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62
미래에 스리랑카가 되는 땅.
그곳을 부르는 지명은 다양했다.
인도에서는 그곳에 싱할라족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싱할라로 부르거나 섬이라는 뜻을 가진 랑카라 불렀다.
훗날에는 실론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실론티라는 단어도 거기서 유래했다.
어쨌든 그곳을 다스리고 있던 감폴라 왕국을 점령하고 랑카를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았다.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저항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손쉽게 허물어졌다.
이번 정벌에 정휘 장군이 직접 병사를 이끌고 갔다니 이해는 되었다.
이미 그는 마두라이의 전설이 됐다.
수년 동안 제국과의 싸움에서 상당히 높은 승률을 쌓고 있기 때문이었다.
패배는 고작 두어 번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역습으로 결국에는 대승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일단 병사들부터 급이 달랐다.
지난 수년간 홀치와 홍귀가 직접 육성했고 무수히 많은 전장을 돌면서 다양한 전투 경험을 쌓았다.
오죽하면 비자야나가르의 병사들도 정휘 장군의 깃발만 보면 내뺄 정도였다.
그런 정예병을 상대로 감폴라 왕국이 버틸 재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랑카 전역을 다 점령한 것이오?”
나는 그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 동오 상단의 선장을 궁궐로 불러들여 물었다.
그의 이름은 심효립으로 몇 해 전에 배유형과 함께 신대륙까지 다녀왔을 정도로 상당히 유능한 이였다.
그는 이번에 마두라이 병사를 랑카로 수송하는 일을 맡아서 정벌 과정을 곁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마두라이에서 보유한 선박의 수가 그리 많지 않은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보상은 있었다.
동오가 어용상인이라고 하더라도 이인임의 지시를 받을 이유는 없었다.
엄연히 상단이기에 적절한 보상을 바라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그러하옵니다. 랑카섬 전체가 완전히 재상의 손에 떨어져서 본격적인 재건에 들어간 상황이옵니다.”
“랑카는 어느 장군이 맡기로 결정되었소?”
“정휘 장군은 정벌이 끝난 이후에 다시 마두라이로 돌아갔고 랑카의 수호는 임견미 장군이 맡기로 결정되었사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이인임은 재상에 앉아 있을 때부터 임견미를 꽤 중용했다. 아무래도 정휘보다 그가 훨씬 더 다루기 쉬울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붙어 다니던 이들이라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하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들이 랑카라는 섬에서 불교를 몰아내고 성리학의 저변을 확대한다고 멀리 떨어져 있는 고려가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고려가 투자한 만큼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그만이었다. 복합한 여러 관계를 고려하면 랑카는 마두라이와 고려의 공동 제후국에 가깝다고 봐도 되었다.
‘정휘 장군도 이제 홀가분하겠지.’
그가 아직도 마두라이에 남아 있는 이유는 양국의 우호 관계 때문이다.
탄야를 계속해서 술탄 자리에 앉혀 놓기 위한 희생이었다. 그런 그를 랑카에 데리고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고려로 돌아올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긴 시간 이인임을 지켜보던 임무도 종료됐다.
이제 그 임무는 다른 이에게 맡기게 되었으니 조금은 홀가분해졌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고려에 생겼어야 할 이 씨의 왕조가 인도양에 건국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이성계는 전주 이씨였고 이인임은 성주 이씨라는 차이가 상당히 크긴 했다.
“이번에 오는 길에 마두라이에서 노동자를 데리고 왔다고 들었소.”
나는 그쯤에서 주제를 바꿨다.
지금 당장은 랑카보다 그들이 보내줄 인력에 더 관심을 둘 수밖에 없었다.
삼강 평원은 생각 이상으로 드넓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직 경작지로 활용하는 비율은 높지 않은 편이었다.
내 질문에 심효립은 이번에 고려에 돌아올 때 자신의 배에 태우고 온 이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밝혔다.
“이십 대 내외의 건장한 장정만 추려서 왔사온데 그중에 고려의 말을 능숙하게 하는 이들은 절반 정도 되옵니다.”
“생각보다 많은 것 같소.”
