 감찰사의 역사상 최악의 실수였다.

직접 독살 지시를 내린 것은 아니었으나 정보원으로 잠입시킨 이가 저지른 것이라 아예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과거에 정보원이 저지른 실수가 이제 와서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벽보가 붙은 이후로 감찰사는 궁지에 몰린 쥐처럼 쫓겨 다녀야 했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도시 전체가 그들을 쫓는 기분이었다.

안전하다고 여겼던 곳도 이제는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다른 나라에서도 고려에 감찰사라는 관청이 있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의 정보망이 타국까지 닿아 있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걸 감지해낸 것 같았다.

벌써 십 년 가까이 활동했으니 꼬리가 잡히는 것은 시간 문제이기는 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책도 어느 정도 마련되어 있기는 했으나 정작 당하고 보니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왕궁 근처에 마련한 안전 가옥도 절반 가까이 기습을 당했고 왕궁 등에 심어 놓은 정보원 대다수가 잡혀 들어갔다.

“큰일입니다! 안가에 병사들이 들이닥쳐서 다들 잡혀가고 있습니다.”

“궁궐 내에 심어둔 정보원도 잡혔는지 어제부터 소식이 대부분 끊겼습니다.”

“제길! 십 년간 공들여서 만주에 만들어놨던 정보망이 순식간에 와해되고 있습니다.”

점조직으로 만들어진 정보망이다.

중간에 놓인 다리 하나가 끊기면 다시 연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실제로 정보원 중의 대부분은 자신이 고려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쯤 되니 고려가 만주에 심어 놓은 눈이 실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또 있었다.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병력이 장춘 방향으로 결집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에는 왕권을 쥔 오르케가 병력을 재배치하는 것인 줄 알았지만, 막상 움직임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옷치긴의 정예 병력이 움직였다.

그들이 움직이는 일은 지금껏 없었다.

수도에서 왕자들끼리 피를 흘리며 싸워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타국의 침입과 여진족의 도발을 막는 것만이 그들의 임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들이 갑자기 남쪽인 장춘을 향해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만 마리의 말을 이끌고 내려가는 수천 명에 달하는 기마병의 움직임은 만주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각지에 퍼져있던 기마병들도 모두 장춘으로 모이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저들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 것 같소?”

“당연히 고려이지 않겠습니까.”

장춘이라면 요동의 바로 위였다.

원나라를 공격할 거면 그곳이 아닌 더 서쪽에 위치한 도시에서 출발할 것이다.

누가 봐도 저들의 칼날은 요동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더구나 보급 부대도 구성됐다.

수많은 수레에 식량을 싣고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한방신은 그제야 그들이 고려와 싸우려고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전쟁을 준비하는 것이 아닌가! 서둘러서 이 소식을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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