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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45화 (145/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45

이인복은 꽤 놀란 표정이었다.

조금 뜬금없는 지시이기는 했다.

그러나 갑자기 정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즉위하고 있는 기간 중에 언젠가는 정리해야 하는 일이었다.

미천사에서 습격한 이들이 광신도가 아닌 훈련된 병사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나는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홍건적이나 왜구 같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 문제는 상당히 오래된 것이다.

무려 신라 시대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줄곧 이어져 내려오는 고질병과 같았다.

과거에는 지방의 호족이 군벌이었다.

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태조는 수많은 혼인을 하며 고려를 건국했다.

“사병 혁파는 쉽지 않을 것이옵니다. 더구나 어찌하여 지금이옵니까? 괜히 벌집을 건드리는 것일 수도 있사옵니다.”

이인복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병 혁파가 중요한 이유는 저들이 가진 반항할만한 수단을 없앤다는 것에 있다.

이건 개혁의 끝으로 가기 위한 선행 과제와 같은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토지 개혁과 같은 다른 개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다.

일단 손발을 묶어놔야 불만이 있더라도 엉뚱한 짓을 할 생각조차 못 할 것이다.

지금이 그나마 쉬운 시기다.

‘어느 때보다 군사력이 강성한 지금이 반란의 위험성이 낮은 적기이지.’

“병권은 국가의 권세인데 통속하여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병혁(兵革)을 사가(私家)에 감추는 것은 예가 아니오. 중원만 보더라도 사병을 길러낸 이들이 난을 일으켜 몰락한 나라가 많지 않소.”

나는 훗날 권근이 올리는 상소문의 논리 중의 일부를 기억해내서 도용(?)했다.

당연히 이인복은 그 문제에 대해서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내가 하는 말이 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사병을 혁파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진 않았다.

“현재 고려의 권문 세족과 지방의 유력한 가문이 사사로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소?”

“정확한 수는 알지 못하나 적어도 만여 명은 넘어갈 것 같사옵니다.”

“아니, 그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오.”

이 시대의 사병은 구분이 어렵다.

집안의 노비인 가동(家僮)과 문객이 사병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악소(惡小)라 불리는 불량배를 고용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문객은 권력가의 집에서 먹이고 재워주는 이들을 의미했다.

백여 년 전의 최충헌의 경우.

문객만 삼천 명이나 된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 경계선이 희미하다는 것이다.

칼을 쥐여주면 곧장 사병으로 변하게 되는데 사병을 금지한 평양에도 문객으로 위장한 이들이 적지 않다고 알고 있다.

그 부분은 이인복도 인정했다.

“하오나 문객이라고 다들 사병이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옵니다.”

“사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소.”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사옵니다. 이 일은 소신이 도당에서 다른 문무 대신들과 논의하여 방안을 찾아보겠사옵니다.”

“그리하시오.”

내가 직접 할 생각은 없었다.

해결책은 누구보다 그들이 잘 안다.

여전히 도당의 대부분을 권문 세족이 차지하고 있으니 스스로 방안을 가지고 와야 나중에 딴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논쟁이 벌어지겠지만, 통과되지 않을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끝판왕이다.

납득할 만한 결과가 아니라면 내가 직접 나설 텐데 그러면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력한 개혁을 밀어붙일 것이다.

도당도 한두 번 당한 것이 아니다.

이제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오나 도당에서 논의하기 전에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옵니다.”

“어느 정도면 되겠소?”

“당장 처리해야 할 시급한 사항이 많기에 적어도 달포 이상은 있어야 하옵니다.”

“그렇게 하시오.”

이인복은 감찰사에 있을 때보다.

최근에 더 많은 업무를 보고 있었다.

얼마 전에 요서 지역의 일부가 고려로 편입되었고 함경도 너머의 여진 지역을 향해 군대가 이동하고 있는 중이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조만간 온천에 다녀올까 하오.”

