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43
그로부터 얼마 후.
병사들이 평양으로 돌아왔다.
평양의 북문은 개선문과 같았다.
천도를 한 이후에 새롭게 지어진 그곳은 다른 성문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했다.
애초에 그럴 용도로 만들어진 곳이다.
북문을 통과해서 이원림과 응양군 등이 모습을 보이자 백성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내 주었다.
다시 한번 위기를 넘긴 것이다.
이제 겨울의 초입이라 꽃잎을 뿌리는 세레모니는 해줄 수 없었으나 때마침 내리는 첫눈이 대신 그 역할을 했다.
하얀 눈이 어깨에 소복하게 쌓였으나 백성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마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방실 장군님이 계시니 역시 든든해.”
“거기에 변안열 장군과 서달 장군도 있으니 홍건적이 감당할 수 없었겠지.”
“듣기로는 15만이 넘어갈 정도로 엄청난 대군이라고 했는데 고작 수백 명만 죽었다는 게 말이 되나.”
“또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어찌하여 자네는 그렇게 의심이 많은 건가.”
오죽하면 음모론이 나돌았다.
산술적으로 나올 수 없는 공적이었다.
아직 이번 전쟁에 대한 소식이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은 탓이었다. 하지만 고려군의 활약은 백성들 대부분이 믿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전력이 있었다.
십 년 동안 패전이 기록되지 않았다.
일단 싸우면 무조건 승리하는 것도 아니고 대승을 거두고 있는 고려군이다.
적어도 한해 걸려서 한 번씩은 승전보를 전하니 오히려 아무런 소식이 없을 때는 아쉬워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모르겠는데,
최근에 대도 정벌론이 돌고 있었다.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웃고 즐기는 일만 있진 않았다.
행렬의 마지막에는 이번 전투에서 죽은 이들의 유골을 담은 수레가 들어왔다.
그러나 수레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사망자의 수도 적었지만,
평양이 고향인 이들만 돌아왔다.
다른 지방이 고향인 이들은 곧장 가족에게 보내졌고 그중에서 가족이 없는 이들만 이곳으로 함께 보내졌다.
수레는 곧장 진혼제가 진행될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간략하게 병사들의 넋을 기리는 제사가 진행되었다.
그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이 시대의 국가적인 제사가 있으면 임금이 주관하는 것이 보통이다.
진혼제는 내가 직접 쓴 위령사를 읽는 것으로 시작해서 식순이 진행되었는데 당연히 응양군도 그 자리에 참석했다.
다들 피곤하겠지만,
요서에서 같이 싸웠던 동료들이다.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줄 정도의 의리는 있었고 친한 동료를 잃은 것인지 병사 중의 몇 명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중사 김판석 외 열네 명에게 무공 훈장을 수여 하는 바이다.”
일부 유족은 훈장을 받아갔다.
전공을 세운 이들에게 주는 것이었다.
수년전부터 고려는 현충일을 기념함과 동시에 훈장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그걸 지닌 이들은 직계 가족에 한해서 여러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세금의 면제였다.
원한다면 거기에 관직도 제수했다.
비록 정8품까지의 말단 관직이나 먹고 사는 데 문제는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정해진 식순이 모두 끝난 뒤에 나는 곧장 이원림을 불렀다.
“먼 길을 다녀오느라 수고가 많으셨소.”
“소신의 불민한 청을 들어주셔서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오늘부터 다시 전하의 숙위를 맡겠사옵니다.”
“이번 전투에 투입된 이들은 순차적으로 보름에서 달포 동안 휴가를 다녀오라 명을 내렸는데 어명을 무시하는 것이오?”
“하오나···.”
“숙위는 윤해 장군이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해산하시오. 장군이 이러면 나머지 병사들이 쉬지 못하지 않소.”
쉴 때는 확실하게 쉬어야 했다.
전투 외에도 요서까지 오가며 쌓인 피로가 적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내가 질책하듯 말하자 이원림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응양군의 해산을 명했다.
그들은 각자의 고향에서 정해진 휴가를 마치고 돌아올 것이다.
그런 후에 가진을 찾았다.
당연히 그녀도 진혼제에 참석했다.
어느 사이에 가진은 치렁치렁한 예복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하긴 그 무게가 만만치 않기는 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원자는 벌써 돌아간 것이오?”
“오늘 날씨가 제법 매서워서 쌍둥이들과 함께 궁궐로 먼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외조부의 기일이지 않소.”
“전하께서 이렇게 함께해주시는데 굳이 원자까지 올 필요가 있습니까? 저는 전하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하여간 말은 정말 예쁘게 한다.
그러니 원래의 역사에서 공민왕이 그녀를 잃고 난 뒤에 그렇게 슬퍼했겠지.
“환복을 하고 나올 테니 기다려 주시오.”
나는 곧장 예복을 벗었다.
그런 뒤에 평상복을 입고 나왔다.
겨울인데도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예복은 무게도 상당하지만, 일단 통풍이 거의 되지 않았다.
