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68
대탈주의 시대가 열렸다.
사라지는 노비가 곳곳에서 생기자,
자체적으로 도주하는 노비도 늘어났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었다.
당연히 노비를 거느린 이들은 집안 단속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그 덕분에 최근 들어 고려에서 누구보다 바쁜 것이 바로 추노꾼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는 사이지만,
정보를 교환하는 동업자이기도 했다.
대부분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나 종종 도주한 노비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습격할 때는 손을 잡는 경우도 있었다.
최근 고려에서 추노꾼으로 명성이 자자한 달영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추노꾼 몇 명과 함께 모처럼 주막을 찾았다.
“캬아! 역시 전국을 돌아다녀도 이 집만큼 맛난 탁주는 없다니까.”
“탁주는 부족하지 않게 있으니 매상이나 팍팍 올려주셔요.”
“그런데 요즘 평양의 주점에서도 여기 탁주랑 비슷한 술이 있던데···.”
“그건 또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호호. 그건 어떻게 아셨데요? 나주 상단에서 하도 팔아달라고 사정사정해서 요즘 술 빚느라 정신이 없어요.”
동오의 상단이 해양을 바탕으로 하는 곳이라면 나주 상단은 수레로 유통한다.
그들은 각지의 특산물을 사들여서 다른 내륙 지역에 공급하는 젖줄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이들보다 돈이 될만한 것을 잘 찾는다는 점에 있었다.
“역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혓바닥은 속일 수 없지.”
“조만간에 이 집 주모가 돈방석에 앉겠어. 지금부터라도 잘 보여야겠는걸.”
“늘그막에 팔자 좀 고쳐보게 그랬으면 소원이 없겠네요.”
“자자! 어서 한 잔 따라주시오.”
기분 좋게 술을 따르고 있는 그들을 보며 달영은 혀를 찼다. 들어오는 의뢰에 비해 노비를 잡아들이는 일은 오히려 줄었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생각은 대부분 비슷한 구석이 있기에 도망친 노비들은 꾸준히 뒤쫓다 보면 언젠가는 잡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뒤져도 정말 온데간데없이 모두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밥 벌어 먹고사는 일도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가뜩이나 노비를 잡는 추노꾼은 의롭지 못한 일을 한다며 배척당하기 일수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군대에 계속 남아있을 걸 그랬다며 후회될 정도였다.
달영은 십여 년 동안 하사에 머물다가 재작년에 제대했다. 오 년 가까이 중사 계급에 도전했는데 계속 미끄러진 탓이다.
비슷한 시기에 모병 된 동기 중의 일부는 상사까지 올라갔기에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
재능의 차이는 확실히 있었다.
열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하사는 선임 병사가 올라갈 수 있지만, 군관은 연차가 차면 올라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적어도 중사 이상부터는 군사학 수료와 함께 시험도 봐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매번 그는 거기서 떨어졌다.
‘대장을 따라서 연주로 갈 걸 그랬나···.’
달영은 윤송의 부하 중의 하나였다.
당시에 정찰대에서 같이 복무하던 이들 대부분은 대장을 따라서 연주로 갔다.
하지만 그는 홀어머니를 혼자 두고 도저히 그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시절에 배운 추적 기술은 오히려 추노꾼을 하며 꽃피워졌다.
“추노꾼이 혓바닥이 길면 뭐 하나, 그 정성으로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며 도주한 노비나 잡게.”
“누군 뭐 잡기 싫어 안 잡나. 요즘 들어 다들 어디로 사라진 건지 도무지 꼬리를 잡을 수 없어서 그렇지.”
“빌어먹을··· 이러다가 고려 십일도를 모두 돌아다니게 생겼네.”
“연주까지 갈 생각인가?”
“미쳤나. 배보다 배꼽이 더 크잖아.”
달영은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기본적으로 추노꾼의 보수는 성공한 이후에 받게 된다. 그 이전에는 자비로 해결해야 하는데 최대한 아껴야 했다.
더구나 연주까지 가는 배도 없었다.
현재 고려에서 연주까지 오가는 배는 오직 동오의 상단에서 보내는 보급선과 해군 소속의 배밖에 없었다.
“차라리 마빡에 나 노비요! 라고 낙인이라도 찍혀 있으면 얼마나 좋아.”
“아예 날로 먹을 생각인가?”
“자네들 평양에서 그 일 때문에 난리가 난 거 아직 못 들었는가.”
“무슨 일이 있었길래?”
