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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56화 (15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56

황태자의 결혼식은 화려했다.

아무리 형식을 줄이려고 했지만,

제국에 올라서고 첫 후계자의 혼례다.

사신으로 온 타국의 시선이 있기에 너무 간소화시키는 것도 조금 무리가 있었다.

대신 효율성이란 것을 극대화했다.

혼례를 마치고 그냥 버려지지 않도록 모든 것들에 대해서 신경을 써야 했다.

옷을 만드는 공방의 자투리 천으로 꽃을 만드는 등의 온갖 잔꾀가 동원했다.

그리고 그 비용을 회수하기 위한 일종의 쇼케이스도 열렸다.

이번에 공개된 것은 신발이다.

거의 3년 전쯤에 초기 제품이 나왔으나 지금까지 재료 수급 때문에 미뤄놨다.

하지만 이제 마두라이를 통해 어느 정도 천연 고무를 확보해놨기에 슬슬 해외에 팔아도 될 정도는 되었다.

확실히 반응은 뜨거웠다.

일상생활에 연관된 제품인 덕분이다.

고무로 만들어진 밑창에 면으로 덧대어 만든 신발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장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짚신보다 내구성이 훨씬 뛰어났고 나막신처럼 경박한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가격은 엇비슷하나 고급 가죽으로 만든 신발보다 만들기 쉽다는 점도 있었다.

다들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사신들에게는 선물로 주어졌다.

황태자의 혼례를 축하해주기 위해서 먼 길을 온 이들에 대한 답례였다.

가져가서 그 나라에 선보일 수 있도록 상당히 많은 양을 주었는데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다들 더 챙기려고 애를 썼다.

심지어 디자인도 꽤 잘 나왔다.

투박하게 만들어진 것도 있었지만,

예술혼을 불태워서 만든 제품도 있었다.

대부분 민간 영역의 공방에서 제작한 것인데 사신들은 그걸 싹 쓸어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뒤.

각국의 사신은 다시 돌아갔다.

당연히 마두라이에서 온 이임인도 자신의 동생인 이인립과 이색을 포함한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성리학자를 데리고 돌아갔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숫자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한동안 달을 바라보며 서 있자,

어느 사이에 가진이 곁으로 다가왔다.

밤늦은 시간인데 우리가 이렇게 나와 있는 이유는 오늘 밤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잠행을 떠날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막상 보내려고 하니 조금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들 때문이라면 변안열 장군이 함께하니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내가 해준 말이 아니오.”

“그대로 다시 돌려드릴 테니 믿고 기다리시지요.”

어머니는 확실히 강한 것 같았다.

가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고 오히려 기대에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벼랑에서 새끼 호랑이의 등을 떠미는 어미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는 휘영청 밝은 달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다시 돌아올 무렵에는 얼마나 성장했을지 오히려 기대됩니다.”

*

두 사람이 달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

내성을 조용히 빠져나가는 이가 있었다.

모두 합치면 일곱 명이나 되었는데 가장 앞서 걷는 이는 안절부절못했다.

이 시간에 궐 밖으로 나서는 것도 생소한 일인데 그의 뒤에는 예사롭지 않은 이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어두우니 발밑을 항상 잘 살피셔야 하옵니다.”

“애 취급은 이제 그만하지. 그리고 그 말투부터 바꾸는 것은 어떤가?”

“황송하옵니다.”

“또 그런다. 지금 당장 되돌아가서 신 환관으로 바꿔 달라고 주청 드릴까?”

그들의 정체는 안도치와 왕현이었다.

그런 두 사람의 뒤로는 채윤과 변안열 그리고 정도전 등이 뒤따르고 있었다.

왕현이 정색하는 이유는 이번 잠행에서 절대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을 거라고 채윤과 내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안도치가 계속 실수를 했다.

저러다가 금방 들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안도치도 지금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시중을 드는 이도 없는 구성이라 상당히 부담되는 여정이었다.

그나마 황태자비의 시중을 들기 위한 궁녀 하나가 전부였다.

누군가는 자신을 부러워할 것이다.

