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44
가진의 말이 맞았다.
그를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만약에 그들이 아닌 광신도와 마주쳤다면 아마 이 자리에서 끝장났을 것이다.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지란은 믿을 수 있는 자인가?
이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고려에 바쳤다.
역사에 기록된 그의 행적을 봐도 백련교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작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신소봉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큰 소리는 내지 말거라.”
갑자기 어둠 속에서 내가 걸어 나오자 단숨에 모두의 시선에 내게 쏠렸다.
혹시나 싶어서 미리 경고해야 했다.
이지란의 목청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여기서 내게 인사한다고 소리치면 발각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나를 바로 알아보진 못했다.
어둠이 짙어서 당연한 일이었는데 설마 여기서 내가 나올 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독대를 해봤던 터라 이지란은 머지않아 나를 알아보았다.
“설마···?”
그는 살짝 엉거주춤했다.
엎드려서 인사를 하려다가 조용히 하라는 말을 떠올리고 애매한 자세로 멈췄다.
어딘가 고장 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도 아예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변고가 있었음을 곧장 알아챘다.
하긴 몰라볼 수가 없었다.
홀치는 피투성이였고 내 어깨에는 여전히 부러진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걸 본 이지란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나직하게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옵니까?”
“백련교의 광신도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발각되기 전에 일단 그 횃불부터 어서 끄거라.”
“어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이지란은 땅을 파서 횃불을 묻었다.
어명이란 말에 부족민들은 깜짝 놀랐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아 보였으나 상황이 급박하기에 재빨리 움직였다.
그런 뒤에 나는 이지란을 다시 불렀다.
“자네들의 도움이 필요하네.”
“무엇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뤄내겠사옵니다.”
“일행 중에 산을 잘 타는 이가 있느냐?”
“덕춘이라 불리는 이가 약초꾼이었기에 산 하나는 잘 타옵니다.”
“그러면 당장 가서 이원림 장군에게 순군만호부와 응양군 병사를 모두 이끌고 이곳으로 오라고 전하거라.”
길을 따라서 이동할 수는 없다.
아마 중간에 추격을 당할 게 뻔했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산길을 따라서 평양의 시내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해 다친 이들이 많아서 함께 이동하자니 속도가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응양군이 아직 평양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휴가를 받은 것은 몇 시진 전이다.
출정을 마치고 장거리 행군을 한 터라 대부분은 병영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내 명령을 받은 이지란은 곧장 덕춘이란 자를 불러서 그대로 전하였다.
“이원림 장군에게 이걸 보여주면 믿어줄 것이다.”
그가 떠나기 전에 잠시 불렀다.
내가 건넨 것은 고려의 국기로 사용하고 있는 태극 문양이 수놓아진 손수건이었다.
이지란과 그의 부족민이 홀치와 함께 훈련받은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원림이 그를 알아볼 리도 만무했다.
더구나 무턱대고 병사를 동원하라는 말을 믿어줄 리도 없었다.
그라면 이걸 알아볼 것이다.
가진이 직접 만들어서 내게 준 것이다.
이원림에게 자랑한 적도 있고 수년째 사용하고 있는 거라 기억할 것이다.
덕춘이 조심스레 그걸 받아서 떠나려고 하자 가진은 한 마디를 보탰다.
“어의도 부르라고 반드시 전하거라.”
그녀의 목소리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내가 봐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피를 제법 흘린 터라 꽤 어지러웠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얼굴은 상당히 창백할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서는 기절하고 싶었다.
다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까 마신 차가 문제인 건지 잠의 유혹이 강렬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 잠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나를 지탱하게 만들었다.
“힘드시겠지만, 계속 움직여야 하옵니다.”
김인찬의 말이 옳았다.
어떻게든 계속 움직여야 했다.
다행히 어둠은 나의 편이 되어 주었다.
아슬아슬하게 백련교도를 피해가며 산을 타던 일행은 어느덧 평양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합장강(合掌江)에 도달했다.
청룡산 자락에 있는 그 강은 대동강의 지류로 고구려를 반역한 아들이 어머니께 죄를 사죄한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불렸다.
문제는 그곳을 건널 방법이 없었다.
다리가 두어 개 놓여 있으나 당연히 광신도들이 그곳을 지킬 것이 분명했다.
