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47
함경도에서 출발한 김삼선.
그가 곧장 향한 곳은 장춘이었다.
당장 요왕을 직접 뵈러 가고 싶었으나 자신을 만나줄 거란 보장이 전혀 없었다.
그에게 자신은 그저 조그만 여진의 부족을 이끄는 보잘것없는 존재일 것이다.
그래서 장춘으로 향한 것이다.
그곳에는 요왕의 사위이자 옷치긴 왕가의 명장(名將)인 아리크타이가 있었다.
장춘은 여진족이 적지 않게 사는데 알려진 바에 의하면 아리크타이 역시 이곳 출신으로 여진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한다.
위험에 처한 여진을 좌시하진 않을 거란 기대감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자고로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다.
적어도 그라면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너무 큰 기대였을까.
“그대들과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데 왜 하필 나를 찾아온 것이오?”
아이락이라 불리는 마유주(馬乳酒)가 담긴 잔을 들고 있는 아리크타이는 냉랭한 시선으로 자신을 찾아온 김삼선을 바라봤다.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온갖 수모를 당하며 정말 어렵게 잡은 자리였기에 더 실망스러웠다.
답답한 것은 아리크타이도 마찬가지다.
여진의 피가 흐르는 것은 인정했지만, 이제껏 자신이 여진인이라 생각한 적은 없다.
정확하게 따지면 1/4만 여진이라 할 수 있었고 고려가 동쪽 끝에 있는 변방을 조금 더 많이 차지한다고 바뀌는 것은 없었다.
더구나 여진은 골칫거리다.
그들은 이 부근까지 와서 약탈해갔다.
그때마다 요왕께 질책을 받고 있었기에 당연히 곱게 바라볼 수 없었다.
물론, 김삼선과 그들이 다른 부족인 것을 알기에 그나마 참고 있는 것이었다.
“고려를 저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결국에는 칸에게도 위협이 될 것입니다.”
김삼선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 돌아가면 어떻게든 모든 여진의 힘을 모을 생각이다. 이미 함경도에서 여러 부족을 통합해서 상당히 크게 세를 불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해결책이 있었다.
만주에서 견제를 해주면 된다.
요왕이 이끄는 병력이 요동을 공격하면 함경도로 이동한 병력이 되돌아갈 것이다.
그들만 빠져도 여진에게 어느 정도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아리크타이는 여전히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양동 작전이라··· 썩 내키지 않는 제안이오. 우리가 얻게 될 것이 그리 많지 않소.”
“여진이 무너진 후에 다음이 어디일 것 같습니까? 당연히 고려는 고토(古土) 회복을 주장하며 만주로 향할 것입니다.”
“고토라니,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리크타이는 헛웃음이 터졌다.
아마 고구려나 발해 같은 고려 이전의 나라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사이에 만주의 주인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렇게 따지면 모든 땅은 위대하신 칭기즈 칸의 것이다.
그라고 요동이 탐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옷치긴 왕가에게도 기회가 있었다.
나하추와 홍건적이 연달아 고려를 상대했을 당시에 군대를 이끌고 나섰다면 요동은 물론이고 고려도 손아귀에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럴 여건이 안 되었다.
‘그 일만 아니었어도···.’
아리크타이에게도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내부의 사정이 있었다. 현재 옷치긴 왕가는 완전히 개판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네 명의 장성한 아들이 후계자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하는 중이다.
온갖 음모와 암투가 판을 치고 있었다.
이게 다 암살 시도 때문이었다.
몇 해 전에 요왕 아자스리는 술잔에 탄 독을 마셨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으나 건강이 나날이 나빠지고 있는 중이었다.
의원의 말에 의하면 언제 승하하셔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라고 했다.
더 열 받는 것은 주모자가 잡히지 않았다.