폐하에 이어서 황태자의 총애를 받는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이 잘못되면 그만큼 목숨이 위태로운 일이었다.

이제 겨우 출발에 불과했다.

그런데 벌써 외줄 타기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런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왕현은 슬쩍 고개를 돌려서 뒤따르는 변안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나머지 홀치와 응양군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백여 명의 홀치는 주변에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어디에도 안 보이는걸요.”

채윤도 신기한듯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어디에도 홀치는 안 보였다.

이번에 여정 중에는 그들 일곱 명만 함께 걷고 나머지는 거리를 둘 예정이었다.

솔직히 일곱 명도 평범한 구성은 아니다.

이 시기에 여럿이 함께 여정을 떠나는 일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어서 안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응양군은 평양 밖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아버님이 미천사에서 습격을 받아서 크게 다치신 적이 있으신 탓에 어머님의 걱정이 상당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드릴 것이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변안열은 채윤을 안심시켰다.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게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아마 천여 명의 병사가 습격해도 그를 뚫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번에 동원되는 이들의 실력은 하나같이 뛰어났다. 더구나 변안열은 고려 최고의 무사라 칭송을 받는 존재였다.

약관이 되기 전에도 엄청난 실력을 갖췄던 그는 이제 완전히 물이 올랐다.

고려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갖춘 홀치들조차 그에게 일대일로는 밀렸다.

더구나 응양군이 훈련을 핑계 삼아 계속 인근에 머물 예정이었다.

이번 잠행은 비밀 유지가 중요했다.

이번 일을 아는 이들은 삼정승과 응양군의 절반을 내준 이원림이 전부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한 것도 있으나 황태자의 행차가 알려지면 그 지역 전체가 뒤집힐 것이 분명했다.

일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서해안을 따라 남해안을 찍고 난 뒤.

동해안을 따라 요동으로 갈 예정이다.

다만, 거기서 최근에 열한 번째 도(都)로 지정된 부여는 제외되었다. 아직 그곳은 치안이 완벽하게 안정되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생각보다 쉬웠다.

나주까지 놓인 도로 덕분이었다.

사람을 태워서 이동시켜주는 마차도 운행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일행은 잠시 도로에서 벗어나야 했다.

충청도의 중심이 되는 청주를 잠시 들를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는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났던 곳들은 대부분 도로를 따라 움직이는 상인을 상대하는 음식점과 숙박 시설이 상당히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로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식사 한 끼 해결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당연히 그만큼 속도도 늦춰졌다.

“아무래도 전국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가 더 빨리 연결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요동에서 부여까지 연결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삼고 있어서 청주 지역은 조금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언젠가는 다 연결되어야겠지요.”

“물론입니다.”

왕현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실제로 고려의 곳곳을 살피며 느끼는 것이 상당히 많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대부분 정도전이 해줬다.

워낙 박학다식한 인물이라 어려운 질문을 받아도 막힘없이 대답할 정도였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정도전을 함께 보낸 것이었다. 그는 귀찮은 내색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과거에 사제인 하륜의 유별나던 어린 시절을 경험해본 터라 익숙한 일이었다.

“아버님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시는 건지 어린 제가 봐도 신기합니다. 지금껏 이뤄내시는 것을 보면 제가 기대에 못 미칠 것 같아 불안할 때가 많습니다.”

왕현이 가진 부담감은 상당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얼마나 대단한 아버지를 두고 있는 건지 체감이 되었다.

거의 다 망해가던 고려를 제국의 위치까지 올려놨다. 나중에 자신이 뒤를 이어서 그만큼의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이 없었다.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는 왕현을 잠시 바라보던 정도전은 고개를 저었다.

노력 없는 성과는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껏 전하의 곁에서 지켜본 이들이라면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십니다. 다른 어느 곳보다 만춘전의 불이 가장 늦게 꺼지시는 것을 아시잖습니까.”

“차라리 동생인 왕곤이 훨씬 더 영민하니 제 자리에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그런 소리는 하지 마십시오.”

정도전은 엄하게 꾸짖었다.

