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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69화 (16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69

전쟁과 반란.

극심한 기근과 역병.

이렇게 네 가지는 공통점이 있다.

나의 골머리를 썩게 만드는 문제라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구 성장의 발목을 잡는 악재라는 것이다.

현재 고려의 목표가 인구 증가인 것을 생각하면 가능한 피해야 하는 문제였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전체 인구를 생각하면 사망자의 수를 줄이든 것도 한 가지의 방법이다.

하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진 않았다.

기껏해야 지금의 의료 기술을 가지고 변화할 수 있는 것은 예방 수준이었다.

결정적인 치료제나 백신 같은 것은 만들 수도 없기에 크게 전염병이 한 번 돌거나 기근 때문에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한다.

인구의 변동 폭은 생각보다 컸다.

“어떤 병인지 확인이 되었소?”

개성에서 퍼지기 시작한 역병 소식은 평양에 있는 황궁에도 곧장 전해졌다.

나는 그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 보건부를 맡고 있는 설주와 영의정 유숙을 불렀다.

도당에 들어가서 이번 일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기 전에 그들의 의견이 어떤지 확인해야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꼭 필요했다.

전장에 나가서 같은 편끼리 서로의 등판을 향해 총질하진 말아야 한다.

더구나 최측근인 삼정승 정도는 설득을 끝내놔야 일의 진행이 수월해진다.

그것마저 불가능한 일이라면 아예 도당에 가지고 들어갈 만한 안건이 아니었다.

“배앓이를 심하게 하고 고열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면 아마도 염병[染疾]인 것 같사옵니다.”

이게 욕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원래는 장티푸스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도로로 연결된 개성과 평양을 오가는 전령이 계속 정보를 업데이트해주고 있으나 설주가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소신이 직접 개성에 가서 증상을 보면 조금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사옵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오.”

유숙이 그를 만류했다.

설주는 보건부의 수장이다.

전염병을 상대하는 최후의 보루다.

지휘관이 최전방에 나가서 직접 싸우다가 불상사라도 생기면 혼란만 더 커진다.

지금의 그는 개성이 아닌 고려 전체의 보건을 신경 써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염병이라··· 그나마 흑사병이 아니라 다행인가?’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아직 이 시대에는 항생제가 없다.

내가 알던 장티푸스와 달리 이 무렵의 장티푸스는 치사율이 낮은 편은 아니다.

네 명 중에 한두 명이 죽을 정도였다.

흑사병보단 생존율이 높으나 낮은 편이라 말하기도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민간요법이다.

내가 즉위하기 전까지 대대로 내려오던 여러 요법이 오히려 사람을 잡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이열치열이라며 고열에 시달리는 이에게 솜이불을 덮어주고 불을 때워서 땀을 빼게 만들기도 했다.

당연히 증상은 더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전염성 열병에 좋다는 이유로 암퇘지의 똥 한 되를 물에 담가서 하룻밤 재운 뒤에 찌꺼지를 걸러낸 뒤에 먹였다.

심지어 월경수라고 여자의 월경혈이 묻은 옷을 담근 물을 치료제처럼 쓰기도 했다.

“월경수 같은 엉뚱한 것들은 처방하지 않게 주의를 주시오.”

“당연히 성균관에서 의학을 배운 이들은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문제는 기존의 의원들이겠지.”

“그러하옵니다.”

고려 전역에 퍼져있는 기존의 의원들은 여전히 자신들만의 비법이라며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저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문제는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서서히 성균관에서 의학을 배운 이들이 주류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보건부의 초대 상서인 설주가 있었다.

어의 출신인 그가 성균관에서 의학을 가르치며 키워낸 이들의 수가 적지 않다.

성균관 출신의 의원은 병균이라는 개념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구나 어의라는 명실상부한 타이틀이 있기에 설주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의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 개성은 어떤 상황이오?”

나는 고개를 돌려 유숙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현재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보건 상서인 설주에게는 지역 봉쇄를 지시할 권리가 없기 때문에 그 문제는 영의정인 그와 다른 삼정승의 일이었다.

