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67화 (167/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67

삐거억···삐걱.

나무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돌쇠는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지금 그는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며칠째 건너고 있는 중이었다. 멀리 섬들이 보이기는 했으나 콩알만 한 수준이었다.

헤엄칠 수 있다고 닿을 거리는 아니라 배가 가라앉으면 그대로 수장당하게 생겼다.

하지만 차마 내색은 하지 못했다.

자신이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 안사람과 아이들까지 불안해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행선지도 알지 못하고 끌려가는 중이었다. 그때 옆집에서 노비 생활을 하던 막둥이 아재가 옆으로 다가왔다.

“도대체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 설마 왜국으로 끌려가는 거는 아니겠지.”

“글쎄요···.”

“출발할 때부터 느낌이 싸한 것이 납치당하는 기분이야.”

돌쇠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이 모두를 설득해서 데리고 왔다.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만 보더라도 아재가 하는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배에는 다른 마을 출신이라고 밝힌 이들까지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타고 있었다.

이러다가 배가 가라앉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이 될 정도로 빈틈없이 사람을 채워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 건지 알고 있는 이들은 없었다.

선원에게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조만간 도착한다고 하니 지켜보죠.”

“그저께도 같은 말을 했잖아.”

“그렇다고 여기서 뛰어내려서 고향까지 헤엄쳐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리고 날씨가 조금씩 서늘해지는 것이 북쪽으로 가는 것 같아요.”

확실히 왜국으로 가는 것 같진 않았다.

왜국은 남쪽에 있는 거로 알려져 있었고 지금 그들은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부여 근처로 가는 건지도 몰랐다.

고려는 해외의 노동자까지 고용해서 북부 개간에 온 힘을 쏟고 있으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배에 탄 이유는 한 가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은 돌쇠와 일행에게 한 가지의 약조를 해주었다.

십여 년만 고생하면 모든 가족을 면천시켜 주고 양인의 신분을 주겠다는 것이다.

소문으로 들었던 것과 똑같았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썼을 거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대부분의 노비들은 온갖 고생을 하는 터라 수명이 길지 않았다.

마흔만 넘어도 오래 살았다고 여겼다.

이미 그의 나이는 서른 가까이 되었기에 여기서 십여 년을 더하면 마흔이 넘는다.

그때 선원들이 뭘 본 건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상한 기색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드니 어느덧 육지가 가까이 보였다.

“도대체 여긴···.”

고향 땅과는 사뭇 다른 지형이었다.

하늘을 찌를 것 같은 높은 산이 곳곳에 보였고 평지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너무나 척박해 보이는 땅이었다.

심지어 바위 위에서 햇볕을 쬐고 있는 덩치가 커다란 이상한 생명체도 보였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돌쇠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동안.

배는 호수처럼 둥근 지형을 가진 육지 안쪽의 항구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고려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절반쯤 되었고 나머지 절반은 피부색이 다른 이들이었다.

한양 인근의 작은 마을 출신인 돌쇠와 노비들에게는 상당히 생소한 외모였다.

그런데 상당히 신기한 일이 있었다.

아직 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아이들은 대부분 고려 말을 능숙하게 하고 있었다.

“환영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허기지실 텐데 이거라도 드세요.”

“다 드신 이후에 저쪽에 있는 분에게 가서 어디 출신인지 이름을 적고 수결하시면 앞으로 머물 곳을 안내해드릴 거예요.”

그들의 손에 쥐어진 바구니에는 감자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방금 찐 것인지 김이 수북하게 솟아오르고 있었다.

아마 자신들이 타고 온 배보다 조금 더 먼저 도착한 배가 있었던 것 같았다.

진심으로 반겨주는 표정을 본 돌쇠는 경계심이 사르륵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그간 멀미 때문에 꽤 고생한 아이들은 이제야 식욕이 도는지 곧장 바구니로 달려가서 치열하게 먹기 시작했다.

노비로 살면서 생긴 본능이었다.

어떻게든 생존하려면 있을 때 먹어야 하니 식탐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다.

