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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70화 (170/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70

깊은 절망감이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두문동으로 들어오는 모습은 마치 시체가 걸어오는 것 같았다.

당장은 살아 있으나 지금까지 며칠 동안 환자들의 모습을 보니 저들 중의 대부분이 죽을 것이라 확신할 만큼 상황이 나빴다.

오늘만 하더라도 다섯 명이 죽었다.

두문동에 있던 환자의 수가 수십 명에 불과한 것을 생각하면 적은 수는 아니다.

그런데 거기에 수백 명에 달하는 이가 추가되었으니 며칠 뒤부터는 매일마다 수십 명의 시체를 치워야 할 것이다.

그쯤 되자 달영은 탈주를 마음먹었다.

이제는 도망 노비고 뭐고 일단 살아남고 봐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과연 가능할지는 의문이었다.

이 근방에 배치된 병사들은 쥐새끼 하나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그와 같은 생각을 하는 이가 없지는 않았다. 매일 밤마다 두문동을 벗어나기 위해서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대부분은 멀리 가지 못하고 잡혔다.

심지어 어제는 본보기로 삼겠다며 사람을 거의 반쯤 죽여서 다시 데리고 왔다.

“빌어먹을···.”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요동 방어전과 요서의 부신성(阜新城)을 공략할 때 어떻게든 전공을 세우고 죽었어야 했다.

당시에 공을 세웠으나 사망한 이들의 유가족에게는 20년 동안 먹고 살 걱정은 없을 정도로 많은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

적어도 아이들이 장성하고 남은 가족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개념이었다.

만약에 그랬다면 고향 땅에 계신 엄니라도 부유하진 않더라도 남은 생을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소?”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따라 오쇼.”

“뭘 하려고 하는 것이냐?”

“귀에 홍두깨라도 박아 놓은 것이오? 문봉 의원님께서 방금 들어온 환자들 분류부터 하라고 하시지 않았소.”

말석은 입을 가린 두건을 고쳐 쓰고 새롭게 온 이들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그의 뒷모습을 치켜보던 달영도 한 차례 고개를 저으며 잡생각을 떨쳐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 없다.

차라리 이곳에서 염병과 싸워서 이겨내는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가세!”

두 사람이 바삐 움직일 무렵.

두문동의 모든 의원을 통솔하는 문봉도 사색이 된 얼굴로 약재를 챙겼다.

이 정도 규모면 지금 이곳에 파견된 의원의 수로는 감당이 안 될 수준이었다.

조만간 평양 등의 다른 지역에서 의료 지원이 온다고 했지만, 사경을 헤매는 이들이 많기에 오늘내일이 고비였다.

더구나 저들이 의미하는 바가 컸다.

감염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는 의미다.

방역망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밀려들어 올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시작에 불과한 건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손끝이 떨려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는 십여 년 전에 흑사병으로 가족 전부를 잃었다.

다시 그런 일이 반복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성균관에서 의학을 배운 그였다.

“새로 들어온 약재를 정리하고 환자들이 머물 곳을 마련하지 않고 뭣들 하는 건가.”

“오늘 들어온 약재는 물론이고 환자를 돌볼 이들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조만간 보건 상서께서 개성으로 지원을 보내기로 했으니 걱정 말고 당장 시급한 일부터 처리하게.”

그의 지시를 받은 의원들은 다들 서둘러 각자의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개성 인근의 지방 의원 하나가 의문을 가졌다.

“그런데 정말 이걸로 되겠습니까?”

지금 그들이 하는 치료라고는 열을 내려주는 용도의 탕약 외에는 환자에게 물을 계속 마시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염병이 발병하면 수분을 잃게 되는데 그걸 어떻게든 보충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방 의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월경수 같은 것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고 전염되지 않으려고 석웅황(황금석)을 갈은 물을 콧구멍에 발랐다.

그걸 바르면 역병에 걸린 이들과 한 곳에 앉아도 전염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유난스럽다 느껴지진 않았다.

이곳에 자진해서 온 의원들 중에 감염되어 쓰러진 이들도 벌써 두 명이나 나왔을 정도였다. 언제 누가 전염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식으로 마음의 안정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만류할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효과가 있지 않았소.”

