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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46화 (14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46

김삼선이 살길을 찾을 무렵.

변안열과 서달 등의 장군들은 최영과 고려의 2군이 머무는 화주성에 도달했다.

하지만 요동에서 함께 출발한 모든 병력이 그곳까지 같이 이동하진 않았다.

모두를 품기에는 화주가 너무 작았다.

분명 화주는 함경도의 중심이다.

가장 큰 곳이라 장담할 수는 없으나 과거에 쌍성총관부도 있던 성이다.

하지만 평소 화주성에 머물 수 있는 병력은 고작 수천 명이 한계였다.

그 이상은 과포화 상태에 가까웠다.

애초에 함경도와 화주 인근은 다른 지역에 비해 무척이나 낙후된 곳이다.

북부 개발을 할 때도 평안도 위주로 진행되었고 행정구역상 면적도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제일 작았다.

거의 절반쯤 되려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두만강 이남을 고려로 다시 가져와야 정상적인 행정구역이 완성된다.

그러다 보니 면적대비 병력의 분포를 보면 이곳만 한 곳이 없었다.

당연히 숙영지는 잘 마련되어 있었다.

요동에서 출발한 병력은 화주성 인근의 성과 숙영지에 나눠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은 그곳에서 재정비를 하면서 이제 막 시작된 이번 겨울을 날 것이다.

변안열이 성문 앞으로 다가서자.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성문 안쪽에서 화주성의 관리들과 함경도의 안렴부사인 김득제가 걸어 나왔다.

김득제는 판도 총랑 김득배의 동생이다.

내수사의 곽충수와 함께 고려의 재정을 담당하는 형을 두고 있는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더 좋은 자리로 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수년째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당연히 장군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안렴사는 몇 번 바뀌었으나 부안렴사인 그는 초창기부터 줄곧 자리를 지켰다.

2군의 주둔지인 화주의 특성상 문관과 무관은 긴밀한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대승을 거뒀다는 소식은 전령을 통해 들었네. 병마사와 안렴사께서 변 장군을 기다리고 계시네.”

김득제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고려의 승전보는 이미 전달되었다.

홍건적을 막은 것도 모자라서 오히려 요서 지역의 일부를 점령했다는 것은 아무리 들어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위험을 기회로 만든 것이다.

“어디에 계십니까?”

“두 분 모두 사령부에 계시네.”

“바로 그리 가보겠습니다.”

변안열은 곧장 움직였다.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장군에게 복귀 신고부터 해야 했다.

당연히 안내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다.

변안열은 물론이고 이원계와 서달 같은 장군들도 화주성은 상당히 익숙했다.

더구나 이원계는 이곳에서 태어났다.

개성과 요동 그리고 대마도까지 다녀온 그는 모처럼 돌아오는 고향인 터라 상당히 기뻐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비록 아버지인 이자춘은 졸하였으나 흑석산의 저택에는 여전히 친인척이 살고 있는 중이었다.

사령부로 함께 걸어가던 중에 서달은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옆구리를 찔렀다.

“고향 집에 오니 그렇게 좋은가?”

“모처럼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지 않나. 자네도 고향을 떠난 지 오래되었는데 생각날 때가 없는가?”

“전혀. 내 기억 속의 그곳은 굶주린 이들이 즐비한 악몽 같은 곳이네.”

서달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원계가 자신을 떠본다고 여겨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게 그의 진심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고향은 아사하거나 전염병에 걸려 죽은 이들이 길거리에 수북하게 쌓여서 방치된 곳이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 만약에 주덕유의 가족과 함께 고려로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그는 물론이고 가족 모두가 방치된 시체들 가운데 하나가 됐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언젠가 돌아갈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때는 혼자가 아니라 고려군과 함께 백성들을 고난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발걸음이었으면 하네.”

“하하! 생각만해도 기분 좋은 일이군. 나 역시 그랬으면 좋겠네. ”

“하지만 그 이전에 이곳 함경도부터 하루빨리 정리해야겠지.”

대도 정벌론을 슬쩍 언급했지만,

함경도가 더 시급하다는 것은 서달과 이원계를 비롯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후방이 안정되어 있어야 했다.

