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57
생전 처음 보는 부조리한 일이다.
궐 안에서는 이런 일을 볼 일이 없다.
당연히 왕현은 상당히 크게 분노했다.
채윤도 많이 다르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잠시 들리기로 했던 청주에서 머물렀다.
이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않을 분위기였다. 당연히 모든 일정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어차피 일정은 유동적이었다.
대략적인 경로만 있지 정해진 일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1년 이내에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면 될 뿐이다.
다행히 이번에 동행한 백 명의 홀치 중에 청주 출신이 두 명이 있었다. 일행은 당분간 그들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안 그래도 휴식이 필요했다.
평양에서 청주까지 계속 움직였다.
적어도 며칠 정도는 재정비하며 피로를 풀어줘야 했다. 제법 잘 버티고 있었으나 아직 십 대 중반이 되지도 않은 나이다.
당연히 다른 이들에 비해 훨씬 더 힘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쉴 수 없는 이가 있었다.
그건 바로 청주에 파견되어 있던 감찰 어사와 그를 추궁하고 있는 정도전이었다.
일단 그들은 이번 일의 진실에 대해서 확인부터 해야 했다. 한쪽의 말만 듣고 섣불리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이쪽 지역의 모든 인력을 동원한 덕분에 정도전은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주모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것이다. 일단 땅 문제는 청주 목사의 처리가 틀리진 않았다.
“회수 대상인 토지였다는 말입니까?”
“그러합니다. 모든 토지는 폐하의 것이고 거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과거에 별사전(別賜田)으로 받은 땅인데 내놓을 수 없다고 버티는 것 같습니다.”
“별사전이면 승려에게 주어지던 토지 아닙니까?”
정도전은 그렇다며 대답했다.
승직에 오른 이와 지리업을 하는 이에게 주어지던 땅인데 보통 3대까지만 세습이 가능했다. 하지만 주모는 4대째인데 회수가 안 되었다. 그걸 다시 나라의 땅으로 되돌려 놔야 했는데 주모는 별사전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어느 쪽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까?”
“아무래도 관청의 기록이 더 우선시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주모의 말도 아예 틀리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그녀가 가진 땅문서에는 별사전이란 표시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 중간에 향리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누가 맞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특별하진 않았다.
개혁이 진행된 뒤로 비슷한 일이 고려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정도전에게 그 이야기를 듣자 왕현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개혁이란 것이 원래 이런 것입니까?”
“모든 개혁에는 혼란이 뒤따릅니다. 하지만 옳은 방향으로 가려면 감수해야 합니다. 이번 개혁이 진행되기 전에 수조권 때문에 고통받았던 백성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정도전은 개혁파에서도 강경파다.
조금 더 바른길로 가기 위해서 일정 부분의 피해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런 점에 있어서 폐하와 같은 노선이라 보아도 되었다. 정도전의 말을 듣고 수긍하는 왕현의 성향도 다르진 않았다.
“하지만 개혁 전에 시간을 들여서 조금 더 신중했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 것이 아닙니까?
반면에 채윤은 신중했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아마 그랬다면 혼란은 줄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 단위의 일이라 쉽지 않다.
이번 개혁을 준비하기 위해서 들어간 몇 년의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이 고생했다.
하지만 대비책이 없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질 때를 대비해서 고려는 부여와 요동으로 이주하는 것을 조건으로 꽤 넓은 땅을 대여해줬다.
대부분 개간을 마치고 풍옥(豊沃)한 곳이라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든 고향을 떠나는 이가 그리 많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만족하는 수준에 도달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토지를 조사하는 중에도 소유주는 계속 바뀌지 않습니까.”
정도전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자칫 개혁을 비난하는 거라 여길 수도 있으나 토론은 언제나 환영하는 그였다.
최근에 고려의 도당에서도 그와 비슷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아니다 싶은 것은 묵살할 때가 있으나 대부분 도당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황태자와 황태자비를 보면 폐하와 황후마마의 모습이 얼핏 엿보였다.
