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63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볼 때마다.
시간의 흐름을 실감할 때가 많았다.
황태자와 쌍둥이가 쑥쑥 자라는 만큼이나 앞으로 고려를 수십 년 동안 책임질 기대주들도 폭풍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히 그 중심에 있는 것은 진방회와 영재 학당이라 불리는 비공식 모임이었다.
처음에 아이들을 모았을 당시.
대부분이 대여섯 살에 불과했다.
그 무렵에 코흘리개 말썽꾸러기 하륜마저 어느덧 약관이 되어 관직에 올랐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인 하윤린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인지 그는 성균관에서 공학을 전공했고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다.
따지고 보면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교육받은 첫 세대라고 봐도 되었다.
그 덕분에 최근 하윤린과 하륜 부자는 같이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종종 의견이 안 맞아 티격태격해도 꽤 보기 좋았다.
그들이 이룬 성과가 작지는 않았다.
요즘 그들은 고무라는 소재에 완전히 꽂혀 있는 것 같았다.
하륜 외에도 인재는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이숭인과 정지상이다.
그들은 각각 장기를 살려서 문관과 무관이 되었는데 아직 나이가 어린 편이나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최고의 교육을 받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조준도 그런 이들 중의 하나였다.
문하시중에 올랐던 조인규의 증손인 그는 원래의 역사에서는 음서로 관직에 올랐다.
하지만 재능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약관이 되기 전에 급제한 정몽주나 정도전에 비해 다소 뒤처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가 급제한 것은 거의 서른쯤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조준을 판단하는 것은 조금 성급한 일이었다. 그는 셈이 빠르고 경제와 지리에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분야별로 과거 시험을 보고 있지만, 뭉뚱그려 관리를 뽑는 원래 형태와는 어울리는 편은 아니었다.
“예전에 올린 상소문에 대해서 상세히 듣고 싶어서 불렀으니 그에 대해 이야기해 보거라.”
나는 조준을 편전으로 불러들였다.
그가 쓴 상소문은 일종의 요약본에 가까운 것이라 자세히 들어볼 생각이었다.
내 앞에 조아리고 있는 조준은 그리 긴장한 기색조차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와 가진을 자주 보고 자란 탓이었다.
예전에 개경이 수도였던 시절.
영재 학당의 아이들은 뻔질나게 가진의 공방을 드나들며 그 근처의 넓은 뜰에서 공놀이를 했었다. 당시에는 가진이 회임하기 전이라 아이들이 올 때마다 간식을 주며 상당히 자주 어울렸다.
그 시절이 매우 고되기는 했지만,
미복잠행도 자주 나가던 때라 살짝 그리웠다. 어쨌든 성인이 된 조준은 진중한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우선은 호(戶)당 하나 이상의 가옥을 보유하는 것부터 제한하여야 하옵니다. 지금의 평양을 보면 부를 쌓은 이들이 집을 사들여 훗날 비싸게 팔 생각을 하고 있사옵니다.”
쉽게 말하면 부동산 투기였다.
인구의 폭증이 연관 없진 않았다.
내가 즉위한 해에 태어난 아이들이 십 대 중반이니 혼례를 올릴 나이가 되었다.
장남의 경우에는 부모의 집에서 함께 살겠지만, 차남부터는 분가를 하기에 수요가 늘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기는 했다.
조선 시대처럼 권문세족의 권력을 이용해 백성의 집을 빼앗는 ‘여가탈입(閭家奪入)’ 현상은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준이 말한 것처럼 투기로 인한 폐단이 적지 않았다.
‘한번 평양을 벗어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당연히 지방의 관리로 가는 이들도 평양에 가족을 남겨두는 일이 당연시됐다.
이 시대에도 기러기 아빠는 존재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부임 받은 곳에서 평생 있는 것도 아니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올 텐데 집을 파는 것도 애매한 일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 정책이 통할까.
그렇지 않을 거라고 나는 확신했다.
내가 아는 조선의 역사에서 비슷한 일이 진행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 역시 시세 차익을 노리고 부동산 투기에 대거 뛰어들었다.
주거난이 심각해질 정도였다.
집을 살 수 없으니 백성들은 ‘세입’이라 불리는 월세를 주며 살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도 조준이 제시한 것처럼 주택 보유에 제한을 걸었으나 온갖 꼼수가 등장하며 교묘하게 피해갔다.