추노꾼 중의 한 명은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평양에 사는 말단 관리 하나가 실제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
“그 횡포를 들켜서 관직에서 쫓겨났고 그의 자식들까지 앞으로 도당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폐하께서 엄청나게 진노하셨다고 하더군.”
좀처럼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폐하라면 충분히 그럴 분이라고 여겼다.
지금까지 여러 개혁을 이끌며 안 좋게 보는 이들도 분명히 있으나 힘없는 백성들 대부분은 하늘처럼 우러러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달영이 자네가 쫓는 이들의 용모파기를 다시 한번 보여주게나.”
“왜 그러는가?”
“얼마 전에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아서.”
“정말인가?”
달영은 곧장 품에서 용모파기가 그려진 종이 뭉치를 꺼냈다. 한두 장이 아니었기에 다른 추노꾼들은 꽤 놀랐다.
“도대체 의뢰를 몇 건이나 받은 건가?”
“자네들도 비슷하지 않은가. 10년 이내에 찾지 못하면 노비를 잃게 생겼는데 기다릴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긴 그렇지··· 여기 이 사람을 본 것 같네.”
추노꾼은 그중의 한 장을 짚었다.
서원현에서 의뢰받은 것인데 어린 딸을 데리고 서너 달 전에 사라진 이였다.
그때쯤은 노비들의 본격적인 이탈 현상이 벌어지기 전이라 달영이 받은 의뢰 중에 가장 오래된 의뢰였다.
“정말인가? 도대체 어디서 보았나?”
“에이~ 그냥 알려달라는 것은 아니겠지. 적어도 이 주둥이에 기름진 전이랑 탁주 한 사발 정도는 물려줘야 하지 않겠나.”
“잡고 난 뒤에 크게 쏘지. 요즘 허탕 치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달영은 쉽게 돈주머니를 열지 않았다.
이렇게 제보를 받아서 달려가도 막상 잡지 못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중이다.
선수금을 받는 것도 아니기에 오히려 요즘은 손해만 보는 상황이었다.
“췌···! 어쩔 수 없지. 개성에 가면 시전 남쪽에 있는 움막촌으로 가보게.”
“나중에 한턱 크게 쏘겠네. 다들 다음에 보자고.”
“설마 지금 가려고?”
이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지금 출발하면 노상에서 새벽이슬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밥 벌어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요즘 이 근처 고갯길에 산군(山君)이 자주 나타난다고 하니 조심하게.”
“에이, 달영이 정도면 오히려 호랑이를 때려잡을걸. 저 녀석이 지금은 추노 짓을 하고 먹고 살아도 예전에는···.”
달영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거에 고려군이었던 것은 대부분 아는 사실이고 자랑스러운 경력이나 지금은 추노나 하고 있기에 부끄러웠다.
그때 일행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이가 달영을 향해 소리쳤다.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가능하면 부여 근처로는 가지는 마.”
“거기는 왜요?”
“그쪽으로 노비를 찾으러 갔던 녀석들 대부분이 소식이 끊겼잖아.”
“설마 여진족 마을까지 기어들어 간 것은 아니겠죠?”
“그건 나도 모르지.”
여진족이 사는 마을은 그들만의 관습이 있기에 가능하면 기피하는 곳이었다.
그들이 고려의 백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야인에 가까운 관습을 유지했다.
요동 지역에서 근무했던 달영은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요동 너머에 발을 디딜 생각은 없습니다.”
*
그로부터 얼마 뒤.
달영은 개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당연히 여기까지 오는 길에도 도망치고 있는 노비를 추적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종종 의심되는 이들이 있기는 했으나 의뢰를 받은 것은 아니기에 눈감아 줬다.
괜히 먼저 나서서 잡을 이유가 없었다.
일은 일대로 하고 제대로 된 값도 못 받는 일이 허다했다. 이미 추노꾼이 잡아 온 노비에 큰돈을 쓸 이는 없기 때문이었다.
모처럼 다시 개성에 온 그는 감회에 젖은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예전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고려의 중심이었던 개경은 개성으로 격하된 후부터 몰락이 예정되어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북적거리던 시전은 텅 비어 있었고 오가는 이들도 별로 없었다.
장사를 하는 상점은 절반도 안 되었다.
대부분 파리만 날리고 있었는데 그나마 식자재를 파는 곳들만 사람이 있었다.
이게 모두 만월대에 계시던 폐하가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 생긴 일이다.
“겨우 십 년도 안 되었는데···.”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상은 했다.
개성에 사는 이들 대부분이 관리들이고 황궁에서 멀리 떨어질 수 없었다.