두 분처럼 국적이 다른 것도 같으나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주는 느낌이었다.
아마 폐하도 옆에서 잡아주는 마마가 안 계셨다면 고삐 풀린 말처럼 개혁의 속도를 높이셨을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우리가 본 극악무도한 짓을 거리낌 없이 저지르던 탁류(濁流)들은 어떻게 된 것이오?”
곁에서 채윤과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던 왕현은 그쯤에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지금부터는 잠행 중이라 보기 어려운 터라 말투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황태자로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토지 문제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악소(惡小) 패거리의 행패는 용서할 수 없었다.
정상적인 처리였다면 청주 목사가 향리를 시켜서 원만하게 해결을 해야 했다.
그런데 꼬락서니를 보니 온갖 불법적인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더구나 감찰 어사도 문제였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견제를 해야 할 이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다른 외진 곳도 아니고 청주에서 벌어지는 일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현재 감찰 어사 문덕규는 업무를 태만한 것과 청주 목사의 청탁을 받고 폐하를 기만한 죄로 감찰사에 억류했사옵니다.”
“청주 목사 이수(李守)는 어찌할 것이오?”
“탁류의 우두머리를 변 장군이 추포해온 덕분에 그간 그들이 저지른 모든 죄를 실토받았고 증거도 확보했사옵니다.”
그들의 죄는 가볍지 않았다.
청주의 목사로 부임 된 지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것을 해 먹었다.
소문에 의하면 창고에 온갖 재물이 가득 쌓여 있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면 곧장 잡아들이시지 않고 뭘 기다리는 것이오?”
“아직 증거가 나오지는 않았으나 혹시라도 병마사도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기에 신중해야 하옵니다.”
“변 장군은 어떻게 보시오?”
“홀치를 보내어 병마사를 일단 억류해 놓은 뒤에 이수를 잡아들이면 되옵니다.”
거기에 청주 밖에 대기하고 있는 응양군도 있으니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에 황태자의 호위 문제만 아니었다면 홀치만으로도 충분한 작전이었다.
호위를 맡고 있는 변안열이 그렇게 말하자 정도전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감찰사에서도 곧장 준비하겠사옵니다.”
그로부터 두 시진 뒤.
청주는 발칵 뒤집혀졌다.
갑자기 군사들이 들이닥친 탓이다.
성문은 빠르게 통과한 그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서 각각 청주의 병마사영과 청주 목 관아를 향해 달려갔다.
앞길을 가로막는 이들은 없었다.
순식간에 청주 목에 도달하자,
그제야 관아를 지키고 서 있던 이들이 다급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 창을 들어서 변안열에게 겨누었다.
수적인 차이가 있는데도 도망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장하게 보일 정도였다.
“무엄하다! 어서 물러서지 못하겠느냐.”
안도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지만,
오히려 안에서 더 많은 병사들이 나와서 관아로 들어서는 문을 막아섰다.
홀치들의 살기 가득한 흉흉한 눈빛을 받으며 손발을 벌벌 떨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뒤늦게 그들은 뒤에서 휘날리는 깃발을 발견했다.
검은 삼족오와 호랑이.
두 부대기를 모를 리가 없었다.
관아의 병사 중에는 쌍성총관부 전투 중에 다쳐서 돌아온 병사도 있었다.
당연히 변안열 장군을 알아봤고 그들은 경의를 표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리고 잠시 후.
청주 목사 이수는 포박됐다.
갑작스러운 일에 그는 상당히 황망한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아직 자신의 앞에 있는 이들이 누군 지조차 알지 못했다.
청주의 목사 자리에 있으면서,
나름 이 지역에서는 왕처럼 살았다.
그런데 갑자기 병사들이 들이닥친 터라 혹시라도 반란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이수는 일행 중에서 변안열이 우두머리인 줄 알고 그를 향해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감히 누구의 안전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냐.”