“그러면 만약에 집안의 가노를 양민으로 풀어주는 대가로 가옥을 그의 명의로 돌려놓는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
“가노를 재산처럼 여기는 이들이 그들을 잃는 손해까지 보면서 그렇게 할지는 아직 알 수 없사옵니다.”
“그들을 풀어준다고 권문세족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아직 세상의 때가 덜 묻은 것 같았다.
노예로 살던 이들의 세계는 무척 좁다.
자유를 갈망해도 막상 그 자유가 주어지면 어떻게 할지 결정을 못한다.
결국에는 솔거 노비에서 조금 더 자유로운 외거 노비처럼 바뀔 뿐이다.
경제적인 독립은 불가능했고 작은 공동체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권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괜히 구한말 시대에 노비에서 풀려난 이들이 머슴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말한 예시는 실제로 역사에서 벌어졌던 일을 말해준 것이다.
조선 시대에도 똑같은 고민을 했었고 먼 훗날까지 부동산 문제는 지속적으로 모든 통치자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나는 그쯤에서 조준에게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을 숙제로 주었다.
당장 해결책을 바란 것은 아니다.
아직 시간은 여유 있었고 한두 차례 정책에 실패하더라도 문제는 없었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법인 고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 번 맡아서 해결해 보겠느냐? 쉽지는 않을 것이니 신중하게 대답하거라.”
“···황송하오나 소신이 홀로 이 문제를 살피기에는 무리가 있사옵니다.”
“자신이 없는 것이냐?”
조준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고 말했다.
대신에 자신과 함께 이 문제를 살펴볼 이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가 언급한 이들은 대부분 진방회 소속이었다.
그중에는 하륜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나는 허락해주었다.
어차피 그가 내놓은 것을 그대로 채택할 생각은 없었다. 도당에서 논의하기 위한 자료를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몇 명이 더 붙는다고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렇게 하거라.”
대신 시간은 그리 많이 주진 않았다.
적어도 달포 이내에 정책의 뼈대를 준비하라는 말에 조준은 알겠다고 답했다.
그쯤에서 조준을 내보낸 나는 미복잠행을 나갈 준비를 했다. 모처럼 평상복을 입고 직접 나가서 평양을 살필 생각이었다.
거의 두어 달 만에 나가는 거라 그런지 오늘은 신소봉도 만류하진 않았다.
어차피 내가 밖에 나가봐야 가는 곳은 언제나 비슷했다. 시전과 공방이 모여있는 거리 그리고 멀어봐야 남포항이었다.
요즘에는 개성에 이어 평양에 세워진 경마장도 거의 가보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궁궐을 나선 나는 내성을 거쳐서 평양의 시내로 향했다. 평양은 나날이 발전하는 게 눈에 띌 정도였다.
반대로 그만큼 주거지가 부족하다는 말이 실감될 정도였다. 수도 이전을 하며 마련한 강북의 필지는 빈 곳이 없었다.
“확실히 예전보다 북적거리는 것이 사람이 많아졌구나.”
“요동과 부여 그리고 마두라이 등에서 고려에 귀화한 이들 중에 상당수가 평양에 거처를 마련하고 있다고 합니다.”
해결 방법이 아예 없진 않다.
아파트처럼 건물을 높이면 된다.
그러면 훨씬 더 많은 인구가 주거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건축 설계사가 괜히 있겠는가.
엉성하게 올리면 인명 사고가 날 것이다.
더구나 재료 수급도 상당히 어려웠다.
철근을 촘촘하게 넣을 정도면 수백 자루가 넘는 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들어갈 콘크리트를 가지고 도로를 조금이라도 연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보면 훨씬 이익이었다. 만약에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외각에 위성 도시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정도로 맛있는 돌솥비빔밥 드시고 가세요.”
“칼칼한 수제비 팝니다.”
“방금 볶은 김치 볶음 사가세요.
시전은 오늘도 활기찼다.
그중에서도 음식점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과거에 수레 상점으로 시작된 길거리 음식은 이제 음식점으로 발전되었다.
최근에는 외식을 하는 이들의 수가 무척 늘어났다는 통계도 나왔다.