“하오나 기존에 쓰던 방법도 효과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폐하께서 보건 상서와 함께 마련한 대책이 소용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문봉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가능하면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럴 시간에 방금 들어온 환자를 살피는 것이 더 시급했다. 그쯤 되자 의문을 가졌던 의원은 뒤로 물러났다.

감히 폐하의 의중을 폄하할 이는 없었다.

그때부터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새로 들어온 이들의 옷을 태우고 보급 마차에 실려 온 옷으로 모두 갈아입혔다.

그 외에도 미지근한 물로 온몸을 닦아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세균이라는 것을 없애기 위한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이틀 정도가 지나자,

의원들은 대부분 지쳐서 쓰러졌다.

거의 잠도 못 자면서 환자를 살핀 탓이다.

이러다가 염병에 걸린 이들보다 문봉이 먼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달영과 말석이 옷자락을 잡고 만류할 정도였다.

“이러다가 정말 쓰러지실 겁니다.”

“나 혼자만 힘든 것이 아니네.”

“그래도 의원님이 또렷하게 정신을 차리고 계셔야 환자를 더 잘 보실 것 아닙니까. 위급한 환자가 있으면 부를 테니 일단은 잠시라도 쉬셔야 합니다.”

“맞습니다. 눈이라도 조금 붙이십쇼.”

달영과 말석은 모처럼 의견이 맞았다.

두 사람은 어렵사리 고집을 부리고 있는 문봉을 주저앉힐 수 있었다.

“그러면 한 시진만 쉴 테니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부르게.”

두 사람은 알겠다며 대답을 한 뒤.

서둘러서 문봉이 있는 방을 나와서 다른 이들에게 주의를 줬다.

“의원님이 나흘 만에 눈을 붙이는 거니 다들 조용히 하게. 불필요한 일로 깨우면 가만두지 않겠소.”

“이보게들 다들 나와보시게!”

“저 망할 놈이.”

달영은 싸리문 밖에서 호들갑을 떠는 의원을 보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의 눈으로 보면 진짜 의원이 맞나 의심될 정도로 실력이 없는 자였다.

의술보다는 혓바닥이 더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문밖에 나선 달영은 왜 그렇게 그가 호들갑을 떨었는지 이해가 됐다.

뒤늦게 나온 말석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을 입구 방향에서 안으로 하얀 의복을 입은 의원들이 줄을 지어서 들어오고 있었다.

거의 백여 명에 달했다.

그 정도면 이 근방 백 리 내외의 모든 의원이 모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그중에는 여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요즘 부녀자 사이에 소문이 무성한 의녀들인 것으로 보였다.

“어··· 어르신! 문봉 어르신, 잠시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석은 서둘러 문봉을 불렀다.

조금 전에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했던 말은 이미 완전히 잊은 상태였다.

자리에 누울 틈도 없었던 터라 문봉도 소란스러움을 느끼고 곧장 문을 열고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그는 지원을 나온 수많은 의원들의 모습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그들을 이끌고 온 이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손을 마주 잡거나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감염이 될 가능성이 있기에 이곳에서는 접촉에 매우 민감했다.

“이제 오면 어찌하나!”

이번에 온 이들은 문봉과 함께 성균관의 의학을 동문수학한 이들이었다.

그 외에도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어야 할 제자들도 여럿 눈에 띄었다. 그들은 본 문봉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수고했네. 자네는 이제 좀 쉬고 있게나.”

*

평양과 개성의 의원들.

그들이 보여준 활약은 상당했다.

잠복기 때문에 초반에 개성 곳곳에서 환자가 나왔으나 효율적인 통제 덕분에 그 이상 늘어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그나마 장티푸스라 다행이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은 면역력이 꽤 강했다.

수분과 전해질을 계속 공급해주면 상당수가 스스로 회복해서 일어났다.

어쩌면 평소에 온갖 병과 세균에 노출되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사망자의 수도 생각보다 적었다.

모두 합치면 이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여러 마을에 나뉘어서 치료를 받았다.

그중에서 죽은 이들은 고작(?) 오백여 명에 불과했다. 평균 치사율을 생각하면 수백 명 정도는 더 살린 것이다.

