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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65화 (165/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65

얼마 뒤에 모의재판이 진행됐다.

하지만 이번 일을 주도한 전법사에서 재판이 열리진 않았다. 모의재판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의 수는 꽤 많았다.

생각보다 큰 변화이기에 그 자리에 참석하길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말로 백 번 듣는 것보다 실제 재판을 한 번 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인 이들만 수백 명이었다.

도당의 거의 모든 관리와 율형을 배우는 성균관 학생까지 포함된 숫자였다.

그 정도로 많은 이들을 대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은 원형 극장밖에 없었다.

내 곁에는 가진과 왕현도 함께 이번 모의재판을 보기 위해서 앉아 있었다.

“어떤 판결이 나올까요?”

가진은 그게 가장 궁금한 눈치였다.

모의재판이라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다뤄질 내용은 실제 사건이다.

대충 어느 쪽으로 기울지 예상되는 바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알고 있어도 알려줄 수는 없었다.

영화를 보기도 전에 스포일러를 들으면 그만큼 재미없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었다.

각지에 파견될 예정인 판사들이 내리는 판결 중에 옥에 가두는 징역형은 거의 나오지 않고 노역형이 많아질 것이다.

공짜로 밥을 먹여주는 것보다 일을 시키는 것이 훨씬 이득이기 때문이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소.”

“저는 유서에 적힌 내용 그대로 출가한 딸에게 재산과 가노 전부를 주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양쪽의 주장을 모두 들어본 이후에 판단을 내려도 늦지는 않소.”

사건의 내용은 무척 간단하지만,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재판 전에 양측의 이야기를 확인했는데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는 요소가 많았다.

너무 쉽게 결정이 나는 문제였다면 모의재판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번 재판은 매우 중요했다.

새로운 대법전과 시스템을 도입하기 전에 선보이는 무대였다. 지금까지 지방관이 수사부터 판결까지 맡았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복잡한 면도 없지 않았다. 왜 그래야 하는 건지 이해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가진 지방관.

그리고 그 내용을 가지고 판결하는 판사.

마지막으로 백성들의 억울함을 변호하게 될 변호사는 저마다의 역할이 있었다.

당연히 이 시대에 변호사라는 직업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것을 굳이 찾자면 조선 시대의 외자부랄까.

그 시대의 외자부는 일종의 브로커와 비슷했다. 글을 모르는 백성들의 소장을 작성해주고 돈을 받는 존재였다.

그게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돈을 받고 일하던 이들이나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면 그들의 편에 서서 도와줄 이들이 필요했다.

“준비되었으면 시작하시오.”

내 지시가 떨어지자 신안이 나섰다.

훗날 태어날 신립의 6대조인 그는 평양의 정5품 상판사로 제수되어 오늘 진행되는 모의재판에서 판결을 맡게 되었다.

상판사란 인근 지역의 판사들을 관리하는 자리로 판결 내리기 어려운 사례의 대부분이 그들에게 돌아갈 예정이었다.

“지난 병오년(1366년) 늦가을 무렵, 새동현에 사는 임석구가 올린 소지(所持)로 상속에 대한 분쟁이옵니다.”

사건의 내용은 복잡하지 않았다.

지난해 사망한 아비의 재산을 두고 남매가 다투는 중이다. 신안은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크게 읊어줬다.

임석구에게는 누이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 부친이 돌아가시며 재산의 대부분이 그녀에게 돌아갔다.

남긴 재산이 엄청나게 많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다섯 결의 경작지와 가노 세 명이 전부였다. 물론, 궁핍한 백성에게는 작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재산이기는 했다.

살짝 애매한 수준인 터라 벌써 감정 이입이 된 일부 관리는 혀를 찼다.

“겨우 그런 걸 가지고 우애를 저버리고 이 지경까지 오게 만들었단 말인가.”

“쯧쯧! 소인배 같으니.”

“비단옷을 차려입은 것만 봐도 배에 기름이 낀 것은 남동생쪽이 아닌가. 이건 논쟁을 펼칠 일도 아니네.”

“그래도 재산은 공평하게 나눠야죠. 이건 고인이 된 임석구의 부친이 잘못한 일입니다.”