그만큼 저화의 유통은 활발해졌다.
시중에 사용되는 저화가 부족해서 매년 찍어내는 양이 상당히 많았다. 오죽하면 황칠을 할 도료가 부족해질 정도였다.
남해안에 있는 섬과 대마도에 식재해 놓은 것 중에 일부가 뿌리내리지 못했다면 꽤 골치 아팠을 것이다.
“어···!”
그때 신소봉이 뭔가를 본 것 같았다.
도대체 뭘 본 건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아직 어려 보이는 비렁뱅이 한 명이 보였다.
거지치고는 귀티가 나는 얼굴이었는데 어딘가 매우 낯이 익었다.
천천히 그쪽을 향해 걸어가자,
비렁뱅이도 나를 보고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내 곁에 서 있던 홀치들이 순식간에 그를 에워싸며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이냐.”
비렁뱅이의 정체는 왕현이었다.
고려의 황태자가 거지꼴을 하고 구걸을 하고 다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어쩌면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 때문인 것 같았다.
왕자라는 소재 때문에 궐 밖에는 배포되진 않았으나 어릴 때 왕현은 그 이야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한정적인 공간인 궐 안에서 자란 터라 자유로운 생활을 동경한 것 같았다.
그래서 밖에 내보내 준 것인데 이거는 조금··· 아니 너무 과했다.
“아버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밥값은 벌었느냐?”
“이게 생각보다 상당히 힘든 일입니다. 비렁뱅이 세계에도 그들만의 법이 있는 탓에 동냥 받은 것도 대부분 다 빼앗겼습니다.”
“동행한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느냐?”
아이를 방치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질문에 왕현은 근처에 있는 다점(茶店) 이 층에 자리를 잡고 있는 변안열과 정도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들도 뒤늦게 나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일어섰다.
“보는 눈이 많으니 일단 다점으로 가자.”
왕현을 이끌고 다점 안으로 들어서자 변안열은 일행의 대표로 내게 인사했다.
그 역시 이런 모습을 내게 걸릴 줄은 몰랐는지 상당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채윤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며늘아기는 어디에 있소?”
“방금 평양에 도착한 터라 숙소에서 쉬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사람을 보내서 보름 뒤에 도착할 거라 하더니 아비를 속인 것이냐?”
나는 고개를 돌려서 왕현을 꾸짖었다.
보름 후면 왕현이 떠난 지 정확하게 일 년째가 되는데 그 날짜에 맞춰서 궁궐에 들어오려고 머리를 굴린 것이 확실했다.
차라리 솔직하게 말했으면 화나진 않았을 것이다.
“송구합니다···.”
왕현은 곧장 사과부터 했다.
괜히 말대답을 했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궁궐 밖에서 생활을 한 탓인지 눈빛은 상당히 깊어져 있었다.
확실히 여정을 시작했을 당시에 살짝 남아있던 치기 어린 모습은 사라졌다.
부쩍 성장한 모습을 보니 대견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원래 내가 살던 시대라면 아직 왕현은 중학교에 다닐 나이에 불과했다.
그런 어린 나이에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고려라는 무게가 너무 커다랗다.
누구보다 외롭고 힘든 내가 걸어왔던 길을 걷기 시작한 터라 안쓰러웠다.
그러다 보니 막상 그 이상 화가 나진 않았다.
“네가 본 고려의 백성은 어떠하더냐?”
“천차만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너무나 보잘것없는 작은 일에도 행복해했고, 누군가는 충분히 풍족한 삶을 사는 데도 없는 자의 것을 강탈했습니다.”
“그러면 너는 어떤 고려를 만들고 싶으냐?”
내 질문에 왕현은 잠시 고민했다.
질문이 어렵다기보다는 그걸 입 밖에 꺼내도 되는 건지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엄연히 황제인 아버지가 살아 있는데 자신의 꿈을 꺼내놓을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왕현은 정도전을 향해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당연히 그는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고개를 살포시 끄덕였고 왕현은 지난 일 년 동안 보고 겪은 것은 압축해서 말했다.
황태자가 꿈꾸는 나라는 묵가(墨家)와 법가(法家)의 사이쯤 있는 것 같았다.
“없는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고 범죄자는 강력한 법으로 다스리고자 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