상당히 기쁜 일이지만,

그보다 의학의 발전이 인상 깊었다.

지금까지 십여 년 동안 설주의 지휘하에 전염병에 대해 대비하고 의학 공부를 꾸준히 했던 것이 효과를 보인 것이다.

통계를 내본 적은 없으나 평균 수명도 대략 5년 정도는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실제로 마을을 돌아다녀도 나이가 지긋한 이들이 적지 않게 보이는 시대였다.

왜구가 쳐들어와서 죽임을 당하고 가뭄 때문에 굶어 죽는 이들이 사라진 영향도 컸으나 기본적인 의학의 발전 덕분이다.

적어도 이제는 비과학적인 미신에 기대어 병을 다스리려고 하는 이들은 줄었다.

“이번에 문봉이라는 성균관 출신의 의원이 큰 활약을 했다고 들었소.”

개성의 소식은 내게도 계속 전해졌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들린 이름이 문봉이었다. 제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왕자와 같은 이름이라 더 인상 깊었다.

“그가 올린 상소문이 있사온데 내용이 꽤 재미있사옵니다.”

“이리 가져와 보시오.”

설주를 향해 손을 뻗자,

신소봉이 그걸 가져와 펼쳐주었다.

그곳에는 그간 환자를 돌보며 보고 느낀 점에 대해서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도운 이들에 대한 포상을 부탁했다.

“말단 하사로 요동에서 십 년 가까이 근무하다가 제대한 추노꾼과 도망 노비라··· 꽤 묘한 조합이지 않소?”

“추노꾼은 서원현에서 도망친 노비를 잡으려고 들어갔다가 두문동에 갇힌 걸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 시작이 어찌 되었든 공을 세웠으니 이런 보상은 어떤 것 같소?”

나는 달영에게 중사 자리를 제안할 생각이었다. 다시 군대로 돌아오고 싶지 않다면 재물을 줘도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추노꾼 짓은 그만두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말석이라는 노비도 꽤 힘을 쓴다고 하니 입대하는 조건으로 면천 시켜주기로 했다.

모든 결론은 입대로 귀결됐다.

재입대는 모든 남자라면 끔찍하게 여길 만한 것이나 그걸 결정하는 몫은 달영에게 달려 있었다. 승진을 못 해서 그만둔 것이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나는 상소문을 가지고 온 설주에게 물었다.

“두 사람 모두 만족할 것 같소?”

“분명 그러할 것이옵니다. 하온데 말석이라는 노비에게 딸이 있사온데···.”

“당연히 딸도 면천시켜야 하지 않겠소.”

“그리 전하겠사옵니다.”

설주는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문봉에게 부탁받은 게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걸로 끝은 아니었다.

앞으로 어떤 질병이 언제 다시 생길지 모르기에 그에 대한 대비책을 논의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의원의 수가 더 필요했다.

혜민국이 들어선 도시는 손에 꼽힐 정도고 제대로 된 의원이 없는 곳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 정말 외전 곳에서는 대부분 약초꾼이 의원 노릇도 했다.

성균관의 의학 정원을 조금 더 늘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설주와 의논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신소봉이 들어왔다.

“감찰 상서 정도전이 급한 용무가 있다고 만춘전 앞에서 기다리고 있사옵니다.”

그와 약속된 바는 없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급한 용무 같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자 정도전은 설주를 흘깃 바라본 뒤에 곧장 부복했다.

그의 반응을 보니 설주는 안 내보내도 될 것 같았다. 그도 나름 상서 중의 하나이기에 자격이 충분하기는 했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다급하게 달려온 것이오?”

“요왕이 사망했다고 하옵니다.”

“그의 병환이 다시 깊어졌기에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것이 아니오?”

요왕은 어렵게 건강을 되찾았지만,

머지않아서 다시 쓰러져서 오늘내일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 때문에 최근에 요서와 요동 지방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지금껏 만주에서 크게 욕심내지 않고 현상 유지를 선택했던 요왕 아자스리였다.

하지만 그의 다음 세대도 같은 결정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왕자의 난을 보면 다들 호전적인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도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문제는 요왕의 자리를 잇게 된 왕자가 과거에 벌어졌던 독살 시도의 배후로 고려를 지목했다는 사실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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