거기에 벽란도 이상으로 남포항이 발전된 터라 요즘은 무역선의 발길도 뚝 끊겼다.
그들이 떠나간 자리는 황량했다.
빈집은 곳곳에 넘쳐났고 먹고살 방법을 잃은 개성의 하층민들은 곳곳에 움막촌을 만들고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동안 개성을 둘러보던 그는 혀를 차며 도망 노비를 보았다던 시전 남쪽의 움막촌 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성문 밖을 나서자 보이는 풍경은 이곳이 과연 고려인지 의심하게 만들 정도였다.
수백 채에 달하는 움막 사이로 사람들은 한낮에도 널브러져 있었고 악취가 멀리서 느껴질 정도로 심각했다.
“도대체 여기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정찰병으로 근무하며 끈기 하나는 자신의 유일한 재능이라 여기던 그였지만, 이번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움막을 뒤질 수도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는 운이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달영은 코를 움켜쥔 채로 움막촌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쉽게 성과를 내진 못했다.
용모파기를 들이밀어도 가재는 게 편이라고 다들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도망 노비를 추노꾼에게 고발하는 일은 하층민 사이에서 배신처럼 여기는 풍토가 자리 잡고 있는 요즘이었다.
오히려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움막촌의 남자들이 자신이 추노꾼이란 것을 알고 위협을 가해왔다. 오히려 그들 대부분이 달영의 박투술에 당했지만, 다음에도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움막촌을 벗어나려던 그는 자신의 곁을 재빨리 지나치는 한 남자를 보고 멈춰 섰다.
“찾았다!”
용모파기를 빼 닮은 남자였다.
코 옆의 제법 큰 점이 특징이었다.
그걸 본 달영은 확신을 가지고 뒤를 쫓았는데 그는 허름한 움막으로 들어갔다.
슬쩍 거적을 들쳐서 안을 살피니 빛조차 들어서지 않는 그곳에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누워 있었다.
“갓난아. 이거 어서 마셔 봐.”
“케엑···켁!”
“이거 먹어야 살 수 있다니까. 그러니 다시 한 모금 마셔.”
남자는 꽤 절실해 보였다.
그만큼 아이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물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고열에 시달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더는 기다릴 수 없기에 달영은 움막 안으로 들어섰다.
“서원현의 최 씨 어르신 댁에서 도망친 노비 말석이가 맞느냐?”
“처음 듣는 이름이오.”
“여기 용모파기에 그려진 그림이 있는데도 발뺌을 할 생각인가? 시인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데리고 갈 것이네.”
“제발 부탁드립니다. 못 본 것으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제야 말석은 시인했다.
어차피 계속 아니라고 주장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 것이 추노꾼이다.
그는 눈물 콧물까지 흘리며 애원했으나 달영은 그를 그냥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안쓰러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끌고 갈 생각으로 몽둥이를 꺼내려던 순간에 아이가 바르르 떨었다.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을 들썩이는 모습을 본 말석은 곧장 기어가듯이 아이의 곁으로 다가섰다.
“절대 이대로는 못 갑니다. 이 상태로 나서면 제 딸은 오늘 밤도 못 넘길 겁니다.”
정말 힘들게 찾은 도망 노비다.
그가 받은 의뢰는 남자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도 모두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는 움막 밖에서 지켜보던 이들 중의 한 명을 불렀다.
“가서 의원을 불러오게.”
“쇳내가 가도 와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적어도 선수금은 조금 주셔야···.”
돈을 달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걸 받아서 자취를 감추면 찾을 수도 없는 곳이 이곳 움막촌이다. 워낙 복잡한 탓에 도망치면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도망 노비를 놔두고 직접 가기도 애매했다.
“그럴 필요 없소이다.”
그때 사람들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영이 그쪽을 바라보니 순백색의 옷을 입은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얼핏 봐도 의원들이 입는 의복이었다.
움막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였기에 달영은 앞으로 나섰다.
“누구시오?”
“요즘 이곳에서 비슷한 증세를 보이는 이들이 많다고 하여 나온 혜민국(惠民局)의 의원이니 잠시 비켜 보시오.”
“저 아이만 아픈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현재까지 개성 부근에서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이들이 십여 명이나 된다고 하니 어서 비키시오.”
그렇게 말한 뒤에 의원은 흰 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움막 안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달영과 아이의 아버지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서 지켜보았다.
안으로 들어선 의원은 침착하게 아이의 상태를 살펴보더니 잠시 후에 창백해진 안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런··· 다들 뒤로 물러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