“기존에 고려어학당에서 수학하던 이들이 이번에 많이 지원한 덕분이옵니다. 이십여 명을 뽑는데 거의 수백 명 이상이 지원하였사옵니다.”
심효립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른바 국뽕이 차오르는 것 같아 보였다.
먼 타국에서 고려의 말과 글을 배우고 성공을 위해 이곳까지 먼 여정을 떠나는 마두라이의 청년을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일종의 아메리카 드림이랄까.
고려어학당에 다니는 이들의 대부분이 신분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수업료도 무료인 탓에 신분 상승의 기회를 노리는 이들에게는 고려만큼 기회가 많은 곳이 없었다.
‘고려를 가면 성공할 수 있다.’
이런 기조가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로 탄야의 곁에는 고려의 말을 잘하는 이들이 실세를 차지하고 있었다.
비록 이인임이 재상의 자리를 내려놓고 제후국을 맡게 되었지만, 여전히 고려인의 파벌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근로 여건도 좋은 편이다.
고려의 말과 글을 배워서 소통이 수월하게 되는 이들은 대부분 노동자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길 예정이다.
언어가 통한다는 것만으로 그 정도의 자격은 충분했다. 그들은 앞으로 노동자의 대변인이자 책임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몇 명이나 예정되어 있소?”
“현지에서 채용된 이들은 대략 이천 명 정도이옵니다. 올해 이내에 대부분이 부여성으로 이동할 예정이옵니다.”
“지원자가 많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은데 이유가 있는 것이오?”
“소인이 자세한 내용까지 알지는 못하오나 선발 과정이 꽤 까다로운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하긴 그에게 물을 내용은 아니었다.
이 문제는 이인임에게 맡긴 것이니 그가 풀어낼 문제였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에 심효립을 내보냈다.
그런 이후에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영의정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번에 마두라이에서 온 이들은 영공이 알아서 배치해 주시오.”
*
심효립의 배가 들어온 이후부터.
고려에는 수많은 마두라이와 랑카 출신의 노동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반년 사이에 기록상으로 남겨진 이들만 만여 명이 훌쩍 넘어갈 정도였다.
마두라이에서 들어오는 배에는 항상 빼곡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 타고 있었다.
하지만 평양에서 그들을 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평양을 거치지 않고 부여성으로 보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요동반도를 거쳐서 부여에 도착한 이후에 긴 여정의 끝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인력이 계속 투입되고 있는 덕분에 개발의 속도는 그만큼 빨라졌다.
기존에 부렸던 홍건적과 왜국 포로들의 상당수가 다양한 질병과 사고로 죽었는데 그들의 빈 자리를 채워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외부의 노동력을 활용할 생각은 없었다.
생각보다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치안이 조금 나빠진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노동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상당히 컸다. 공짜로 일하는 이들만 썼던 예전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렇게 노동자가 얻게 된 고려의 재화는 마두라이로 상당히 많이 흘러 들어갔기에 이민 정책도 병행해야 했다.
노동자 중에서도 인재는 있었다.
북부의 추위에 어느 정도 적응을 마친 노동 감독관 중의 일부는 아예 고려로 귀화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그렇게 정착한 이들은 가족의 일부를 데려올 수 있도록 주선까지 해주었다.
어차피 비어있는 땅은 넘쳤다.
어떤 곳은 백 리를 걸어도 사람 그림자 하나 보기 힘든 곳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곳들은 대부분 호랑이 같은 야생 동물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해양의 제국이라 불리는 고려는 어느 사이에 다민족 국가가 되어갔다.
일상속의 깊숙한 곳까지 여러 문화가 닿고 있기에 다르다는 것이 나쁜 거라 생각하는 인식은 희석되고 있었다.
고려의 말과 글만 쓴다면 피부색이 다르다는 것은 문제가 안 되었다.
그렇게 귀화를 해도 티가 나지 않았다.
현재 고려는 이 시대에 흔하지 않은 인구 폭발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각 고을에서 새로 태어난 아이와 죽은 이의 수를 매년마다 보고하고 있는 중인데 지난해만 육십만 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가임이 가능한 인구를 고려할 경우.
