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55
이인복은 잠시 멍해졌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돌려서 말한 것도 아니고 동생의 입을 통해 직접 창건이란 말이 나왔다.
고려와 마두라이 술탄.
두 곳 중의 하나면 어딜까.
당연히 마두라이일 가능성이 컸다.
그곳에서 그는 재상 자리에 앉아 있고 고려인이 주요 관직에 꽤 올라가 있다.
더구나 이인임은 고려에서 펼칠 수 있는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 자신이 동생의 미친 짓에 손을 들어줘도 불가능했다.
상당히 강한 왕권을 지닌 고려다.
아무리 영의정인 자신이 역모를 꿈꾼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폐하에게 감히 칼을 겨눌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 분명하였다.
일단 민심이 폐하께 향하고 있었다.
그게 어디든 상관없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동생이라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것이라 못 들은 것으로 할 수 없었다.
다른 이의 명예와 관련되어 있다.
지금까지 홀치와 정휘 등이 피 흘리며 전장에서 수년간 쌓은 공적과 그보다 더 중요한 양국의 믿음을 무너트리는 일이다.
하필이면 이런 중요한 시기에 엉뚱한 생각을 한다는 것에 이인복은 분노했다.
“네 이놈! 반역을 하려는 것이냐.”
이인복은 술잔을 집어 던지려 했다.
간신히 그것만큼은 참았으나 이미 그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애써서 지켜온 집안에서 역적이 나왔다는 생각에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
더구나 그 결말이 어떨지 뻔했다.
지금까지 역모를 계획했던 이들을 그의 손으로 직접 처형하였기에 그 비참함을 누구보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처형은 운 좋게 면하더라도 가문 전체의 벼슬길이 막힐 가능성이 있었다.
“누가 반역을 한다는 겁니까?”
오히려 황당한 것은 이인임이었다.
그는 손사래를 치며 형을 진정시켰다.
자신이 한 말을 그렇게 받아들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말한 것은 말 그대로 새롭게 나라를 세운다는 뜻이다.
마두라이에서 생긴 버릇 탓이다.
그곳에서는 말을 옮기는 이들이 제대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어설프게 말하면 전혀 다른 말로 알아들으니 직설적으로 말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이런 실수가 나온 것이다.
한편으로는 형님의 지랄 같은 성격은 여전하다며 이인임은 내심 혀를 찼다.
“잠시 고정하시고 제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들으시지요.”
“역적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다.”
“조금 전에 말한 창건은 역성 혁명에 뜻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종의 제후국을 세우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이냐?”
제후국이란 단어를 듣자,
이인복은 흥분을 조금 가라앉혔다.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이인임은 현재 마두라이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것부터 이해해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타인에 대해 배척하는 것은 마두라이도 그리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솔직히 지금 꽤 난감한 상황이었다.
마두라이에서 재상 자리에 오른 그였다.
십 년 가까이 권세를 누리며 입지가 흔들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점차 제국의 모습을 갖추면서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영토는 점차 늘어나고 권력에 대한 도전도 심해지고 있었다.
궁궐 내의 암투도 심각해졌다.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타밀족.
그들의 영향력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정휘와 같은 장군들이 군권을 거의 차지하고 있었으나 한계가 있었다.
그들이 입을 모아서 견제를 하기 시작하니 술탄도 막무가내로 이인임을 지지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가장 큰 문제는 종교였다.
기본적으로 고려인은 불교를 믿는다.
마두라이에서 개종한 이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문제는 마두라이가 고려 못지않게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그로 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순하게 영토만을 놓고 싸우는 것은 아니라 더 치열했다.
힌두교와 이슬람은 공존하기 어렵다.
이건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이인복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참을성이 점차 고갈되어 가고 있었기에 본론으로 들어가길 재촉했다.
동생만 아니라면 벌써 술상을 몇 번이나 뒤집어엎고 가노를 시켜서 이놈을 포박하라 외쳤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그래서 술탄께서 마두라이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감폴라 왕국을 얻게 되면 그곳의 통치를 제게 맡기시려 합니다.”
“감폴라 왕국? 처음 듣는 곳이구나.”