여름에 기우제라도 지내는 날에는 자칫 열사병에 걸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종종 들 정도였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오자.
호위를 담당하는 용호군 한 무리와 홀치 서른 명이 윤해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에는 홀치만 호위를 했으나 오늘은 진혼제 때문에 용호군도 지원을 나왔다.
“설마 직접 호위를 할 생각인 것이오?”
이런 일은 흔하지 않았다.
윤해는 전체 숙위를 관리하는 위치에 있기에 칼을 차고 옆에서 나를 지키는 일을 직접 하는 경우는 없었다.
더구나 나이가 이제 적지 않아서 조금 불편한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이제 이원림 장군이 왔으니 제가 전하에 곁을 지킬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았지 않사옵니다. 오늘은 소장이 모실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허락했다.
사서 고생을 하겠다는 데 만류할 생각은 없었다. 날씨가 조금 추워서 고생은 하겠지만, 그래도 미천사에서만 머물 거라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길로 나는 가진과 함께 미천사로 향했다.
미천사는 평양의 외곽에 있다.
시내에서 제법 거리가 있었는데 규모가 다른 인근의 사찰에 비해서 작았다.
산중턱에 자리 잡은 그곳은 대웅전을 포함해서 두어 채의 건물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곳의 일몰은 일품이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보니 가진이 왜 이곳을 좋아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작년에도 와봤으나 어두워진 후에 도착한 탓에 이런 장관은 보지 못했다.
“나무아미타불, 소승이 따뜻한 차를 준비하였사오니 제례를 올리시기 전에 잠시 몸을 녹이시옵소서.”
일행이 사찰 안으로 들어서자,
주지가 나와서 정중하게 반겨주었다.
잠시 화톳불에 몸을 녹인 나와 가진은 간소하게 준비된 제례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그리 복잡하지는 않았는데 오히려 그게 끝난 뒤에 가진이 불공을 드리는 곁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적막한 사찰에 있어서인지 너무 졸렸다.
‘하아암··· 왜 이렇게 졸립지.’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일까.
갑자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졌다.
어쩌면 규칙적으로 두드리고 있는 목탁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치 그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만 겪는 일은 아닌 것 같았다.
“크음! 미치겠네. 왜 이렇게 눈이 무겁고 몸이 나른하지.”
“자네도 그런가?”
“요즘 다들 무리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전하를 호위 중이니 정신 차리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느낌이었다.
다급하게 일어나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대웅전의 문을 여니 어디서 날아온 건지 수없이 많은 화살이 나를 향해 쏟아졌다.
슈우웅! 슈웅!
머리 옆에 기둥에 화살이 박히자.
그와 동시에 몸을 날려서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내 운동 신경이 그리 좋진 못했던 것 같았다. 한 차례 뒹군 후에 일어나니 어깻죽지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그러나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가장 먼저 가진부터 챙겨야 했다.
벌떡 일어나서 가진의 손목을 잡고 불상 뒤쪽으로 향하자 커다란 고함과 함께 대웅전 창살 너머가 환하게 밝아졌다.
“전하!”
가진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었는지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어깨에 꽂혀 있는 화살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나는 불상에 기대며 가진을 안심시켜주고 싶었으나 괜찮다는 말이 안 나왔다.
전혀 안 괜찮은 상태였다.
더럽게 아팠다.
이런 상처는 처음이었다.
고려로 오기 전에 트럭에 치어 죽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아마 그때는 즉사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뒤늦게 윤해와 신소봉이 대웅전으로 뛰어 들어왔다.
용케 화살 비를 피한 것 같았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그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불상 뒤에서 고개를 내밀어 여기 있음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윤해 역시 멀쩡하진 않았다.
그 역시 허벅지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화살을 쏜 것일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소봉이는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역도들이옵니다. 소장이 앞장설 테니 서둘러 환궁하셔야 하옵니다.”
“역도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 것 같소?”
“횃불의 수를 보니 적어도 수백 명은 넘어갈 것이옵니다.”
“빌어먹을···!”
머뭇거리고 있을 틈은 없었다.
절뚝거리는 윤해와 함께 나서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홀치들이 보였다.
하지만 주변에 경계를 세웠던 수십 명의 병사들이 오히려 그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내가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윤해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용호군에 배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기습을 당해서 홀치가 피해를 봤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응양군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용호군은 홀치를 상대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다.
같은 숙위군이라고 하더라도 분명히 급이 있었다. 하지만 아까 마신 차에 뭘 탔는지 다들 기력이 없어 보였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사방에서 수백 명이 넘는 이들이 미천사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조금 전에 화살을 쏜 이들 같았다.
역도들은 홀치들에게 달려들었는데 목숨을 잃는 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홀치들도 사람인 터라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홀치라도 사방에서 동시에 수십 명이 붙잡고 늘어지니 방법이 없었다.
눈이 뒤집힌 모습으로 달려드는 그들을 보니 마치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느낌상 아편 같은 뭔가 이상한 약물을 먹은 것 같았다.
“오마니 반메훔.”