“활인서를 설치하여 진료를 보고 있으며 더는 전염병이 퍼지지 않게 개성의 만호부 병력이 봉쇄하고 있사옵니다. ”

“개성 전체를 봉쇄하는 것은 너무 심한 처사가 아니오?”

“혜민국에서 진원지로 파악한 움막촌 외에도 개성 내부에서도 전염된 이들이 발견되었기에 어쩔 수 없사옵니다.”

“이런···.”

지금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지만,

개성은 여전히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다.

과거에 수십만 명이 살던 때와 비교하면 많이 작아졌어도 아직 십만 명이 넘는 이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는 중이다.

수치만으로 보자면 고려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다.

더구나 평양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다. 봉쇄를 하지 않으면 평양에 감염자가 생기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최근의 평양은 거의 백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사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여기서 전염병이 퍼지기 시작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예 그들을 모두 같은 곳에 가둔 것은 아니었다.

감염자가 생긴 움막촌을 중심으로 3단계로 나눠서 구분을 해야 했다.

실제로 감염자가 있는 구역과 의심되는 구역 그리고 비감염자가 있는 구역으로 나눠야 내부에서 감염되는 일이 줄어든다.

결국에는 유숙의 처리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개성에 사는 이들이 사용할 생필품과 식량이 부족하지 않게 물자는 계속 공급할 예정이니 심려치 마시옵소서.”

“잘하였소.”

“그래도 기존에 전하께서 발간하신 여러 종류의 동화책 덕분에 위생 수준이 많이 발전되기는 했사옵니다.”

설주가 그쯤에서 말을 거들었다.

그가 말하는 동화책은 세균을 나쁜 기운으로 묘사해서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외출을 다녀온 후에 손을 씻고 식사 후에 양치하는 일은 조금씩 전파되고 있었다.

고려인들은 워낙 씻는 것을 좋아하는 이들이지만, 이 시대에 상수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매일 씻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집마다 우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에는 우물도 일종의 자산 같은 것이다. 괜히 동네마다 우물집이라고 불리는 집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의원들은 부족하지 않은 것이오?”

“개성 부근의 군의와 혜민국 의원들이 동원되었고 평양에서도 일부가 지원을 갔으니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이번에 성균관에서 의학을 배우는 학생들과 의녀들도 보냈다고 들었는데 그건 무슨 일이오?”

“현장을 직접 경험하고 싶다고 스스로 지원한 이들이 있사옵니다. 그들 중의 일부를 선발하여 어제 보냈사옵니다.”

목숨을 걸고 전염병과 싸우러 가는 것이기에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써서 양성한 보람이 있는 순간이었다.

전염병이란 것이 남녀를 가리지 않기에 의녀의 활약이 가장 기대가 되었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간호사는 아니다.

성균관의 의원들과 똑같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기에 생각보다 실력이 출중했다.

요즘은 가진도 가벼운 증상 같은 것들은 어의보다는 의녀에게 진료를 받을 정도로 신뢰가 깊었다.

확실히 유숙의 일 처리는 기민했다.

설주와 관리들이 분주하게 움직인 탓도 있지만, 그 이전에 미리 준비한 전염병 관련 프로토콜이 있는 덕분이었다.

내가 즉위한 이후에 전염병이 처음 도는 것도 아니고 이 시대에 유행하던 흑사병도 언제 고려에 퍼질지 모르기에 대비가 꼭 필요했다.

“더 퍼지기 전에 어떻게든 막으시오.”

*

궁궐에서 열심히 논의할 무렵.

개성 부근은 난장판이 되어갔다.

봉쇄된 지역을 빠져나가려는 자가 워낙 많은 탓이었다. 전염병이 도는 지역에 갇힌다는 것은 죽으라는 의미였다.

그중에는 신분이 높은 권문세족도 있었으나 아무리 그 위세가 등등해도 봉쇄된 문을 통과할 수는 없었다.

자칫 인근 지역까지 퍼질 가능성이 있기에 병사들은 철저하게 막아섰다.

개성은 완벽하게 봉쇄됐고 그중에서도 감염자가 생긴 두문동과 파지동 부근 일대는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현재 감염이 된 이들은 모두 그 마을에 모으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저 안에 있습니다. 제발 들어가서 병수발이라도 돕게 해주세요.”