그걸 본 원주민 아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부족하진 않을 테니 천천히 먹어.”

돌쇠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한쪽이 콱 메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모처럼 받아보는 사람 대접이 낯설었다.

고향에서 그는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과 짐승의 중간쯤 되는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아직 제대로 살펴본 것은 아니었으나 눈칫밥을 30년이나 먹은 터라 대충 감이 올 때가 많았다. 돌쇠는 손에 쥔 감자가 뜨거운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원주민 아이에게 질문부터 해야 했다.

“그런데 이곳은 도대체 어딘가?”

그게 가장 궁금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온 것일까.

대충 어딘지 알 것 같았으나 확실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다른 이들도 돌쇠와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동시에 시선이 아이에게 쏠렸다.

다들 그 와중에도 감자를 씹고 있는 입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는 갑작스러운 이런 상황이 조금 당황스러울 만도 한데 꽤 자주 있는 일인지 침착한 목소리로 답을 해주었다.

“고려의 최북단인 연주입니다.”

*

연주로 떠나는 배는 한두 척이 아니었다.

현재 고려가 보유한 배들이 모두 동원된 탓에 매달 수십 척에 달하는 배가 노비를 가득 채워서 연주로 향하고 있었다.

그중에는 과거에 사용했던 탐사선과 부동항에 상주하고 있는 윤호의 4함대 소속의 쾌선도 일부 포함됐다.

강제 이주에 가까운 형태지만,

그래도 노비들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추노꾼이라고 하더라도 연주까지 쫓아갈 이는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대부분 삼강 평원 위주로 이주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돈에 혈안이 된 추노꾼의 집착은 상당한 편이었다.

그들은 의뢰를 받으면 가장 먼저 부여와 요동부터 들쑤시고 다녔다. 아무래도 가장 확률이 높은 곳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노비 중의 일부는 연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부여와 연주로 보내는 이들의 구분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양을 기준으로 남쪽 출신은 부여로 가고 북쪽은 연주로 보내는 중이다.

가능하면 고향에서 멀리 보내야 했다.

기간은 대략 십여 년을 보고 있었다.

그 정도면 어느 정도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꼼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한법(過限法) 때문이었다.

법의 일부를 뜯어고쳐서 노비에 대한 송사는 10년으로 기간을 대폭 줄여놨다.

소멸 시효가 지난 후에는 도망친 노비를 잡아도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게 한 것이다.

당연히 권문세족의 반발이 있었지만, 노비를 아예 없애겠다고 밀어붙이는 것에 비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당연히 그 이전에 노비가 있는 곳은 숨겨놔야 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연주의 안렴사인 왕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될 기회였다.

현재 연주는 사람이 가장 부족했다.

그들이 차지한 땅에 원래부터 살던 원주민을 백성으로 받아들였으나 그리 많은 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주민을 받고 싶어도 자진해서 가는 이들은 없었다. 현재 주민 대부분이 고려에서 차출해서 보낸 이들이다.

그런데 노동에 특화되어 있는 수만 명에 달하는 이들이 연주로 이주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처음에 개척단으로 왔던 이들 대부분이 7년 차를 맞이하며 향수병이 심해진 터라 상당히 문제가 많았었다.

이제 슬슬 고려로 돌아가야 하는 이들을 대신할 이들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다들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일부 군관은 그대로 연주에 남기를 택했다며 영의정인 유숙이 전해줬다.

“윤송과 사지경은 그대로 연주에 남기로 했단 말이오?”

“두 사람 모두 안렴사를 연주에 혼자 두고 올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탓인지 병사들 대부분은 그곳에 남고 장인들만 돌아오는 배에 태울 예정이라 하옵니다.”

왕수와 함께 떠났던 윤송과 사지경은 그대로 남기로 했다. 그들도 교대 대상이었으나 차마 왕수만 홀로 두고 올 수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현재 연주를 다스리는 왕수가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윤송은 조금 아쉬웠다.