현재 고려에 가장 위협이 되는 일은 만주의 요왕과 삼강 평원 주변의 여진족이 손을 잡고 동시 공격하는 것이다.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요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몇 년 사이에 갑자기 팽창하고 있는 고려에 대해서 경계심이 가득할 것이다.

잠시 두 장군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최영이 기다리고 있는 사령부 건물이 보였다.

그곳은 멀리서도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2군의 사령부에는 항상 해동청 문양의 부대기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변안열이 돌아왔으니 그의 부대기와 함께 서달의 것도 나란히 걸릴 것이다.

세찬 겨울바람에 펄럭이는 부대기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니 안렴사 홍언박과 병마사 최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 길을 다녀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최영의 환대는 길지 않았다.

오히려 허무할 정도로 금방 끝났다.

마치 인근 지역에 순찰을 다녀온 이들을 맞이하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하지만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평소 그의 화법이 그런 편이었다.

중언부언(重言復言)은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미사여구도 불필요하다고 여겼고 보고를 받을 때도 최영은 최대한 간결하게 요점만 말하도록 시켰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져봤자 더 혼란만 가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차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은근히 뒤에서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는 터라 그의 밑에 있는 장수들은 최영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더구나 이방실과 함께 최영은 무패의 신화를 쌓아가는 고려 최고의 명장이다.

“이번 전투에서 여기 있는 이원계 장군이 상당히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변안열은 이원계를 띄워줬다.

실제로 그의 공이 적지는 않았다.

서달도 언급해줬는데 한편으로는 변안열 얼굴에 어딘가 모르게 씁쓸함이 가득했다.

이번에 요서 전투에서 자신이 이끌고 간 지원군은 보조 역할에 불과했다.

최영도 그걸 눈치채고는 뼈 있는 말을 했다.

“우리가 싸울 전쟁터는 이곳에 있으니 이제 시작이라 생각하시오.”

여진과의 전쟁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다.

여진족의 특수함을 생각하면 전쟁이란 단어를 쓰는 것도 조금 무리가 있었다.

차라리 홍건적처럼 한 곳에 무리 지어 있으면 대응하는 것도 쉬울 것이다.

우두머리도 하나가 아니다.

심지어 유목 생활을 하기에 본거지가 어디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단순하게 병력을 일으켜 토벌을 떠나봤자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은 이쪽이었다.

보급품을 길바닥에 뿌리는 꼴이다.

그들은 마치 미꾸라지와 같았다.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이들이다.

지금까지 최영와 홍언박은 유화 정책을 수년째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능하면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여진이 고려의 밑으로 들어오길 바랐다.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함경도 부근의 여진족 상당수가 고려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고 봐도 되었다.

당장 고려가 손을 놓으면 곤란해지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것은 역시 조인벽이었다.

대대로 이 지역에서 쌓은 그의 가문이 가진 영향력이 작다고 보긴 어려웠다.

하지만 어디를 가나 옹고집 같은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김삼선 형제들 같은 여진족이었다.

그들은 두만강을 넘나들며 고려와 손잡은 여진족을 대상으로 약탈을 거듭했다.

“드디어 전하의 승낙이 떨어졌으니 출정하기로 예정된 봄까지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오.”

최영은 과제부터 던져줬다.

이제는 웅덩이에 소금을 뿌릴 때가 됐다.

아직 물을 흘리고 있는 미꾸라지들에게 악몽과 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더는 관용 같은 것은 없었다.

다가오는 봄이 되면,

함경도 전체를 손에 넣을 것이다.

그리고 두만강 너머로 진군하여 아직 고려에 굴복하지 않은 여진족에게 강제로 선택을 강요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당근을 주었으니 사정없이 채찍을 휘두를 때가 되었다.

“철저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선봉은 저 서달에게 맡겨만 주십시오.”

“서별초 역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군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지금까지 홍건적 등과 싸워서 이뤄낸 성과가 적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기백이었다. 대부분은 이번이 공을 세울 기회라 여겼고 누군가는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이 끝나길 바라고 있었다.

그쯤 되자 안렴사인 홍언박이 최영을 바라보며 만류했다.