“그러니까 정체를 밝히시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이렇게 억압하는 것이오?”
오히려 이수는 호통을 쳤다.
감히 나랏일을 하는 관리를 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러냐며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에 관아에 놓인 의자에 앉은 것은 다른 이였다.
그것도 아직 어린 티가 나는 아이였다.
“저분이 이 나라의 황태자이시다. 어서 예를 올리지 않고 뭣들 하고 있는 것이냐?
정도전이 좌중을 향해 소리쳤다.
청주 목사 이수는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과연 이 말을 믿어야 할까 고민되었다.
거기에 아까 자신이 바라보고 호통친 이는 심지어 변안열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장 두려운 이는 따로 있었다.
관리들의 천적이라 불리는 최근에 감찰사에서 이인복과 김첨수 못지않은 악명을 떨치고 있는 정도전이었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에 관아로 들어온 감찰사에서 정도전임을 확인해줬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부리던 이들이 포박당한 채로 들어와 지금껏 저지른 죄를 모조리 불었다. 그 모든 것이 낱낱이 까발려지자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왕현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호통쳤다.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하는 것이더냐!”
아직 영글지 못한 미성의 목소리지만, 황태자로서의 위엄은 충분히 담고 있었다.
그걸 본 정도전은 호부 밑에 견자가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확실히 폐하의 핏줄을 타고 태어난 티가 났다.
반면에 변안열은 즉위 초기의 폐하를 꼭 빼닮은 황태자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심양에서 폐하에게 반해서 자신의 인생을 고려에 맡기기로 결심한 것도 벌써 15년이나 되었다. 그때가 떠오른 덕분에 잠시 초심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그때 고려로 오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요양성이 무너질 무렵에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폐하의 곁에서 중히 쓰여지진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고려의 앞날이 밝은 것 같지 않소?”
변안열이 흐뭇한 얼굴로 정도전에게 묻자 그 역시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굉장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황태자를 직접 대면할 일이 많지 않아서 우려하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고려를 이끌 후계자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확실히 그렇게 보입니다.”
*
모든 과정은 내게 보고됐다.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하게 적어서 보낸 정도전의 장계는 상당히 흥미로웠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고 다녔다.
왕현은 청주를 시작으로 여러 부조리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렇다고 월권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정도전이 감찰사 소속이라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었다. 일 처리도 상당히 깔끔했는데 정도전이 곁에서 실무를 처리하고 있는 덕분이라 여겨졌다.
이번 일은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영토는 계속 늘어나고 있었기에 감찰사를 비롯해 모든 부분에서 과부하가 걸렸다.
부패는 잠시 한눈만 팔아도 생긴다.
여름날의 곰팡이와 비슷했다.
감찰 어사도 한계가 분명히 있다.
현재 탐관오리를 적발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은 거의 2년에서 3년 주기를 유지했다.
그 이상은 솔직히 조금 무리가 있었다.
아마 지금쯤 각지에 소문이 퍼지고 있을 테니 긴장하는 이들이 제법 많을 것이다.
부조리함이 하나씩 밝혀질수록 자신들의 무능함이 드러나는 꼴이다.
나는 청주에서 올라온 소식을 가지고 온 이인복을 향해 넋두리를 했다.
“아주 효심이 넘쳐흘러서 일을 만들어서 아비에게 넘겨주는구려.”
“잠행 중이란 사실이 알려졌으니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서 수행할 병사를 더 보내시는 것은 어떠시옵니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동행하는 병사만 오백 명이다.
거기에 홀치 백 명과 변안열도 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더구나 남해안에 내려가면 윤호가 있으니 걱정되진 않았다.
그는 주덕유 함대의 부사령관에서 독립해서 별도로 제4함대를 만들었다.
점점 더 넓어지는 해안 방어를 위한 조치이자 앞으로 예정된 행보를 위한 최소한의 준비였다.
그리고 그 시기가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슬슬 홋카이도를 가져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