저마다 생각하는 바가 달랐다.

누군가는 불필요한 쟁송(爭訟)이라 여겼고 어떤 이는 예전에 비슷한 일을 당한 경험이 있는지 남동생 편을 들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고려의 풍습대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재산이 분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들 자중하시오! 이번 기소를 받아들인 새동현의 감무는 앞으로 나와서 임석구가 주장하는 바를 전하시오.”

신안은 목소리를 크게 냈다.

수백 명이 웅성거리며 속닥거리니 원형 극장 가득 그 소리가 퍼졌기 때문이었다.

법정 안에서는 스스로 판사의 권위를 지켜야 한다고 미리 귀띔을 해줬기에 그는 살벌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 덕분에 조용해진 것까지는 좋았지만, 정작 새동현의 감무인 서기영은 긴장한 것인지 손까지 바들거리고 있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반응이기는 했다.

감무는 고작 정7품에 불과한 자리다.

이건 마치 온갖 별들이 다 모인 국방부에 불려 나온 소위와 같은 느낌일 것이다.

더구나 황제인 나도 지켜보고 있으니 떨리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나···남동생인 임석구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을 더듬거리며 시작했지만,

어느 정도 지나자 서기영은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열변을 토해냈다.

때로는 적절한 비유까지 들어가면서 설득을 하는데 많이 준비한 티가 났다.

목소리가 걸걸한 것도 아마 그 이유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누나 쪽의 반격도 매서웠다.

이번 재판에서 그녀의 변호를 맡은 것은 율형을 가르치는 성균관의 박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의 말은 논리적이고 막힘이 없었을뿐더러 결정적인 증거가 있었다.

그는 동네 주민을 증인으로 세워서 남동생이 도박에 빠져 집안의 재산을 완전히 거덜 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결정적인 한 방이 될 수 있는 증언이었다.

“지금까지 임석구가 거덜 낸 집안의 재물만 합쳐도 수십 결이나 됩니다. 그의 누이가 받은 것은 겨우 남은 재산 일부에 불과하니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모의재판이 열리는 원형 극장에는 임석구를 향한 야유가 크게 울렸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자제하지 못하고 도박에 빠졌다는 임석구를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노름판에 손대는 이들치고 손모가지가 남아 있는 이들은 없더이다. 쯧쯧!”

“역시 인상에서 주는 느낌은 무시할 수 없는 거야. 딱 봐도 허송세월하는 놈팽이 같은 느낌이 들잖아.”

“그런데 뭔가 느낌이 묘하지 않아?”

임석구는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하지만 정작 모의재판에 참석 중인 그의 표정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그를 대변하는 서기영 역시 표정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저희 측에서 준비한 증인을 이 자리에 세우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서기영은 소란이 잠잠해질 무렵.

자신이 준비한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이미 긴장하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에 완전히 몰두했는지 살짝 상기되어 있는 표정이었다.

실전에 강한 타입인 것 같았는데 일개 현의 감무로 놔두기 조금 아쉬웠다.

그의 이름을 잠시 저장하는 사이에 신안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여기부터가 하이라이트지.’

이 자리에서 서기영이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아는 이들은 몇 사람 안 되었다.

전체적인 그림을 짠 것은 정도전과 감찰사였는데 애초에 반전을 고려해서 여러 사건 중에 임석구의 사건을 골랐다.

섣불리 판결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슬쩍 임석구의 누이를 바라봤다.

그녀는 아직도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운한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쓴 가면은 깨져버렸다.

새롭게 조사관으로 임명된 이들이 곤죽이 되어 버린 한 남자를 끌고 왔기 때문이다.

“이자는 고인이 된 임석구의 아비가 쓴 유서를 사후에 조작한 자입니다.”

“살려만 주십시오!”

“저기에 앉아 있는 저년··· 아니 임석구의 누이가 사주한 것이 맞느냐?”

“확실히 저 사람이 맞습니다. 저화 한 뭉치를 가져와서 제게 똑같은 글씨로 내용만 다르게 써달라고 청탁하였습니다.”

