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38
정세운을 통해 지시가 떨어지자,
고려 전체가 숨 바쁘게 움직였다.
별도의 지시는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했기에 그만큼 대비도 해놨다. 병력 이동은 물론이고 물자의 보급까지 수없이 훈련했다.
무관부터 말단 병사까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숙지해놓은 상태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함경도에 주둔 중인 최영이 이끄는 2군의 병사들이었다.
요동에 있는 1군을 합치면 5만 명이다.
아무리 이방실이라도 그들만 가지고 10만이 넘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홍건적을 막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모두가 움직일 수는 없었다.
함경도에 있는 3만 명의 병력 중.
2만 명은 요동으로 곧장 지원을 갔다.
하지만 나머지 1만 명과 조인벽이 이끄는 동별초는 병마사인 최영과 함께 남았다.
김삼선과 같은 여진족 때문이다.
함경도를 허술하게 놔두면 그 틈을 기회라 여겨서 약탈을 할 가능성이 컸다.
여진을 상대하려면 적어도 기동력이 있는 동별초는 남아야 했다. 결국, 2군의 지원군은 다시 변안열이 맡아야 했다.
함경도의 병력은 전령이 도착하고 이틀도 안 되어서 요동으로 최대한 빨리 떠났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떠나기 전에 그들이 준비해야 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요동까지 가는 동안에 먹을 식량.
그리고 각자의 병장기만 챙기면 되었다.
혹시 몰라서 소량의 화살과 화약은 가져갔으나 대부분 요동에 있는 성에 마련되어 있기에 많은 양은 아니었다.
평양에서도 병사들이 움직였다.
일단 가장 먼저 삼천 명에 달하는 응양군 그리고 홀치 일부가 요동으로 향했다.
그들은 정찰대에 소속된 병사들과 함께 적진에 침투해서 작전을 펼칠 예정이다.
보급 부대의 습격 같은 일에 동원될 텐데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양성된 병력이라 성과를 기대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렇게 고려가 위협에 대비할 무렵.
반성이 이끄는 홍건적은 요서 지역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정상적인 군대라 보긴 어려웠다.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고 병사들은 저마다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멀쩡해 보이는 이들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처참했다.
“황궁에 들어가서 궁녀들하고 재미 좀 보나 싶었는데 역시 만만치 않아.”
“제길! 대도를 무너뜨리고 황궁에 들어서기 거의 일보 직전이었는데···.”
“차칸 테무르와 이사제까지 모두 몰려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잖아.”
홍건적의 눈에는 아쉬움이 그득했다.
대도를 함락하기 직전에 패퇴해서 물러서야 했다. 절묘한 시기에 나타난 차칸 테무르와 그의 병사들 때문이다.
덕분에 그들은 순식간에 병력의 절반 가까이 잃고 도망치는 신세가 됐다.
그날 무려 8만 명이나 잃었다.
산서성에서 출발할 당시에 그들은 거의 20만 명까지 세력을 키운 상태였다.
그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홍건적과 농부들을 끌어모은 덕분이었다.
그런데 단숨에 절반 가까이 잃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 이득을 본 것은 장사성의 대주국과 탕화의 오국이다.
연쇄적으로 대규모 병력이 움직인 덕분이다.
반성이 떠난 공백을 노린 탕화는 산서성을 차지했다. 장사성도 산동성의 나머지를 이번 기회에 얻을 수 있었다.
차칸 테무르가 대도를 지키기 위해서 병력 상당수를 움직인 덕분이었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번 꼴이었다.
“분명 우리 내부에 간자가 있습니다!”
당연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나름 안 돌아가는 머리를 굴려서 대도의 안팎에서 동시에 일어났는데 이미 차칸 테무르는 여러 함정을 파놓고 있었다.
누군가 알려준 게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장군들은 간자를 찾는 것보다 서로를 탓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주원수 장군이 지키고 있던 보급 부대가 급습당해서 식량 대부분을 잃은 탓에 사기가 바닥을 쳤기 때문이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솔직히 관선생의 기마병이 제때 도착하지 못해서 오히려 차칸 테무르의 반격에 당한 거라 보는 게 맞습니다.”
