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40
반성이 말머리를 돌릴 때부터.
부신성을 함락시킨 조금 전까지.
모든 일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고려는 그를 부신성으로 올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괜히 추격을 멈춘 게 아니다.
마음만 먹었다면 부신성이나 요동에 도달 전에 절반 이상은 죽었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홍건적의 수를 줄이다가 마지막에 쐐기만 박으면 그만이었다.
그만큼 고려군의 화력은 대단했다.
화승총과 쇠뇌 등을 이용해서 멀리서 두들겨 패는데 막을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를 일부러 부신성 방향으로 유도한 것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요서를 먹을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방실에게는 지침서가 있다.
만약의 상황이 닥치면 참고하는 용도다.
병마사가 홀로 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기 마련인데 급박한 순간에 달포 가까이 결정을 미뤄야 할 때가 종종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이 시대의 명령 체계는 느리고 비효율적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책략은 보고 없이 선조치 후보고가 가능한 것들이다.
그렇다고 이방실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안렴사와 해당 지역의 감찰 어사의 만장일치가 필요했다.
당연히 모두가 동의했고 이방실은 병마사의 권한을 동원하여 5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부신성에 온 것이었다.
밥상은 이미 차려져 있었다.
이제 수저만 올리면 되는 일이다.
이방실의 진군 명령이 내려지자 그의 휘하에 있는 장군들은 병사를 이끌고 부신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기에 요동을 지키고 있는 변안열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항복하거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줄 것이다.”
서달은 큰소리로 외치며 달렸다.
그런 그의 뒤로는 서달 못지않은 기세로 병장기를 쥐고 달리는 부하들이 있었다.
처음에 의주에서 유익과 싸울 당시에 신병이었던 그들은 어느 사이에 고려 최강의 돌격병이 되어 있었다.
그만큼 경험이 중요했다.
많은 동료를 잃은 격전을 경험하자,
다들 훈련의 중요성을 몸소 체감하였다.
평소에 얼마나 실전과 같은 훈련을 했나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된다.
그걸 너무나 잘 아는 이들이었다.
더구나 3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숙련된 정병이 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노력한 결과를 오늘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에 다들 앞뒤를 안 가렸다.
다른 방향에서도 이원림이 이끄는 응양군과 이원계의 서별초까지 사방에서 공격했다.
“어떻게든 막아라!”
“수레와 집기를 쌓아서 불을 놓아라.”
“어서 움직여!”
홍건적도 죽을힘을 다했다.
다들 기를 쓰고 고려군을 막아섰다.
하지만 뻥 뚫린 성문은 막을 수 없었다.
이미 부신성의 성문중에 두 곳은 홍건적 스스로 부숴버린 상태였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뚫어낸 성문이 오히려 이제는 목줄을 조이고 있었다.
그나마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군관은 성문에 물건을 쌓아서 불을 질렀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해낸 것은 아니다.
다른 곳에서는 밀려드는 고려군을 감당할 수 없었고 머지않아 뚫리고 말았다.
그때부터는 고려군의 일방적인 살육이 벌어졌다.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았다.
홍건적은 이미 다들 지쳐 있었다.
며칠 동안 밤낮없이 공성전을 치렀는데 체력이 남아도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더구나 심리적인 타격도 상당히 컸다.
승리의 기쁨을 한 시진도 못 누렸다.
그런데 다시 전투가 시작되었으니 다들 허탈감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에 고려군은 수적인 우위마저 차지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내부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이들마저 있었다.
“무기를 들어라! 고국의 품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이 짓거리도 이제 끝이군요.”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홀치와 정보원들이었다.
여러 전투를 치르면서도 끝까지 살아남은 이들인데 홀치의 비중이 훨씬 높았다.
대부분의 정보원들은 홍건적이 대패를 당하는 과정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남은 이들은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홍건적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낭중지추라 하였다.
진짜 실력은 최대한 숨겼지만,
심지어 그들은 군관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얼굴을 알아본 경비가 아무런 의심 없이 통과시켜줄 정도였다.
생각지도 못한 호의 덕분에 홀치들은 쉽게 수뇌부를 제압하고 반성과 주원수를 잡을 수 있었다. 뒤늦게 경비가 뛰어 들어오고 내부에도 무관이 있었으나 홀치를 상대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놈들! 감히 나를 배신하는 것이냐.”