너덧 가구 중의 하나 이상은 출산을 했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매년 더해지니 어느덧 고려의 인구는 천이백만 명까지 늘어났다.
이 추세대로 가면 서너 해 이내에 천오백만 명을 찍을 것 같았다.
거기에 외국인 노동자 수천 명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해주어도 이게 가능한 일이구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조선의 경우에는 이앙법과 수전종맥법 등이 보급되고 여러 발전이 맞물려서 오십 년 동안 삼백오십만 명이 늘었다.
지금의 고려는 당시에 조선이 기록했던 것을 훨씬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분포도는 최악이었다.
여전히 수도권은 바글바글했고,
부여성과 요서의 부신성 같은 북부의 끝에 있는 곳들은 인구 밀도가 낮았다.
평양으로 이전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벌써 그 규모가 과거의 개성 못지않다는 것이 대표적인 증거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평양의 강북 지역은 이제 거의 빈 곳이 없다고 하던데 맞소?”
나는 새롭게 영의정 자리에 오른 유숙을 바라보며 물었다. 기존에 그 자리에 있던 이인복은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유숙은 대도에서부터 나를 호종했고 지금껏 쌓은 경력이 꽤 화려한 편이었다.
이제 그의 나이가 쉰이 넘어갔으니 충분히 영의정에 올라설 자격이 되었다.
“기존에 구획해놓은 곳들은 모두 사용 중이라 남아 있는 공간이 없사옵니다.”
“대동강 이남은 어떻소?”
“그곳도 이미 8할 가까이 찼사옵니다.”
수도 이전을 할 때부터.
어느 정도 이런 예상은 했다.
그래서 생각보다 크게 부지를 잡았다.
그런데 십 년도 안 되어서 이런 상황을 맞이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건 마치 산업 혁명 당시에 수도로 사람이 몰리는 현상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더구나 이미 외성이 올려진 상태라 더 확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종 미복잠행을 나가보면 비어있는 것으로 보이는 집도 상당하던데 그건 어찌 된 것이오?”
“그런 곳들 대부분은 지방에 사는 이들이 사들인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그 수가 어는 정도 되는 것이오?”
유숙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아직 그와 관련된 통계가 없는 탓이다.
애초에 그런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어터질 것 같던 개경이 수도일 당시에 누구도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었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올라왔던 상소 하나에서 비슷한 내용을 본 기억이 났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었으나 과거에 내가 뉴스에서 보았던 부동산 정책과 흡사했기에 꽤 흥미롭게 보았다.
내용은 대충 부동산 소유세에 관련된 것으로 평양 내의 다주택 소유자는 그만큼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으나 정작 그걸 누가 쓴 건지 떠오르진 않았다.
기억날 듯 말 듯한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는데 결국에는 신소봉을 불렀다.
“얼마 전에 본 상소문 중에 확인할 것이 있으니 찾아서 가지고 오너라.”
나는 기억나는 내용 중의 일부를 적어서 신소봉에게 건넸다. 그걸 받은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살짝 비틀거렸다.
유숙도 안쓰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런 반응이 나올만한 이유가 있었다.
최근에 올라오는 상소문의 양은 적지 않았는데 매년 쌓이는 양이 창고 하나를 가득 메울 정도였다. 내관을 모두 동원해도 며칠 밤낮은 걸릴 것 같았다.
“···언제까지 찾아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언제 들어온 상소문인지 범위라도 알려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게 언제더라··· 겨울쯤이었던 것 같다.”
신소봉은 그제야 얼굴을 풀었다.
그때쯤 들어온 상소문은 사관이 모두 정리해서 책자로 만들었을 것이다.
심지어 상소문의 내용에 따라서 분류도 해놨을 테니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반나절쯤 지났을까.
신소봉이 다시 편전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 책자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걸 펼쳐보기 전에 누가 보낸 상소문이었는지 먼저 물어봐야 했다.
그러자 신소봉은 뜻밖의 이름을 꺼냈다.
“얼마 전까지 진방회에 소속되어 있다가 서운관(書雲觀)의 진서운관사로 제수받은 조준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