나이는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황태자의 스승 자격으로 동행 중이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를 하게 되면 상당히 곤란한 일이 생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정도전은 왕현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황태자의 장점은 강인함이다.

한번 목표를 세우면 멈추지 않는다.

가장 위에서 방향을 잡아주는 이에게 필요한 덕목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폐하를 꼭 빼닮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고집만 부리는 것도 아니다.

적절하게 조언도 받아들이고 설득을 하는 말도 논리적이다. 훗날 황태자가 즉위하는 날이 상당히 기대될 정도였다.

그때 먼저 움직이던 안도치가 돌아왔다.

“이 근처에 주막은 고작 한 곳밖에 없어서 그곳에서 식사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럼, 자리를 잡아놨으니 가시지요.”

일행은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뒤로는 홀치들이 뒤따랐는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고생하는 이들이었다.

대부분의 여정을 풍찬노숙하며 버텨야 했는데 그나마 교대로 쉬는 날이 없다면 벌써 지쳐서 쓰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예상외의 소득도 있었다.

산적이 그리 많지 않은 고려였으나,

이번 잠행을 통해 상당히 많이 소탕됐다.

겁도 없이 돈이 많아 보이는 일행을 노릴 생각으로 매복해 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황천길로 떠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잠시 후에 주막에 도착한 일행은 주모가 내놓은 음식을 보고 다들 머뭇거렸다.

생각보다 음식이 부실했기 때문이다.

안도치는 다른 곳을 알아보겠다며 일어서려 했으나 왕현은 그를 만류했다.

“아버님이 백성들이 뭘 먹는지 직접 경험해 보는 것도 중요한 공부라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히 왕현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래도 꿋꿋하게 수저를 놓지 않았다.

채윤도 마찬가지였는데 불평도 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두 사람을 보고 변안열과 정도전은 기특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확실히 여정을 하면 할수록 성장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평온하던 분위기는 단숨에 깨졌다. 멀리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상당히 불량해 보이는 무리가 주막에 들어섰다. 그들은 곧장 온갖 행패를 부리며 주모를 닦달했다.

행패를 부리는 이들이 나타나자,

순식간에 홀치 여럿이 곁으로 다가왔다.

주변에 머물던 홀치는 혹시 불민한 짓을 하지 않을까 경계했다.

더구나 채윤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피부색이 다른 마두라이 출신이 이런 곳까지 오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냥 돌아섰다.

딱 봐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 변안열과 홀치가 곁에 있었고 어린아이들의 신분도 낮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쯤 되니 왕현도 수저를 내려놨다.

더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변안열도 분노한 표정으로 칼집을 집었으나 뽑지는 못했다.

왕현이 눈빛을 보내며 가만히 있으라고 만류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알아본 이후에 움직여도 늦지 않는다.

문제는 치안을 맡은 이들조차 그들을 모른 척하고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그게 더 문제라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잠시 후에 그들이 사라지자 뒤늦게 그는 부서진 그릇을 정리하는 주모를 불렀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왕현의 질문에 주모는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인지 가슴을 치며 탄식했다.

“저 망할 악소(惡小) 패거리 때문에 요즘 죽지 못해서 겨우 살고 있습니다.”

그런 뒤에 그녀가 하는 말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근래에 보기 힘들어진 토지 겸병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지난해 고려는 그간 조사한 토지 정보를 토대로 토지 개혁을 하는 데 성공했다.

사병 혁파에 이어 진행한 탓에 권문 세족의 반발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거기까지 들인 기간만 3년이나 되었다.

그 이후로 이런 일은 거의 사라진 것으로 보고되었는데 막상 보니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그쯤 되니 왕현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치안을 담당하는 이들조차 저들에게 쩔쩔매는 겁니까?”

“얼마 전에 청주 목사로 온 이가 뒷배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 파다합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치안대가 저렇게 몸을 사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주모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청주에는 충청도 전체를 감찰하는 어사가 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에서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는 건지 의아했다.

왕현이 질책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정도전은 모처럼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일에 가장 큰 책임은 청주 목사에게 있으나 그가 관련된 것이라면 감찰사도 책임이 없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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