“육로를 따라 북쪽으로 돌아가거나 나룻배를 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사옵니다.”
“전하께서 위중하십니다. 돌아갈 시간이 없습니다.”
가진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한시라도 빨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김인찬도 그걸 알기에 상당히 고심했다.
지금 당장 나룻배를 어디서 찾아야할 지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때 건너편에서 수많은 횃불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광신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은 걷혔다.
광신도라 하기에는 너무 많아 보였다.
기본적으로 천 명 단위는 넘어갔다.
아니 수천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응양군부터 치안을 담당하는 순군만호부 병사들까지 모두 끌고 온 것 같았다.
그쯤 되니 긴장이 풀렸던 걸까.
간신히 버티고 있던 몸이 갑자기 무거워지더니 스르륵 주저앉고 말았다.
마침내 기절한 것이었다.
“전하! 정신 차리시옵소서.”
*
그로부터 이틀 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어의인 설주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신소봉이었다.
“어찌 된 것이냐?”
“정신을 잃으신 후에 이원림 장군이 도달하여 곧장 궁궐로 모셨습니다.”
“가진은 무사한가?”
“이틀 내내 전하의 곁을 지키셨는데 몸이 상할까 우려되어 잠시 눈을 붙이러 가셨습니다.”
“미천사에서 마신 차가 뭔가 이상했네. 혹시 문제가 생기지 않겠는가?”
설주에게 그걸 묻자,
그는 괜찮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수면 효과가 있는 약초를 섞은 거라고 했다. 그나마 차에 독을 탄 것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무색무취의 독약은 생각보다 구하기 어려운 것이옵니다. 대부분의 것들은 몸이 스스로 거부하기 마련입니다.”
나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
신소봉에게 일으켜 달라고 손을 올리려고 했으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화살을 맞은 왼손은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았다.
화살을 맞은 그 날보다 지금이 더 아픈 것 같았다. 어쩌면 생존 본능이 뿜어내던 아드레날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설주는 그런 나를 만류했다.
“아직은 움직이시면 아니되옵니다.”
“흐으···음.”
“고통이 심하시면 소신이 진통 효과가 있는 탕약을 준비하겠사옵니다.”
“괜찮소.”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으나 진통제는 가능하면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탕약에 뭘 넣을지 알 수 없었다.
어의인 설주를 못 믿는 게 아니다.
아마 진통제의 효과는 확실할 거다.
지난 몇 년 동안 설주를 중심으로 국내의 약재인 향약(鄕藥)을 모두 모아서 정리한 뒤에 향약백서가 편찬되었다.
동의보감과 비교해도 약재에 관련된 부분은 그리 뒤처지진 않을 것이다.
더구나 고려의 의학은 외상 위주로 발전되고 있는 중이었다. 전장에서 싸우다 다친 병사를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소독 같은 것도 이제는 기본적인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걱정되는 게 있었다.
아편 같은 중독성이 있는 것일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임금이 총기를 잃으면 안 된다.
그건 재앙과도 같은 일이다.
‘파상풍만 조심하면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견갑골 바로 밑에 꽂혔는데 생각보다 그리 깊게 박히진 않았다고 했다.
그쯤 되자 나는 윤해와 홀치 생각이 났다.
“윤해 장군은 어찌 되었느냐?”
“···송구하옵니다.”
“죽은 것이냐?”
“미천사에 남은 이들 중에 목숨을 건진 이들은 몇 명 되지 않았사옵니다.”
“빌어먹을!”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윤해는 그렇게 죽을 인물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고려의 도당에서 자연사한 관리들이 있기는 했으나 적의 손에 죽은 장군급은 그가 처음이었다.
홍건적이나 왜구도 아니고 광신도에게 당했다는 사실에 더 화났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나는 역도에게는 피와 눈물도 없는 냉혈한 군주였으나 백성들에게는 누구보다 자상하게 대하려고 했다.
죄를 짓는 이들은 대부분 윗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량을 베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장 이인복을 침전으로 들라 하여라.”
처음 보는 분노에 가득한 표정 때문인지 신소봉과 설주는 만류조차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서자 다시 한번 지난 밤의 일을 천천히 곱씹어봤다.