남자는 묻지 않은 것까지 술술 불었다.

고신을 꽤 심하게 당한 탓에 얼굴을 퉁퉁 불어 있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쯤 되자 지금까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임석구의 누이는 사색이 됐다.

임석구가 도박에 손을 댄 것은 사실이나 유서를 조작한 것은 천륜을 어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석구의 누이가 유서의 조작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있느냐?”

“혹시 몰라서 저들의 아비가 썼던 유서의 원본을 챙겨놨습니다.”

“그게 이것이 맞느냐?”

서기영은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그걸 펼쳐서 천천히 읽어줬는데 임석구가 흠이 있으나 잘 보살펴 주라고 딸에게 당부하는 부탁과 함께 재산의 절반씩 나눠주라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기존에 공개된 유서와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당연히 판결은 곧장 나왔다.

두 남매는 절반씩의 재산을 나눠 가졌다.

그리고 임석구의 누이는 2년의 노역형에 처해졌다. 생각보다 형량이 약하다는 이들도 있었으나 아마 그녀에게는 짧지 않은 세월이 될 것이다.

노역을 하는 것이 옥에 갇혀 있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고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에게는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었다. 만약에 재심을 원한다면 다시 사건을 살펴볼 수 있다.

3결종2도(三決從二度)의 원칙 때문이다.

십 년 전에 내가 도입한 그 제도는 세 번의 판결 중에 승소가 두 번 이상인 쪽을 따르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워낙 확실한 증거와 증인이 있기에 자칫 더 중한 형벌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외에도 내가 도입한 것 중에는 과한법(過限法)이라는 것도 있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더는 소송을 할 수 없게 소멸 시효를 두는 제도였다.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수십년 전의 일을 들춰내는 일까지 볼 수는 없었다.

전산화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자료를 찾아서 지금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도 굉장히 지난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런 소송은 노비의 소유권을 두고 벌어지는 다툼이 대부분이었다.

‘조만간 온갖 소송이 쏟아져 들어오겠지.’

이미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아마 대법전이 적용되고 판사들이 각 고을로 가게 되면 노비에 관련된 소송이 줄지어서 올라올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조선에서도 그런 일이 생겼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노비 제도를 없애는 방법을 찾고 싶을 정도였다.

과거에 태종이 즉위한 후.

노비들이 올린 소송만 한 달 사이에 거의 만삼천 건에 달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태종이 노비 제도를 없애면 소송이 없어지지 않겠냐며 폐지 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당시에 관리들이 노비를 두는 이유가 동방의 까닭 있는 제도라고 했다지.’

예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니 건들지 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었다.

조선이 아니라 동방이라 말한 것도 우리뿐만 아니라 다들 그런다는 뜻이다.

그만큼 권문세족과 지도자 계층에 있는 이들은 노비가 없는 삶을 생각해본 적도 없을 정도였다.

노비를 과연 없앨 수 있을까?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도달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무수히 많은데 그 하나하나가 K2나 에베레스트 봉우리 정도인 느낌이었다.

기존에 사병을 정리하고 성리학자를 배척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고려의 모든 기득권자와 사회 지도층과 제대로 한 판 붙겠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황제의 권위로 무지성에 가깝게 밀어붙여봤자 반발만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꼭 해야 할 일이다.

가능한 많은 노비를 풀어줘야 했다.

현재 고려에서 관노와 가노를 모두 합치면 전체 인구의 1할이나 된다.

과거에 내가 학생이었을 당시에 여러 추측이 많았으나 생각보다 많았다.

즉위한 이후로 꽤 많은 수를 양민으로 면천시켜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최근에 나온 통계는 그렇지 않았다.

대폭 증가한 인구로 희석될 만도 한데 노비는 자식도 대를 이어서 노비가 되는 탓에 쉽지 않았다.

헤어나올 수 없는 굴레였다.

백만 명이 넘는 노비가 있다는 것은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그들이 양민으로 돌아가야 더 많은 세금이 걷히게 된다.

그리고 예비군으로서 훈련도 정상적으로 받을 수 있게 된다. 노비는 국방의 의무조차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난제(難題)만 제대로 풀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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