누군가는 왕자 중의 하나가 손을 쓴 것이 아니냐며 의심했고 누군가는 사위인 자신을 의심하기도 했다. 이곳 장춘에 온 것도 후계자 자리를 탐내지 말라는 경고이자 누구의 편에서도 서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더구나 홍건적 때문에 피해가 적지 않은데 지금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지난해 가을이 끝나갈 무렵.
장춘은 홍건적에게 공격당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수만 명에 달하는 홍건적에 의해서 자칫하면 함락될 뻔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격이었다.
그 탓에 최강이라 자랑하던 기마병마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발이 묶였다.
더구나 홍건적도 수천 명에 달하는 철기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병력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 호각지세였다.
결국에는 아리크타이가 이겼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피해가 무척이나 컸다.
홍건적을 전멸시키는 데 성공은 하였으나 장춘의 병사도 절반이 죽었을 정도다.
지금은 그나마 칸이 보낸 추가 병력이 보충되었지만,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성벽 곳곳이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고려를 공격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은 변함이 없소. 아마 칸을 직접 뵈어도 같은 대답을 얻게 될 것이오. 만약에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거든 언제든 반겨줄 테니 부족민을 모두 데리고 이쪽으로 오시오.”
아리크타이는 계속해서 설득하려 하는 김삼선에게 다시 한번 단호하게 거절했다.
대신 그는 오히려 자신에게 의탁하라고 제안을 했다. 인구는 한 명이라도 많으면 좋은 것이고 여진족은 타고난 기마병이다.
생각보다 아리크타이의 야심은 컸다.
지금은 비록 후계자 다툼에서 벗어나 있지만, 오히려 저들이 자멸하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품고 있는 마지막 목표는 원황실이 있는 대도였다.
서로 생각하는 것이 달랐다.
당연히 마음에 드는 결론이 안 나왔다.
김삼선은 아무런 소득 없이 아리크타이와 만남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집무실에서 나온 그는 동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는 대안이 없기에 막막했다.
“하아··· 여진은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갔다.
마침내 개구리가 깨어나는 경칩(驚蟄)이 되자 고려군도 서서히 움직였다.
북부의 추위가 가시려면 아직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겠지만, 점점 더 다가오고 있는 출정을 이제부터 준비해야 했다.
이번 출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최영은 무엇보다 기동력을 중요시했다.
당연히 그 선봉에 서는 이들은 서별초와 동별초를 이끄는 이원계와 조인벽이었다.
여진을 상대로 보병이 아무리 많아 봐야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대략 기마병의 수는 4천 명.
동원되는 말이 만 마리가 넘는다.
요서 지역에 배치된 정찰대를 제외한 고려가 보유한 대부분의 말이 이곳에 배치되었다.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일이었다.
그들이 팔아치운 말이 이제는 자신을 공격하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봄꽃의 꽃망울이 터질 무렵.
드디어 고려군은 화주 지역에서 출발해서 두만강까지 거침없이 북진을 시작했다.
그들을 가로막는 이들은 전혀 없었다.
서달과 변안열이 두 방향으로 나뉘어서 진군한 뒤에 도착하는 땅에 깃발을 꽂으면 그곳은 이제 고려의 땅이라 할 수 있었다.
여진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병력이 아니었다.
더구나 수많은 전투를 치른 고려군은 대부분이 정예화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부족 단위로 수십에서 수백 명이 말을 타고 달려와도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 정도는 날파리 수준에 불과했다.
대부분은 화승총과 화살 세례를 받고 불필요하게 피를 흘린 뒤에야 포기했다.
그래도 지금까지 공을 들였기에 대부분의 여진족은 순순히 고려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이미 상당수의 여진족이 토관제도라 불리는 경로를 통해 함경도의 관리로 등용됐다.
“길주 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있던 여진족은 모두 내투하기로 하였습니다.”
“무창도 정리를 끝냈습니다.”
“이제 남은 곳은 어디요?”
“두만강 하류에 있는 회령과 온성 부근만 남았습니다.”