“다들 먼 길을 와서 피곤할 테니 준비한 연회부터 시작하시지요.”

최영도 자신이 조금 흥분했다는 것을 깨닫고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장군들이 씻고 환복할 시간을 준 뒤.

다시 모인 곳에는 작은 연회가 마련됐다.

화려하진 않으나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것이 있었다.

서달은 자신의 상에 놓인 김이 나는 뽀얀 것을 보고 젓가락으로 찔러 보았다.

아무런 저항 없이 쑥 들어가는 것을 본 그는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이야··· 도대체 어떻게 키웠길래 토란이 이렇게 크답니까?”

지금까지 그가 먹었던 토란은 그리 큰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어지간한 성인의 주먹 정도의 크기는 되었다.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를 보고 병사들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그건 그의 오해였기 때문이었다.

서달이 찔러본 것은 올해 재배한 감자다.

지난해 장사의가 가져온 감자를 가지고 고려 북부의 요동과 함경도 등에 심었는데 마침내 첫 수확에 성공한 것이다.

당연히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 싹을 틔우기 전에 썩어서 버려야 했다.

아직 재배법도 확실하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이 땅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나마 나온 수확물 중에 씨감자를 제외한 일부를 내놓은 것이다.

뒤늦게 설명을 들은 서달을 비롯한 장군들은 다들 신기한 듯이 바라봤다.

“이거 설마 매운 것은 아니겠죠?”

심지어 무관 하나는 근심이 가득했다.

응양군 출신인 그는 지난해 평양에 머물며 전하의 근처에서 숙위를 했다.

당연히 고추의 악명은 그 역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오죽하면 기미 상궁이 그것 때문에 여럿이 바뀔 정도였다.

한번은 호기심이 가득한 응양군 하나가 고추를 슬쩍해서 나눠서 한입씩 먹었는데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줄 알았다.

그때 느꼈던 고통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한 그였다. 차라리 화살을 맞는 것이 덜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전하께서 특별히 하사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양치 말고 드셔보십시오.”

홍언박은 웃으며 재차 권했다.

무관들의 반응을 보는 재미가 꽤 쏠쏠한 것 같았다. 전하가 하사한 거란 말을 들은 무관들은 어쩔 수 없이 수저를 들었다.

하지만 애써 감추려던 떨떠름한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포슬포슬한 감자는 맛있었다.

알싸한 토란과는 완전히 달랐다.

오히려 설당을 뿌린 것처럼 달콤했다.

목이 조금 막히기는 했으나 감자와 함께 내놓은 살얼음 낀 동치미와 너무 잘 어울렸다.

“씨감자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서 내년부터는 함경도 전역에서 감자를 재배할 예정이니 조만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게 될 것이오.”

홍언박은 감자에 대한 애착이 깊었다.

벼농사에 적절치 않은 기온을 가진 함경도였다. 안렴사로서 그가 세운 가장 큰 목표가 식량을 자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날씨를 바꿀 방법은 없었다.

그러던 중에 감자가 나타났다.

바다 너머에서 가져왔다는 감자는 생각보다 맛도 좋고 이 지역의 기후에도 알맞은 것 같았다. 오히려 비가 많이 오는 남부 지역에서는 재배가 어려웠다.

어쨌든 맛있는 음식과 모처럼 맛보는 도수 높은 화주(火酒)를 입에 대자 그제야 다들 긴장이 풀린 것처럼 보였다.

그와 더불어 평양에서 미리 보낸 전하의 하사품도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한껏 흥이 오른 탓인지 최영을 대신하여 변안열이 아라길주를 가득 채운 잔을 들고 외쳤다.

“전하의 만수무강을 위하여!”

다들 목청껏 소리친 탓일까.

사령부의 지붕에 앉아 있던 새들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미천사의 변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당연히 윤해의 사망 소식도 몰랐다.

아마 그걸 알았다면 다들 침울한 표정으로 애도의 잔을 기울였을 것이다.

변방 중의 변방인 함경도라 그들은 항상 이렇게 한 박자씩 늦었다.

그렇게 어느 해보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지나 본격적인 북벌이 시작되는 해로 기록된 임인년(1362년)이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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