“아니되옵니다. 이제 막 정신을 차리셨는데 어딜 또 가신단 말입니까. 당분간 궁궐에 머물며 자중하시옵소서.”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려야 하지 않겠소. 아마 지금쯤 시전 거리에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을 것이오.”

온천을 꽤 좋아하지만,

물에 들어가려고 가는 것은 아니다.

상처가 아물기 전까지는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도 궐 밖으로 나서려는 이유는 내가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더구나 이런 일을 당했다고 벌벌 떨며 궁궐에 처박혀 있을 생각은 없었다.

감옥이나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호화로운 감빵 생활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그런 삶을 바라지 않았다.

답답해서 그 전에 말라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인복이 극구 만류하기는 했으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때마침 침전에 들어선 가진이 그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몸으로 어딜 간다는 말씀이십니까?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나갈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가진은 꽤 초췌한 모습이었다.

지난 이틀 동안 제대로 잠도 못 자고 내 곁에서 깨어나기만 기다린 탓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상당히 안쓰러웠다.

아마 자신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거라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분명히 그럴 것이다.

내가 아는 그녀는 그랬다.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성격을 가진 가진은 이번 일을 꽤 오래 기억할 것이다.

더구나 그로 인해 가까운 곳에서 호위를 해주던 이들까지 죽었으니 PTSD가 온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모두 내가 만든 인과응보 아닐까.’

오히려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돈은 승려 출신으로 사찰에 있어야 하는데 백련교도가 되어서 갑자기 나타날 줄은 나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아마도 불교 개혁 때문인 것 같았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유력했다.

모든 백성에게 사랑받을 수는 없다.

당연히 나를 미워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부분 개혁과 관련되어 손해를 봤거나 아예 가문이 망한 집안도 상당히 많다.

광신도 외에도 내게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건 내가 감수해야 할 몫이다.

“흠흠··· 소신은 그만 가보겠사옵니다.”

이인복은 곧장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다.

이제 막 일어났으니 할 이야기가 많을 거라 여긴 것 같았는데 가진은 그를 그냥 보내지는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그에게 그녀는 경고(?) 했다.

“전하의 옥체에 생긴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 전까지는 영의정께서 최대한 많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한마디로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면 쉴 수 있게 나를 가만 놔두라는 뜻이었다.

이인복도 곧장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고 그리하겠다고 대답을 한 뒤에 일어났다.

그가 나가자 가진은 내게도 반쯤 강제적인 휴식을 권유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하께서 달포 정도 쉰다고 고려가 당장 망하지는 않습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조금 쉴 때가 됐다.

지난 십 년 동안 정말 쉬지 않고 달렸다.

이번 기회에 아이들과 시간도 갖고 다음 십 년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처리해야 할 것이 있었다.

“윤해 장군과 홀치 대부분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소. 그들의 장례는 어떻게 되었소?”

“우의정과 함께 제가 직접 챙기고 있습니다. 유가족에 대한 예우도 섭섭하지 않게 할 생각입니다.”

“밀직사에 있는 백문보에게 말해서 공신첩도 준비해주시오.”

지금까지 공신첩은 내린 적이 없다.

수없이 많은 승전이 있었는데 미뤄온 이유는 봉작을 주지 않는 이유와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들인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심지어 윤해의 아들인 윤호는 주덕유와 함께 대마도에 있다. 아무리 빨리 와도 장례는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껏 아무런 불만도 없이 내 명령대로 주덕유의 곁을 지키며 외지를 떠돌고 있기에 더 마음이 아려왔다.

‘윤호를 어떻게 본단 말인가.’

*

광신도의 기습이 있고 난 뒤.

고려는 상당한 여파에 시달렸다.

감찰사를 중심으로 병사들이 동원되어 숨어 있던 수많은 교도를 사로잡혔다.

그리고 평양 외곽의 움막촌은 불에 태워져서 모두 사라졌다. 백련교 대부분이 그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까워하는 이는 없었다.