“그럴 수는 없네! 자네까지 전염돼서 줄초상 치르고 싶나.”

“저 사람들은 그럼 도대체 뭡니까?”

입구에서 실랑이를 벌이던 이는 안으로 들어서는 몇 명의 사람을 가리켰다.

병사는 고개를 돌려 누굴 말하는 건지 흘낏 바라본 뒤에 대답을 해주었다.

“의원님과 그 밑에서 일하는 자들이네.”

그들은 이곳에서 퍼지고 있던 전염병을 처음으로 확인한 혜민원의 의원 문봉과 추노꾼 달영 그리고 노비 말석이었다.

애초에 연관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세 사람이였으나 손이 부족한 탓에 달영과 말석은 문봉을 돕고 있었다.

돕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염병이 잠잠해지질 때까지.

둘 다 이곳에서 나갈 수 없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린 일이기에 무섭지는 않으나 달영은 답답했다.

이러는 사이에도 시간을 흘러갈 것이고 그럴수록 노비를 잡기는 더 어려워진다.

반면에 도망 노비 말석은 자신의 딸을 위해서라도 이곳을 나갈 수 없었다.

어제도 그의 딸인 갓난이는 죽을 위기를 두어 차례나 넘겼을 정도였다.

만약에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고비를 넘기지 못했을 것이었다.

“걱정 마. 그래도 서서히 낫고 있잖아.”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고 하더니,

죽을 고비를 넘긴 말석의 딸은 서서히 증상이 완화되고 있는 중이었다.

달영의 위로를 받은 말석은 웃으며 고맙다고 말은 했으나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딸이 다 나으면 또 도망쳐야 했다.

우선 달영이라는 추노꾼의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지금은 조금 헐렁하게 보여도 돈에 관련된 것이라면 쉽게 물러서지 않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한편으로 달영도 고민이 많았다.

말석라는 도망 노비가 보여주고 있는 완력이 생각보다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만약에 군대에 몸을 담았으면 서달 장군 아래에서 꽤 이름을 날렸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힘은 이곳에서 환자를 나르며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온몸에 힘이 풀린 이들을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원래 살던 마을에서 장사 출신이라고 하더니 허풍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수고했다. 약품은 저기 내려놓거라.”

문봉이 그들에게 지시를 내린 뒤에 다시 환자를 보기 위해 들어서자 달영과 말석은 등에 지고 있던 지게를 내려놓았다.

그곳에는 보급받은 약재와 식량이 가득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직접 지게를 지고 옮겨야 했다.

하지만 그보다 힘든 일은 물을 길어 오는 것이었다. 치료 과정에서 얼마나 물을 많이 쓰는 건지 죽을 것 같았다.

혜민국에서 나온 의원들은 하루에 수백 번은 손을 씻는 것 같았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으로 따라 하고 있기는 했으나 번거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때 의원 중의 한 명이 그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봐, 여기 좀 와서 같이 들어줘.”

그의 발치에는 삐쩍 마른 남자 하나가 누워 있었다. 얼굴에 면포가 덮힌 걸로 봐서는 사망자가 한 명 더 늘은 것이다.

“쯧쯧··· 결국에는 죽은 겁니까?”

“어젯밤까지만 하더라도 멀쩡해서 털고 일어설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네.”

그들이 치우는 시신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접촉자로 분류된 이들도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초기 환자의 가족이었고 옆에서 병수발을 하던 이들이었다.

그나마 말석과 달영은 운이 좋은 건지 아직 증상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은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이가 갑자기 쓰러져서 며칠 이내에 죽는 일도 허다했다.

그때 뒤늦게 수레에 음식을 싣고 오던 이들이 도대체 뭘 본 건지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서 돌아오고 있었다.

“문봉 어르신! 큰일났습니다.”

그가 온 방향을 향해 다들 일어나 바라보자 곧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수백 명에 달하는 이들이 줄지어 마을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행렬을 본 달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생각보다 일이 너무 심각했기 때문이다.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 이곳에 들어온다는 의미는 한 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저들이 모두 전염된 이들이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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