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41
여말선초의 가장 큰 위협.
홍건적의 침입을 막아낸 뒤.
고려는 확실히 상승세를 탔다.
거의 피해를 본 것도 없이 홍건적의 공세를 막아냈다. 거기에 요서 지역의 부신성까지 얻어냈으니 대승이었다.
가장 무거웠던 짐을 덜어낸 것이다.
이제 무서울 것이 전혀 없게 되었다.
그런 덕분에 마침내 함경도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요동 방어를 하는데 희생이 많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병력이 움직였다.
요동을 방어하는 3만을 남겨 놓은 뒤.
2만 명이 함경도로 이동해서 이제 그곳은 5만 명의 병사가 주둔하게 될 것이다.
당연히 그중에는 서별초도 포함됐다.
압록강부터 두만강까지.
최소한 그 땅은 가져와야 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 삼강이라 불리는 송화강과 흑룡강 그리고 우수리강 중에 송화강 부근의 평야는 적어도 가져올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흑룡강과 우수리강 근처까지도 원하고 있었으나 가랑이가 찢어질까 봐 솔직히 엄두가 안 났다.
지켜야 하는 땅이 늘어날수록 병력이 흩어지게 되니 공백이 생길 것이다.
더도 덜도 말고 15만 명의 병력.
그 정도는 있어야 삼강 평원와 고려의 땅을 지키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것도 최소한으로 잡은 숫자였다.
이런저런 것을 따지면 결국에는 인구가 부족하다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제 천만을 넘어섰으니···.’
최근에 상당히 좋은 소식이 들렸다.
토지 조사와 함께 인구 조사를 했던 것이 이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면 즉위한 이후에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인구가 두 배로 늘었다는 것이다.
거의 5백만의 인구가 늘었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라 여겨졌다.
신생아만으로 가능한 수치가 아니다.
새롭게 편입된 땅의 주민이 백성으로 계산되니 급격하게 늘어난 것이다.
그때 이인복이 나를 상념에서 깨웠다.
“이방실 장군이 보낸 서신에 그만 요동의 병마사 자리를 내려놓고 싶다고 전하의 허락을 요청하였사옵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방실을 대체할 이는 없었다.
그나마 최영과 안우 정도가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고 나머지 젊은 장군은 아직 그 정도의 그릇은 아니었다.
하지만 흘러가는 세월은 막을 수 없다.
지금까지 고생했으니 노년은 조금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해줄 필요가 있었다.
다음 세대를 이끌 젊은 장군들에게도 기회가 될 것이다.
“그간 고생이 많았으니 그리하시오. 허나, 아직 치사할 때는 아니오.”
“소신이 전하의 의중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하였사옵니다.”
뭘 어쩌라는 거냐며 이인복이 되물었다.
쉬게 해주겠다는 건지 아니면 계속 자리를 지키라는 건지 애매한 말이었다.
나는 내심 염두에 두고 있던 인사 조치를 이인복에게 전달했다.
“대마도에 있는 안우 장군을 요동으로 올리고 이방실 장군에게 우의정 자리를 제수할 생각이오. 이방실 장군도 관직을 내려놓기 전에 우의정 정도는 한 번쯤 해봐야 하지 않겠소.”
일종의 돌려막기였다.
그간 고생한 이방실 장군이다.
이제 도당에 들어와서 우의정 자리에 앉는 것을 반대할 이는 없었다.
지난 10년 동안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른 그는 고려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군이자 문관들도 진심으로 인정하는 이였다.
“좋은 생각이옵니다. 하오나 대마도는 그러면 어찌하옵니까?”
설마 정세운을 그곳으로 보낼 거냐고 묻는 표정이었다. 이인복과 정세운은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성격이 안 맞는 둘이었다.
당연히 나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나의 의리는 여기까지다.
정세운에게 10년 가까이 순군만호부 자리를 주었고 무관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인 우의정에 올려주었다.
내 명령을 받아서 주덕유를 찾아내고 대도에서 호종했던 그에게 해줄 만큼 해줬다고 생각되었다.
정세운은 아주 뛰어난 이는 아니다.
뭘 하나를 시켜도 손이 많이 가는 편이다.
너무 고지식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연히 행정 능력도 좋지 않아서 우의정 자리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그 자리는 이성계에게 맡길 생각이오.”
“다른 이를 보내고 이번 기회에 이성계도 북방으로 올리시는 것은 어떠하옵니까. 그의 가문이 쌓은 인맥을 이용하면 여진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옵니다.”