윤해 장군을 잃은 응양군에게 자비를 바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백성들의 분노도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다.

10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백성들도 직접 그걸 느끼고 있었다.

목화를 키워낸 덕분에 예전보다 겨울을 따뜻하게 지낼 수 있었고 이앙법의 보급과 상업의 발전도 눈부실 정도였다.

최근 고려의 백성 중에서 굶는 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인력이 부족했다.

북부에서는 축성하는 이들에게 양곡을 삯으로 주었고 남부에서도 도로를 놓는 일이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농사할 땅이 없더라도 일을 할 수 있었고 가족을 부양할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백련교라는 사이비 광신도들이 그걸 모조리 무너뜨리려고 한 것이다.

“감히 임금님을 해하려고 하다니 말세로구나!”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어찌 그런···.”

“이번 기회에 고려를 어지럽히는 백련교도들의 씨를 말려야 합니다.”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험악한 일이 벌어졌다.

그때는 체제 전복을 시도하기 전에 잡혔으나 이번에 벌어진 미천사의 변은 실제로 칼을 들고 임금의 목에 겨눴다.

그런 탓에 백성들 사이에서는 백련교의 교도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는데 거의 마녀 사냥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만큼 적의가 상당히 강했다.

모든 백성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니 대부분의 백련교도는 붙잡혔다.

옆집의 수저가 몇 개인지 다 아는 시대라 가능한 일이었다. 간신히 잡히지 않더라도 조직은 완전히 와해했다.

애초에 점조직이었다.

지도자 대부분 죽거나 변절했다.

아래 있는 이들이 뭉칠 구심점이 없었다.

그렇게 고려 전체가 시끄러울 무렵에 함경도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마침내 원병으로 떠난 변안열이 5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돌아온 것이다.

고려군이 화주로 들어갈 무렵.

행군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인근에 있는 눈 내린 야산에 있는 그들은 하얀 옷을 입고 있기에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은 수많은 고려군을 보고 질린 듯한 표정을 지으며 수군거렸다.

“병력의 수가 엄청납니다.”

“네 눈에는 얼마나 되어 보이느냐?”

“적어도 4만 명은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 이상은 되는 것 같구나.”

그들은 함경도 인근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여진족을 이끄는 김삼선과 김삼개 형제였다.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이 함경도로 온다는 말에 나와본 두 형제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요즘 꽤 힘든 나날을 보내는 두 형제였다. 예전처럼 가뿐하게 약탈을 하고 돌아올 수 있었던 고려가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조인벽이 이끄는 동별초가 사사건건 그들의 행보를 방해했다.

거기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모든 곳을 막을 수 없기에 틈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 정도의 병사들이 함경도 인근에 깔리면 꼬리가 잡힐 것이다.

그게 아니면 부족이 머무는 본거지를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다.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었다.

당장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나 앞으로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 분명했다.

지금껏 서쪽에 병력을 집중하던 고려가 갑자기 동쪽으로 이동했다.

그게 뭘 의미하는 건지 뻔했다.

다음 차례는 여진족이었다.

애초에 정해진 수순처럼 느껴졌다.

정확하게 원나라의 상황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얼마 전에 대도가 함락 위기였다는 소식은 그 역시 들었다.

유목 민족답게 생각보다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는 덕분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김삼선은 어쩌면 지금이 자신은 물론이고 여진족의 미래가 결정되는 중요한 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최근에 고려의 기세가 대단했다.

정말 저들이 마음먹는다면 여진의 여러 부족이 나눠 가지고 있는 영토는 금방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형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김삼개는 어려서부터 형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랐다. 김삼선은 자신이 아는 누구보다 머리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번에도 형이 해결책을 찾을 것이라 믿었다.

고려군의 행렬이 거의 다 지나간 뒤에야 김삼선은 마침내 입을 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만으로는 역부족이구나. 만주에 있는 요왕을 뵈러 가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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