“오마니 반메훔···.”
그들은 죽으면서도 주문을 외웠다.
그제야 이 일이 누구의 사주로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잠잠하던 백련교의 광신도들이었다.
잠시 감찰사의 시선이 홍건적 때문에 원나라로 향해 있는 동안에 평양 주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인생 최고의 위기를 평양에서 맞을 줄은 몰랐다.
그러는 사이에도 홀치들은 어떻게든 활로를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했다.
심지어 신소봉도 칼을 쥐고 싸웠다.
놀라운 것은 그의 실력이 홀치와 비교해도 그리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골병을 앓을 정도로 훈련하더니 이제야 빛을 보는구나.’
내가 즉위할 무렵부터 홀치들과 함께 훈련을 한 보람이 있기는 했다.
그때는 설마 그가 나를 지켜줄 일이 과연 있기는 하겠냐고 말했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나도 같이 싸우고 싶었으나 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깨를 다쳐서 쏠 수 없었다.
완전히 짐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역도들도 실수를 한 게 있었다.
그건 홀치를 과소평과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중독된 상태에서도 목숨을 걸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을 활로로 뚫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는 사이에 광신도는 더 늘어났다.
어디서 이렇게 많은 이들이 나오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 아마 인근에 숨어 있던 걸까.
어쨌든 지금은 어서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하는 터라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윤해의 생각은 달랐다.
“여기는 우리가 맡을 테니 1조를 이끌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전하를 궁궐까지 무사히 모시거라!”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겠다는 의미였다.
그의 명령을 받은 1조의 조장은 아주 잠시나마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동료를 버리라는 말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홀치가 존재하는 이유가 전하를 지키는 것이지 않냐며 호통을 치는 윤해를 설득하지는 못했다.
“그러지 말고 윤 장군도 함께 갑시다.”
“소장이 성균관에서 군사학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이 무관은 부하를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사옵니다. 저들을 어떻게든 막을 테니 부디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윤해는 결연하게 외쳤다.
애초에 이럴 생각이었던 걸까.
자세히 보니 그의 다리가 성치 않았다.
대동맥을 건드린 건지 화살을 뽑지도 않았는데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짐이 될 거라 생각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지도 모른다.
결국··· 그를 설득하지 못했다.
거의 끌려가다시피 그 자리를 벗어난 나는 가진과 신소봉 그리고 다섯 명의 홀치와 함께 어두운 산속을 달려야 했다.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는 일이 허다했기에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하필이면 오늘이 초하루다.
달이 거의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게다가 수풀이 우거진 산중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횃불을 들자니 내가 여기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그나마 밤눈이 밝은 홀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얼마나 산속을 헤맸을까.
거의 반 시진 가까이 걷은 것 같았다.
그런데 앞서서 걷고 있던 홀치가 뭔가를 봤는지 갑자기 멈추더니 자세를 낮췄다.
쉿···!
조용하라는 수신호였다.
내가 알려준 것이니 모를 수 없었다.
자세히 보니 횃불을 들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십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 시간에 저렇게 몰려다니는 이들이 누굴 지는 뻔한 것이었다.
“전하, 절대 이곳에서 벗어나시면 아니되옵니다.”
이름이 김인찬이라고 했던가.
조장인 그는 내게 신신당부하더니 피 흘리고 있는 조원들에게 손짓을 했다.
다들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피해서 달아날 길이 보이지 않았기에 처리할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기습은 통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실력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칼을 몇 번이나 섞었으나 쉽게 제압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뭘 봤는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쳤다.
“아이고! 조장님, 접니다. 칼을 거두십시오.”
그제야 김인찬은 칼을 멈췄다.
일렁이는 횃불 아래에 비친 얼굴을 확인한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홀치와 한솥밥을 먹고 있는 여진족 출신의 훈련병들이었다.
당연히 그중에는 이지란도 있었다.
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푸념을 늘어놨다.
“아니 이렇게 어두운데 갑자기 뛰어와서 칼을 휘두르면 어쩝니까? 이게 훈련은 아닐 테고 정말 죽이실 생각이셨습니까?”
“자네들은 왜 여기에 있는 것인가?”
김인찬의 차디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이지란은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니 혹시라도 반란을 일으킨 무리인 것이 아닌지 의심되었다.
지금은 누구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홀치들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쥐고 있던 칼을 다시 치켜들었다.
“어서 대답하거라!”
“복귀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즘에 이 인근에서 호랑이가 나온다고 해서 잡으러 나왔다가 코빼기도 못 보고 토끼만 잡아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더냐?”
이지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허리춤에 걸려있는 토끼를 보여줬다.
문제는 착호군이 아닌 이들이 사사로이 호랑이를 잡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수렵이 일상생활 같던 이들이다.
어쩌면 욕구 불만을 풀러 나왔을 수도 있고 그마저도 아니면 가죽에 욕심이 났던 걸 수도 있다.
옆에서 신소봉과 함께 나를 부축하고 있던 가진은 환하게 웃으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운이 다하지는 않은 것 같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