따지고 보면 다들 할 말이 없었다.
서로 적어도 하나씩 중요한 실수를 했고 주력 병사는 뒤로 물려 놓은 탓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전면에 내세운 것은 농민 출신으로 제대로 된 병사도 아니었다.
주력인 병사는 남겨놔야 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만약에 대도가 함락되면 왕좌를 놓고 다툼이 벌어질 게 뻔했다.
진짜 싸움은 그때부터라 여겼다.
온갖 고생은 다 하고 엉뚱한 이한테 어렵게 얻은 왕좌를 넘길 생각은 없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치국부터 마시고 있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어쨌든 그들은 현재 쫓겨나듯 요서 지역에 접어들고 있었다.
불화의 씨앗은 발아(發芽)했다.
지금까지 같이 붙어 다닌 것이 신기할 정도로 서로 견제하던 이들이었다.
그나마 대도까지는 점점 더 세력을 불리고 있었기에 겨우 참아오던 이들이다.
문제는 이쯤 되자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무조건 만주로 가야 합니다.”
“그건 아니 되오! 요왕의 저력을 무시할 수 없소. 그들이 가진 기병이 얼마나 많은지 전혀 알지 못하지 않소.”
“그러면 고려로 가잔 말입니까? 그건 더 말이 안 됩니다! 몇 해 전에 나하추와 모거경이 섣불리 움직였다가 요동에서 전멸당했던 것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관선생 말이 맞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주와 요동.
둘 중에 어디로 가느냐.
지금 그들은 그게 문제였다.
당한 것이 있기에 다시 대도로 돌아가는 것은 아무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번에 내리는 결정에 따라서 죽느냐 사느냐가 정해지는 중요한 순간이다.
당연히 서로가 가진 생각이 달랐다.
반성과 주원수는 고려를 주장했고,
사류와 관성생은 만주로 가길 원했다.
차라리 모거경이 이끌던 홍건적은 그를 중심으로 하나로 뭉치기라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두 명씩 나눠서 뜻을 굽히지 않으니 쉽게 결정이 안 났다.
하지만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렇게 입씨름을 하는 동안에도 요서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유익과 고가노가 끈질기에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면전으로 번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가 그런 상황은 꺼리는 중이었다.
고가노는 병력의 수가 홍건적보다 적었고 홍건적은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고가노는 그들이 어서 빨리 요서 지역을 지나서 어디로든 꺼지길 바라고 있었다.
일단 그가 지배하고 있는 요서를 지나면 신경 쓸 바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흘이나 논쟁을 펼친 결과.
부신시(阜新市) 부근을 지날 무렵에 홍건적을 이끄는 수괴들은 둘로 찢어졌다.
반년 가까이 누적된 피로감이 상당한 탓에 더는 이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별도 아름답지는 않았다.
보급품을 어떻게 나누냐는 문제 같은 것들 때문에 계속 다툼이 생겼다.
하지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우연히 얻게 된 황실의 옥새였다. 그걸 누가 갖고 가냐를 가지고 칼부림까지 일어났다.
결국에는 반성이 힘으로 누르는 데 성공했고 어렵게 합의를 마친 그들은 각자의 살길을 찾아서 나뉘어서 떠났다.
홍건적이 만주와 요동 방면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정찰대 소속의 정개.
그는 수풀 사이에 완벽하게 위장한 상태로 요서 지역에 들어선 후부터 줄곧 홍건적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때로는 모래 아래 숨기도 했고 수풀 사이에서 온종일 머물 때도 있었다.
상당히 고된 일이지만,
정개는 상당히 이 일을 즐겼다.
작전에 나서면 심장이 쫄깃한 느낌이 주는 쾌감이 작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따라 홍건적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원래 정상이 아닌 녀석들인 것은 알고 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홍건적은 정말 구제 불능이었다.
보초를 서다 조는 일은 흔했고,
민가를 약탈하고 다니는 일도 잦았다.
병사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동네 양아치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애초에 군기가 없기 때문이다.
고려군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들을 서슴없이 하는 이들이 홍건적이다.