이인복의 생각은 틀린 게 없었다.
실제로 이성계는 큰 역할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없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일부러 대마도에 보내놨는데 이제 와서 그를 불러서 쓸 생각은 없었다.
“그럴 생각은 없소. 이번에 이자춘의 장자인 이원계도 서별초를 이끌고 함경도로 가지 않소.”
나는 딱 잘라서 거절했다.
그만큼 현재 대마도에 대해서 잘 아는 이가 없다는 핑계는 덤이었다.
거기에 최영과 조인벽을 비롯해 얼마 전에 내투한 퉁두란이 생각보다 일을 잘하고 있는 것도 한몫을 했다.
아니지 이제 그의 이름은 이지란이다.
퉁두란이라 부르자니 입에 익지 않았다.
더구나 고려에서는 관직에 오르려면 고려식으로 지은 이름을 써야만 한다.
당연히 변발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씨 성을 내린 뒤.
지란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했다.
당연히 이지란은 크게 기뻐했다.
임금이 직접 성과 이름을 지어서 하사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곧장 아버지가 이끌던 부족민 전체를 고려의 품에 안겨주었다.
현재 그는 윤해의 아래 있었다.
그곳에서 홀치와 함께 훈련을 받고 있는데 악명이 자자한 홍귀의 훈련량을 경험하면 땅을 치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인복은 조만간에 있을 장군들의 이동을 준비하겠다며 대답했다.
“문제없이 준비하겠사옵니다. 하온데 오늘 대주국에서 온 이는 어찌하옵니까?”
“아차! 깜빡하고 있었소.”
“지금 편전으로 들라하옵니까?”
“그리하시오.”
내가 그러라며 허락하자,
잠시 후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상당히 묘한 느낌을 가진 이였다.
그의 정체는 대륙에서 가장 잘나가는 지재 상인 중의 하나인 고지렴이었다.
고려인 출신인 그는 최근에 감찰사가 제공하는 정보를 이용해서 공작 활동에 꽤 많은 도움을 주었다.
대도에서 벌어진 원나라의 반격.
때마침 차칸 테무르가 움직여서 반성의 공격을 반격한 것도 여기 있는 고지렴이 팔은 정보를 토대로 진행된 것이다.
만약에 그가 정보를 팔지 않았다면 대도는 꽤 곤란한 처지가 됐을 것이다.
당연히 내 알바는 아니었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이유는 없다.
하지만 원나라가 몰락하는 속도는 어느 정도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단숨에 무너지면 권력이 한쪽으로 쏠릴 가능성이 있었다.
“이렇게 전하의 용안을 직접 뵙게 되다니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고지렴의 인사를 받은 뒤.
나는 그에게 곧장 자리를 권했다.
지재 상인이라면 교활한 이들이 대부분일 거란 나의 예상은 상당히 빗나갔다.
속에 뱀이 몇 마리 들어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외모나 분위기는 꽤 진중했다.
“요즘 대륙 최고의 지재 상인이라 불리는 그대의 이름은 자주 들었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반갑소.”
“혓바닥으로 먹고사는 미천한 소인의 행태 때문에 전하의 이부(耳部, 귀)를 더럽힌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되옵니다.”
“의주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맞소?”
“그러하옵니다. 그 덕분에 원나라의 말을 어린 시절부터 익힐 수 있었사옵니다.”
정보란 미묘한 것이다.
어떻게 보냐에 따라 값도 다르다.
누군가에게 쓸모없는 것이 다른 이의 기준으로 보면 금보다 귀할 수 있다.
그걸 정하는 것은 지재 상인의 능력이다.
결국에는 머리로 계산하고 혓바닥으로 흥정을 해야 제대로 된 값을 받을 수 있다.
확실히 언변 하나는 훌륭했다.
“요즘 오국과 대한국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소. 값은 후하게 쳐줄 테니 그곳의 상황이 어떤지 말해보시오.”
대륙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원나라는 홍건적을 막는 데 성공했으나 피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당분간 원나라는 대주국와 오국을 막는 것도 상당히 버거울 정도였다.
반면에 중원은 혼란스러웠다.
진우량 때문에 생긴 변수가 있었다.
지난해 그는 자신을 거둬준 서수휘를 살해하고 천완국에서 대한(大漢)국이라 바꾼 뒤에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문제는 그가 탕화의 오국이 차지하고 있는 중원을 탐낸다는 것이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비슷했다.