반성은 노한 얼굴로 외쳤다.
그의 입장에서는 반란이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살기 위해서 자신을 팔아먹으려고 하는 거라 생각한 탓이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홀치들은 웃음이 저절로 터졌다.
“이 새끼가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냐?”
“오히려 그게 덜 비참할 수도 있지.”
“그렇겠네요. 시끄러운데 지금 멱을 따버릴까요?”
홀치들은 선임을 바라봤다.
홍건적에 투입된 이들 중에 유일하게 사십 대인 그는 선왕 시절부터 궁궐에서 숙위를 하던 이였다. 그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의 목을 잘라서 장대 위에 걸어라. 그러면 도적놈들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질 것이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사람을 물기 마련이라 고려군도 피해가 생길 것이다.
적장의 수급이 가진 효과는 크기에 그걸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홀치들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기에 단숨에 칼을 내리쳤다.
반성이 살려달라고 애원할 틈도 없었다.
촤아악!
피가 사방에 튀었지만,
그들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손에 피를 묻히며 산 세월이 적지 않다.
홀치들은 바닥을 데구루루 구르던 반성과 주원수의 수급을 들고 장대에 꽂았다.
그런 뒤에 곧장 밖으로 나가서 입을 모아서 목이 터지라 외치기 시작했다.
“수괴 반성과 주원수는 죽었다! 순순히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걸로 부신성은 함락되었다.
생각보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반성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은 홍건적의 대부분은 무기를 놓고 항복했다.
더는 싸우겠다는 의지조차 없었다.
그만큼 지쳤다는 뜻이었다.
그럴 만도 한 상태였다.
산서성에서 출발해서 요서까지.
승리한 적도 많았으나 대도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에 계속 쫓겨 다녔다.
대부분이 농부 출신인 탓에 고향 생각이 절실하게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순순히 풀어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고려를 향해 칼을 빼 들고 위협을 한 이들이다.
누가 시켜서 홍건적이 된 것도 아니다.
스스로 택한 길이니 책임도 본인이 직접 지어야 했다.
그날 고려는 수많은 포로를 잡았다.
큰 상처가 생긴 부상병을 제외하더라도 대략 만오천 명에 달할 정도였다.
그 말은 공짜로 쓸 수 있는 노동력이 대폭 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방실은 그들을 모두 요동으로 옮길 준비부터 했다.
“이곳은 요동으로 향하는 길목이니 잘 지켜야 하오.”
“항시 잘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부신성은 이원계가 맡기로 했다.
이곳에 남기는 병력도 많지는 않았다.
서별초와 정찰대 그리고 일반 병사를 포함하면 겨우 오천 명에 불과했다.
어차피 이곳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8할이 기마병이라 요격 작전에 특화된 구성이었다.
만약에 이쪽으로 병력이 밀려오면 반성이 당한 것을 그대로 다시 반복하면 된다.
“그와 별개로 보급품 중의 일부를 놔두고 갈 테니 민심부터 안정시켜야 할 것이오.”
고래 싸움에 새우의 등이 터졌다.
부신성의 주민들은 고가노와 반성 그리고 고려군의 전투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특히 반성의 약탈 때문에 죽거나 다친 주민이 생각보다 많았다. 그들 모두 이제 고려의 백성이니 보살펴야 할 존재다.
실질적인 일은 이번 원정에 동행한 요동의 안렴부사 변옥란이 처리할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
고려군이 그럴 리는 없으나 혹시라도 실수하지 않게 잘 다스리란 뜻이었다.
당연히 이원계도 무슨 말인지 곧장 알아들었다.
“병사들에게 주의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근방에 다른 성은 도모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이원계는 그게 조금 아쉬웠다.
이왕이면 유익도 이번 기회에 없애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게 성공한다면 머지않아 대도까지도 노려볼 수 있었다.
역사상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전하라면 가능할 거라 보았다.
지금까지 봐온 것이 있기에 가질 수 있는 맹목적인 신뢰였다. 그러나 고려군은 그 이상 넘어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이곳은 요동을 방어하기 위한 완충 지대에 불과하니 크게 의미를 두지 말게.”