나름 감찰사를 이끌며 바다 너머의 소식도 꼼꼼하게 챙기던 그였다.
하지만 감폴라 왕국은 처음 들었다.
그러나 이내 이인임의 설명을 들은 그는 어디 있는 것인지 알아챘다.
“마두라이 동남쪽에 있는 제법 큰 섬으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합친 것 정도입니다.”
“그곳이라면 나도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진우량에게 받아낸 해남성과 비슷한 규모겠구나.”
“그것보다는 더 클 것입니다.”
그제야 이인복은 이해가 됐다.
동생이 한 말을 자신이 섣불리 속단해서 오해한 것이었다. 하지만 애초에 오해를 살만하게 말한 것부터 잘못되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쩌면 고려에서 연주를 얻은 곳을 보고 따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저에게는 무엇보다 사람이 필요합니다. 형님이 저와 함께하신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글쎄다···.”
“제 밑에서 일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신 것이라면 제후국의 왕좌를 형님께 드릴 수도 있습니다.”
“날 떠보려는 것이냐?”
이인임의 욕망을 잘 아는 그였다.
어린 시절부터 동생이 유난히 권력과 명예에 목을 매던 것을 잊지 않았다.
쉽게 그 자리를 놓지 않은 인물이다.
그가 떨떠름한 얼굴로 바라보자 이인임은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됐다. 나는 그런 자리에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은 오로지 폐하의 곁에 머물며 이 나라를 천년의 고려를 만드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 거라 여기시는 겁니까?”
“신라의 예가 있지 않느냐.”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 멀리 서역까지 발아래 두었다던 그 대단한 칸도 이뤄내지 못한 것입니다.”
원나라가 아직 망하진 않았지만,
이인임은 그럴 거라며 단정 지었다.
이미 그런 징조는 여기저기서 보였다.
고려가 아니더라도 대주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만약에 요왕마저 등을 돌렸다면 벌써 원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쉬운 일이었다면 일생의 목표로 삼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내가 모시고 있는 폐하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어려운 일이기에 꿈을 꾸는 것이다.
지금 당장 손을 뻗어 이뤄낼 수 있는 것이라면 꿈을 꾸고 노력할 이유가 없다.
불가능한 꿈을 꾸는 형을 보고 이인임은 가까스로 답답하다는 표정을 감췄다.
“도대체 뭐가 다른 것입니까? 막내인 인민이도 그렇고 형님도 폐하에게 왜 그리 매료되어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네가 그분의 곁에 조금만 더 오래 있어 봤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았을 텐데 아쉽구나.”
“저는 그냥 제가 이룰 수 있는 목표를 향해 매진하겠습니다.”
“멀리서나마 응원해주마.”
완곡한 거절이 다시 한번 이어졌다.
아무리 애써도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인임은 씁쓸하게 웃었다.
대신 그는 다른 동생들을 데리고 떠나도 되겠냐며 물었다.
“녀석들이 결정할 일이니 마음대로 하거라. 인립이는 모르겠지만, 인민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긴 그 녀석은 약관 무렵부터 폐하의 곁에서 지냈으니···.”
“그리고 폐하를 뵐 때 나한테 말한 것처럼 앞뒤 자르고 말했다가는 해명하기 전에 목이 먼저 떨어질 테니 조심하거라.”
폐하가 그리 경솔한 분은 아니지만,
괜히 미움을 살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이인임이 고려에 있을 당시에 뭔가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 폐하가 내리는 그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았다.
이인임도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
두 형제의 대화는 내게도 전해졌다.
누군가 엿 들은 것은 아니고 이인복이 먼저 내게 와서 그 사실을 알려줬다.
그날 밤의 대화는 개인적인 것이라 볼 수 없는 터라 당연한 일이었다.
이인임과 독대를 하기 전에 언질을 준 덕분에 나는 만발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궁궐에 들어온 이인임은 이제 이인복의 동생이 아닌 마두라이 술탄국의 재상인 터라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았다.
“술탄께서 긴 기다림 끝에 양국이 혈연을 맺었다는 것에 기뻐하고 있사옵니다.”