그가 세웠던 공과 가능성을 생각하면 고려로 돌아와서 경험을 쌓길 바랐다.

이러다가 정휘처럼 아예 해외에서 말뚝을 박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억지로 빼앗아 오기도 애매했다.

“현재까지 이주를 마친 이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 것이오?”

“부여로 보낸 3만 명은 거의 끝났고 연주로 보내질 2만 명은 익월 중에 마무리될 예정이옵니다.”

“내년까지 예정되어 있는 20만 명의 노비를 모두 옮길 수 있을지 모르겠소.”

“겨울에는 연주로 향하는 배가 움직이기 어려우니 조금 더 여유롭게 보셔야 할 것 같사옵니다.”

북부의 개발이 더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연주 못지않게 부여도 겨울이 되면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는데 땅이 단단하게 얼면 개간을 하기 어려워진다.

당연히 유숙이 말한 대로 단숨에 해결된 문제가 아닌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나마 스스로 투탁(投託)해서 노비가 되는 이들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에 원래의 역사처럼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면 이 모든 일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노비를 없애도 계속해서 늘어난다면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노비의 절반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하고 10년쯤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외부로 노비를 돌리는 것만으로 가능하다고 여겨지진 않았다.

정도전이 제시한 방법 외에도 모든 수단이 동원해야만 했다.

가장 먼저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어 부당하게 노비가 된 이들을 풀어줬다.

그 자리는 잠시 쉬고 있던 이인복이 맡아서 감찰사와 함께 움직이니 상당히 높은 효율이 나왔다. 거기에 추가로 종부법(從父法)도 시행했다.

종부법은 결정적인 한 수였다.

그 법이 통과된 이후부터는 양인 이상의 신분을 가진 이가 아버지인 경우에는 부계에 따라 양인이 되기 때문이다.

보통 첩으로 들인 이들의 아이들이 많지 양인인 여인과 노비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만 가서 일을 보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내수 전수를 들라 하시오.”

나는 그쯤에서 곽충수를 불러들였다.

처음 보았을 때는 꽤 젊어 보이던 그는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조만간 쉰이 되고 손자까지 보았으니 장년이라 봐야 하나.

그를 볼 때마다 세월이 너무 빠르게 흐르고 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삼십 대 중반이 넘어선 탓일까.

고려에 오기 전에는 이십 대에 불과했던 나이기에 서른 이후는 처음 겪는 것이다.

어쨌든 잠시 후에 곽충수가 들어왔는데 이제 그는 내수사 그 자체라고 봐야 했다.

내가 즉위한 이후에 관리들의 자리를 옮기는 일이 대폭 줄었으나 적어도 5년 정도의 한번은 승진의 기회를 주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자리를 지키는 이가 있었는데 환관들을 제외하면 거의 유일한 이가 바로 곽충수였다.

워낙 큰돈을 만지는 자리였다.

현재의 내수사는 고려의 일 년 예산 절반 정도 되는 규모까지 커졌을 정도였다.

내 머리에서 나온 돈이 될만한 것들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치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요즘에는 천연고무를 활용한 지우개까지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중이었다.

기존에 팔던 연필이 널리 사용되고 있는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아라비아를 거쳐서 유럽까지 전해졌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릴 정도였다.

“지금껏 내수사의 재물로 사들인 노비의 수가 어느 정도인 것이오?”

“삼천 명까지는 수월했으나 최근에 도주하는 노비가 적지 않아 값이 상당히 많이 오른 상황이옵니다.”

“그렇게 많이 올랐소?”

“그 돈을 주고 노비를 살 바에는 차라리 품삯을 주고 일꾼을 고용하는 것이 더 속 편하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옵니다.”

바람직한 일이었다.

모든 노동에는 대가가 따른다.

그걸 깊게 인식 시켜 놔야 했다.

괜히 지금까지 노역에 동원되는 이들에게 따로 임금을 챙겨준 게 아니었다.

“지금껏 비축해 놓은 내수사의 재물을 다 쓰는 한이 있더라도 최대한 노비를 사들이시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