가장 처음에 드는 생각은 역사에 이게 어떻게 기록될 거냐는 것이다.
미천사의 변(變).
아마 이렇게 부르겠지.
이건 어쩌면 공민왕이라는 자에게 얽혀 있는 운명의 굴레 같은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원래의 역사에서 공민왕에게도 흥왕사의 변이 생긴다.
하지만 내가 그걸 당할 줄은 몰랐다.
일단 시기도 다르다.
흥왕사의 변은 2년 후였다.
더구나 주모자인 김용도 처형했다.
당연히 흥왕사 주변에 갈 일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했던 백련교가 이렇게 무모하게 나올 줄 몰랐다.
그때 이인복이 안으로 들어왔다.
“지난 이틀 동안 소신은 물론이고 온 백성이 노심초사하였사옵니다.”
이인복은 곧장 현재 상황을 보고했다.
정신을 잃은 사이에 많은 일이 벌어졌다.
일단 평양은 발칵 뒤집혔다.
혹시 몰라서 나의 용태를 알리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병사가 움직인 탓에 그날 밤에 변고가 있었다는 것은 다들 알았다.
그가 내린 조치는 무척 빨랐다.
당번이 아닌 홀치까지 불러내 궁궐에 배치한 뒤에 응양군과 순군만호부의 병사들로 평양 인근을 봉쇄했다.
그런 이후에 쥐잡듯이 뒤져서 광신도로 의심되는 이들을 솎아냈다.
“얼마나 되던가?”
“현재 감금된 이들을 합치면 천여 명이 넘어갈 정도이옵니다. 하오나 의심되는 이들을 모두 잡아들인 탓에 그들 모두가 백련교도라 볼 수는 없사옵니다.”
“엉뚱한 백성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가려내시오.”
“그리고··· 용호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안우경 장군 역시 감금되어 있사옵니다.”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용호군 중에 반역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안우경 장군에게 책임을 묻기도 애매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이인복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됐다.
“백련교도들이 사용한 활과 화살이 모두 용호군의 무기고에서 빼돌린 것이라 하옵니다. 더구나 배반을 한 병사들 역시 용호군의 소속이었기에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하아··· 또 이렇게 엮이는 건가.
어쩐지 그렇게 많은 활과 화살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고 숨기는 것도 쉽지 않다.
어떻게든 안우경을 빼내고 싶었으나 도무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기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제 막 관운이 트인 안우경이다.
계속 후방을 돌다가 얼마 전에 용호군을 맡았는데 엄청난 일에 휘말린 것이다.
안우경으로서는 조금 억울할 만 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자신의 손에서 터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옥살이가 불편하지 않게 잘해주시오.“
“또한 소신과 감찰 어사 전체에게도 죄를 물어주시옵소서!”
“하아··· 왜 그러는지 충분히 알겠으나 자중하시오.”
감찰사도 죄가 있었다.
그들의 죄는 무능함이었다.
수년 전에 백련교를 뿌리 뽑으라 명했다.
하지만 완전히 놓친 탓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감찰사의 잘못이라고 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대부분의 자원을 원나라에 쏟으라 명한 것은 나였다.
“그나저나 주모자는 밝혀졌소?”
“미천사 부근에서 사도라 불리는 이를 추포하였으나 옥에서 자진하였사옵니다.”
“사도가 확실한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수뇌부 중에 변절자가 생겨서 그들을 통해 확인하였사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던 사람이오?”
나는 그게 궁금했다.
사도라는 자는 도대체 누굴까.
내 질문에 이인복은 편조라는 이름을 꺼냈고 나는 그 순간에 꽤 충격을 받았다.
설마 신돈이 백련교에 몸을 담고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아니 어쩌면 그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공민왕을 대신하여 혁명을 주도한 신돈이나 백성들의 힘을 얻어서 이 세상을 뒤집으려고 했던 사도나 결국 똑같았다.
나는 그쯤에서 대화 주제를 바꿨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하다.
“영의정이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소.”
이인복은 고개를 조아리며 내게 무엇을 하면 되냐고 물었다. 나는 이왕에 이렇게 된 김에 이 상황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사사로이 병사를 가지고 있는 이들을 이번 기회에 뿌리 뽑아야 했다.
“사병 혁파를 할까 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