그래도 섣부른 판단은 할 수 없었다.
거의 절반쯤 따로 방향을 잡고 나눠지는 것을 보면 약탈하러 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갈 때면 많아야 수백 명 단위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또 무슨 뻘짓을 하려는 거지?”
최근에 간자에 대한 경계가 심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잠입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기존에 심어 놓은 연락책 상당수가 대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했다.
감찰사에서는 아직 연결된 이들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들과 별개로 최고의 정찰병이라 불리는 체탐꾼이 그였다.
체면이 있지 그냥 물러날 수는 없었다.
수만 명이나 되는 이들이다.
모든 이들의 얼굴을 아는 이는 없다.
그것 하나만 믿고 수풀 속에서 바지춤을 단속하며 걸어 나온 그는 자연스럽게 홍건적의 행렬에 합류했다.
“아이고··· 배가 왜 이렇게 아픈 거야?”
“도대체 뭘 먹었길래 그러는 건가.”
“글쎄, 배가 너무 고파서 산속에서 이것저것 주워 먹어서 그런가 보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조심해야지. 그러다 훅 가는 수가 있어.”
친화력 하나는 확실히 갑이었다.
그는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는 홍건적 사이에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나머지 절반쯤 되는 이들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아냈다.
홍건적이 두 무리로 나뉘었다는 것을 들은 그는 저절로 몸이 들썩였다.
고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만약에 이게 사실이라면 손쉽게 요동에서 홍건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중무장한 철기 기마병의 대부분을 관리하는 관선생도 만주로 떠났다고 한다.
어서 이 소식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몸이 들썩거렸으나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혹시라도 거짓 정보일 수 있었다.
그렇게 홍건적과 반나절 정도 더 걸은 그는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보급품도 절반으로 나뉘었고 모든 병사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쯤 되자 정개는 배를 부여잡고 숙영지를 빠져나왔다.
“에이씨! 또 신호가 오네.”
당연히 그를 막는 이는 없었다.
군기라고는 전혀 없는 홍건적다웠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수풀마다 머리 하나씩은 튀어나와 있었다.
숙영지에 화장실 같은 기본적인 것도 마련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때부터 정개는 조심히 움직였다.
그가 인근에 있는 작은 동굴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두 시진 후였다.
요서 지역에는 은밀하게 만들어 놓은 거처의 수가 적지 않았다. 대부분 정찰대의 보급을 위해 만든 곳이다.
수풀로 가려진 동굴은 어두웠다.
그 안으로 들어선 그는 생존용 짐꾸러미와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가장 먼저 그는 짐꾸러미 안에 있는 연필을 꺼내서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들을 최대한 축약해서 적기 시작했다.
한글로 적힌 내용은 두 줄에 불과했다.
[홍건적 분열, 만주와 요동 각각 6만 명씩 이동 중, 초이레 전에 요하강 도착]
그 이상은 적을 공간이 없었다.
더 정확한 정보는 직접 전달해야 했다.
그런 뒤에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는데 안에는 새가 들어 있는지 날개짓을 퍼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에 정개가 꺼낸 것은 전서구로 사용되는 용도의 비둘기였다.
그는 조금 전에 쓴 쪽지를 다리에 묶은 뒤에 비둘기를 조심스레 날려 보냈다.
비둘기는 훈련받은 대로 요하강 부근에 주둔 중인 정찰대 대장에게 갈 것이다.
요동의 성까지 거리가 상당했다.
여기서 그곳까지 전서구를 곧장 날리는 것은 무리였다. 일정 거리를 넘어서면 아무리 전서구라도 도달하지 못한다.
그나마 평소에 이 지역에서 훈련을 많이 해놓은 터라 길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날개짓을 하며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는 정개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너무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자 비둘기 몇 마리가 그의 머리 위를 지나서 날아갔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다른 동료가 날린 것으로 보였다. 이 근방에 그와 같은 체탐꾼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백 명이 요서 지역에 나눠서 홍건적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심지어 아예 마을에 눌러앉아서 위장한 신분으로 살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정개도 그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한 마리라도 무사히 도착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