최영은 현황판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반도의 지도가 있었다.
각지에서 온 전령이 하루도 빠짐없이 현재 상황을 전달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현황판에 놓인 말의 위치는 바뀌고 있었다.
이제 두만강 이남은 거의 정리되었다.
커다란 전투도 없이 너무 손쉬웠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기에 아직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두만강 이남은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곳에 불과했다.
진짜는 두만강을 넘은 이후에 시작된다.
송화강 부근은 고려의 영향력이 닿지 않은 곳이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쯤 되자 최영은 현황판에서 시선을 떼서 부관에게 명령을 내렸다.
“사령부를 이동할 수 있게 준비하거라.”
더는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슬슬 서달과 변안열도 각자 맡은 지역을 떠나서 집결지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따로 준비할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미 다 예정되어 있던 터라 최영을 비롯해서 사령부에 소속된 참모진만 움직이면 되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백두산이었다.
다시 고려의 품으로 돌아온 그곳의 천지에서 출정 의식을 마치고 진군할 예정이었다.
어차피 송화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강이기에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
마침내 백두산 부근에 고려군이 모였다.
그동안 피해가 생긴 것을 다 합쳐도 수백여 명에 불과할 정도였다. 하지만 백두산은 4월이 다 지났음에도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발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대로 된 길조차 없을 정도였지만,
최영과 장군들은 계속해서 정상까지 걸었다.
나름 체력 하나는 잘 관리한 탓에 먹물을 묻히며 사는 참모진의 일부를 제외하면 다들 힘든 기색이 없을 정도였다
오히려 흥분한 얼굴이었다.
백두산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함경도에 배치된 장수들 대부분이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고려의 품으로 되돌려 놓기를 염원하고 있었다. 수년의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날이 왔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참이나 오르자 마침내 그들은 정상에 있는 천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변안열과 서달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는데 날씨가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것이 가득해서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거 불안한데···.”
서달은 난감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이건 마치 앞으로의 출정이 험난할 거라 말하는 것 같은 기분이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그는 이런 민속신앙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는 편이었다. 그건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아 보였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변안열이 그를 질책했다.
“쉿!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게.”
장수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순간.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지게 된다.
그가 주의를 주자 서달은 그와 관련된 말을 더는 꺼내지 않았다. 사적으로는 친분이 상당한 두 사람이나 엄연히 변안열은 이번 원정에서 병마부사의 자리를 맡고 있었다.
변안열은 일단 제단부터 쌓게 시켰다.
주변에 있는 돌을 모아서 무릎 높이로 쌓은 뒤에 병사들이 지고 올라온 봇짐을 풀어서 과일과 여러 제사 음식을 그 위에 올렸다.
하지만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하늘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해가 금방 떨어진다.
올라오는데 걸린 시간을 고려하면 이제 슬슬 내려가야 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곳에서 밤을 지새우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다들 얼어 죽을 것이다.
변안열은 하염없이 천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최영에게 다가섰다.
“더 기다리실 것입니까?”
“벌써 준비가 다 끝난 것인가.”
“이제 슬슬 숙영지로 돌아가야 합니다.”
“알겠네. 지금 바로 시작하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최영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에 한 줄기의 빛이 내려왔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이 열렸다.
상당히 급격한 변화였는데 산 위에 가득 고인 물에 햇살이 비추자 반짝이기 시작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당히 신비로운 풍경을 보고 다들 넋을 잃었는데 최영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급하게 제단 위에 놓인 향에 불을 붙였다.
따로 준비한 축문이 있었지만,
그걸 꺼낼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한 나머지 그는 지금껏 가슴속 깊은 곳에 담아뒀던 진심을 담아서 외쳤다.
“한민족의 성지에서 천지신명에게 고하노니, 과거 선조의 영광을 재현될 수 있도록 고려의 앞길에 광명이 가득하길 기원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