그는 우선 축하 인사부터 건넸다.
재미있는 것은 공주가 이인임을 보더니 상당히 반갑게 맞이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에 그에게서 고려의 글과 말을 배웠다더니 꽤 친해 보였다.
절차에 따라 사신을 대접한 이후에 나는 그를 위해 독대의 자리를 마련했다.
“영의정에게 어제 있었던 일은 들었소.”
“황송하옵니다. 말실수에서 생긴 일이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하옵니다.”
“물론이오. 감폴라 왕국이라 했소?”
“그러하옵니다.”
이인임은 지도를 내게 건넸다.
그곳은 섬의 지형 때문에 훗날 인도의 눈물이라 불리는 스리랑카였다.
원래의 역사대로 흘러간다면 스리랑카는 앞으로 440년이 넘는 식민지 생활을 하고 내전도 벌어지는 기구한 운명을 지녔다.
감폴라 왕국은 대대로 타밀족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육지 것들은 걸핏하며 쳐들어와서 나라를 파탄 내놓고 갔다.
더구나 종교적인 차이도 있었다.
감폴라 왕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싱할라족은 고려처럼 불교를 믿는다.
차라리 고려인을 내세울 경우.
종교적인 면에서는 문제가 없어진다.
생각보다 머리를 잘 굴린 것 같았다.
더구나 이 무렵의 감폴라 왕국은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았다. 200년 뒤에 포르투갈을 상대로 싱할라족이 보여준 전투력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원래의 역사를 살펴보면,
정화의 함대가 그 땅에 들어선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 왕이 잡혀서 명나라로 보내졌을 정도로 허약했다.
수많은 전투를 치른 마두라이의 병사와 신식 무기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감폴라 왕국이 결국에는 이인임의 손에 떨어질 거라 확신했다.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다고 들었소.”
“폐하께서 윤허하여 주신다면 관직에 오르지 못한 채 은거하고 있는 이들을 위주로 권유해 볼 생각 중이옵니다.”
“그중에 이색도 있는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당연히 쌍수를 들어 반길 일이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이다.
이인임은 새롭게 왕국을 세우며 자신의 손발이 되어줄 이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반면에 나는 일도 안 하고 놀고먹으며 매일 상소문을 올리며 딴지를 거는 이들을 축출할 기회였다.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었다.
하지만 순순히 내줄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뭘 가져와야 이득일까 지금껏 생각해 봤으나 그다지 땡기는 게 없었다.
그나마 유명한 것은 커피와 홍차다.
커피녹병이 퍼지는 19세기 전까지 스리랑카에서 주로 재배하던 커피는 아직 그곳에 재배를 시작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홍차가 절실하지도 않았다.
결국에는 고무 나무 품종을 보내서 재배를 시킨 뒤에 다시 고무로 받아오는 것 외에는 고려에 이득이 될 것은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사람을 데리고 오는 건 어떨까.
감폴라 왕국이 어느 정도의 인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턱없이 부족한 노동력을 채워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지금의 고려는 늘어난 영토를 제대로 관리조차 못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노예를 바라진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10년 단위로 계약하는 외국인 노동자라고 보는 게 옳았다.
그들이 삼강 평원 일대를 개척만 해놓고 떠나도 식량 수급이 수월해질 것이다.
화포 일부와 고려의 선박을 이번 정벌에 지원해주겠다고 하자 생각보다 쉽게 이인임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고려의 말을 익힌 이들이 고려에 유학을 오고 싶어 했사옵니다.”
“개간이 꽤 고된 일인데 문제가 없겠소?”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그보다 아까 주신 성리학자들의 명단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명성이 높은 이들인데 마두라이로 가려고 할지 잘 모르겠사옵니다.”
나름 깊이 고심해서 쓴 명단이다.
거기에는 이인임이 원하던 이색처럼 꽤 명망 높은 이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데 아마 쉽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10년 단위의 파견 형식이라 포장을 해놨으나 대부분 거절할 것이다.
하지만 이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최대한 도와줄 생각이었다.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면 되지 않는가.
“내가 직접 명단에 오른 이들에게 칙서를 써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