당시에는 탕화가 아닌 주원장과 파양호 전투를 했는데 진우량은 대패를 당하고 몰락한다. 하지만 지금은 주원장이 아닌 탕화가 이끌고 있다는 변수가 있었다.
과연 이번에는 누가 이길까.
그게 너무나도 궁금했으나 고려의 입장에서는 그런 일은 막아야 했다.
현재 중국의 땅을 차지하고 있는 세력 중에 하나라도 몰락하면 안 된다.
오히려 더 잘게 쪼개지길 바랐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이옵니다.”
그때부터 고지렴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의 상당수를 내게 풀어 놓았다.
당연히 옆에는 이인복이 함께 듣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어쩌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라 그럴지도 모른다.
고려도 그의 고객이었다.
정보라는 것은 항상 부족했다.
감찰사에서 얻는 정보도 있지만,
워낙 넓은 땅이라 놓치는 게 있었다.
현재 우리의 감시망은 절강과 대도 그리고 요서와 만주 같은 곳에 집중되어 있었고 다른 곳은 손이 닿지 않았다.
그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 그였다.
하지만 그의 말을 모두 믿진 않았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방이 고의적으로 허위 정보를 흘릴 수도 있다.
고지렴은 아직 우리 사람이라 확신할 수 없는 이였기에 그에게서 나오는 정보는 확인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대한국의 진우량을 자중시킬 방법은 없는 것이오?”
“중원에 대한 열망이 상당히 커서 그러기는 쉽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그렇다고 둘이 싸워서 한쪽이 이기면 걷잡을 수 없지 않소. 길게 보면 그대에게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닐 것이오.”
지재 상인은 전쟁이 호재다.
정보의 값어치가 올라갈 것이다.
하지만 길게 보면 그리 좋은 일은 아니다.
누군가 하나가 대세로 올라서면 지재 상인의 역할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아니 토사구팽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고지렴도 그 부분은 수긍했다.
“소인 역시도 그런 상황은 전혀 바라지 않고 있사옵니다.”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할수록,
다들 욕심에 눈이 멀 수밖에 없다.
상대방의 허점을 알아내기 위해서 축재(蓄財)해 놓은 재물도 아끼지 않는다.
그것은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에 있는 모든 관청 중.
감찰사의 예산이 독보적으로 많았다.
워낙 많은 정보원을 부리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걸 아깝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매번 그 이상의 값어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쯤에서 신소봉을 바라봤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상자 하나를 가져왔다.
그 순간에 살짝 고지렴의 눈에 기대감이 감돌았다. 저 안에 금은보화가 가득할 거라 여긴 것 같았다.
“열어서 확인해 보시오.”
나는 그 상자를 고지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하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예상 밖의 물건이었다. 금과 은은 아니었고 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밑면은 네모나고, 두 마리의 용이 얹혀 있었다.
“이것은···.”
“어떤 물건인지 알아보겠소?”
“어찌하여 원황실의 옥새(玉璽)를 고려에서 가지고 있으신 것이옵니까?”
“그런 것까지 내가 설명을 해주길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옥새는 이번에 홍건적을 소탕하며 얻은 전리품 중의 하나였다. 왜 이게 반성에게 있는 건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걸 설명해줄 의무는 없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깜짝 놀라서 실언을 하였사옵니다.”
고지렴은 곧장 머리를 조아렸다.
하지만 옥새에서 시선을 떼진 못했다.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되는 것 같아 보이길래 한지를 꺼내 직접 그걸 찍었다.
사신을 통해 고려에 온 칙서에 찍힌 것과 비교해보면 똑같았다. 얼마 전까지 황실에서 실제로 쓰던 옥새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이게 전설 속의 전국옥새 같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가 확실한 것 같은가?”
“소인이 보기에는 진품인 것 같사옵니다. 혹시 이걸 원나라에 돌려줄 생각이신 것이옵니까?”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분실물은 돌려주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실제로 원래의 역사에서 고려는 사신을 보내서 이걸 원나라에 돌려주었다.
하지만 내가 그 정도로 착하진 않다.
이미 망해가는 그들에게 그냥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삥 뜯어간 것이 있으니 이걸 가져도 오히려 손해다.
그렇다고 이걸 내가 가지고 있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최대한 비싸게 팔아치울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대리인이 필요했다.
고지렴을 그 자리에 세울 생각이다.
찢어져 있는 중국의 세력 중에 옥새를 놓고 군침을 흘리지 않을 이는 없다.
여러 조건을 놓고 경쟁을 붙이려면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자네라면 이걸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