대륙으로 진출한다면 모르겠지만,
전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현재 그분의 관심은 동북부 지역의 비어있는 땅에 쏠려 있었다.
“그간 원황실과 기황후에게 당했던 수모를 몇 배로 갚아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닙니까.”
“고려의 명운(命運)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하네.”
“하오나···.”
이방실은 고개를 저었다.
대도는 너무나 위험한 곳이다.
그곳을 탐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도로 향하는 순간부터 오국은 물론이고 대주국과도 싸울 각오를 해야 한다.
더구나 20만 명에 달하는 홍건적을 물리친 차칸 테무르가 아직 건재했다.
그가 두렵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년의 이방실은 그와 함께 자웅을 겨뤄보고 싶은 호승심이 있었다.
환갑을 넘어섰으나 아직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는 그였다. 병력만 확보된다면 절대 지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고려군의 소모가 너무나 클 것이다.
북부의 동토(凍土)가 척박하다지만,
그래도 고구려의 옛 땅을 되찾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차라리 대도보다 실리를 취하는 것이 옳았다.
그 뒤의 일은 자신의 아들인 중문과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한 정도전과 변안열 같은 다음 세대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자신은 수치스러운 과거를 지우고 강성한 고려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더구나 이제는 치사할 나이가 되었다.
문관은 일흔에 내려놓는 것이 보통이나 무관은 언제라도 직접 전쟁터에 나설 수 있는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요즘들어 그는 의지와 달리 부쩍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내심 이번 출정을 마지막이라 여겼다..
그는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요동에 돌아갈 때까지 방심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곁에 서 있던 부관을 부른 이방실은 다시 돌아갈 준비를 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요양성으로 회군할 준비를 하게.”
*
회군 명령이 떨어질 무렵.
서달의 병사들은 휴식 중이었다.
다른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에 비해 상당히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선봉에 서는 부대에 대한 특혜였다.
이번에도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성문을 뚫어냈고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만큼 부상자도 많았지만,
다들 눈빛 하나만큼은 살아 있었다.
지금이라도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칼을 쥐고 적진을 향해 달려갈 기세였다.
오히려 그들은 너무 싱겁게 전투가 끝난 탓에 아쉬워했다.
“이번에는 정찰대랑 서별초가 공적을 가장 많이 세웠다고 하겠지?”
“걔네는 따라잡기 어렵지.”
“차라리 정찰대에 지원할 걸 그랬나.”
“마! 남자는 모름지기 몸과 몸으로 부딪쳐서 칼을 겨뤄야 진짜인 게야.”
“하하, 그렇기는 하지!”
그들의 별명은 야차(夜叉)였다.
멧돼지 문양의 부대기 때문에 처음에는 야저라 불리다가 악착 같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다들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다들 어딘가 부족한 사람들처럼 자유분방하게 지냈다.
일부 군관은 그런 모습을 군기가 빠져 보인다고 무척 싫어했지만, 평소 그들의 훈련을 보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이러다가도 칼만 집어 들면 눈빛부터 바뀌어서 훈련도 실전처럼 피 튀길 정도로 하는 거친 이들이었다.
그때 서달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다들 벌떡 일어나서 옷차림을 매만졌다. 그들에게 서달은 범접하지 못할 위치에 있는 장군이자 존경하는 무사였다.
직위 때문이 아니라 누구보다 선봉에 서서 달리는 대장이라 저절로 생기는 위엄이었다.
“충(忠)!”
“이제 슬슬 움직일 준비를 하거라.”
“요양성으로 돌아가는 것입니까?”
“아니다.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것이다.”
서달의 말을 들은 병사들과 무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요양성이 아니면 어디로 간다는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설마 국내성이나 안시성을 말하는 건가 싶다가도 그럴 리는 없다고 여겼다.
수성은 그들의 전문이 아니다.
그와 관련된 훈련도 받지 않았다.
주변을 한 차례 살피며 부하들을 바라본 서달은 웃으며 그들에게 이번에 가는 목적지를 밝혔다.
“우리는 함경도로 복귀하는 병사들과 함께 여진족이 있는 삼강 평원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