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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36화 (13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36

연주에 정착하고 있을 무렵.

여진의 분위기는 꽤 혼란스러웠다.

유목민 생활을 하는 그들은 고려를 일종의 식량 창고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 부근에서 가장 만만한 존재였다.

그런 고려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지금까지 알던 고려는 잊어야 했다.

새로운 고려의 왕이 즉위한 뒤부터 완전히 다른 새로운 나라가 된 것 같았다.

실제로 상당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올해 서른둘이 된 퉁두란(佟豆蘭).

원래의 이름은 훨씬 더 길었으나 다들 그를 그렇게 불렀다. 최근에 그는 남쪽에 있는 고려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건주 여진의 부족 가운데 하나를 이끄는 부족장의 아들인 그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난세에 영웅이 나온다고 했다.

아무래도 지금이 그때인 것 같았다.

소금 장수가 한 나라의 왕이 됐다.

그렇게 세워진 나라가 중원에만 너덧 곳이 넘어간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왕이 되겠다는 허황한 꿈을 꾸지는 않았다.

퉁두란은 영웅의 곁에 서고 싶었다.

과연 그들은 어떤 세상을 보는 건지 궁금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고려의 왕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컸다.

밑바닥에서 성공 신화를 쓴 이는 아니나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가장 눈에 띄었다.

그는 고려를 단숨에 재건했다.

쌍성총관부와 요동까지 집어삼킨 고려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했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언덕에 앉아 있자 오랜 친우인 보개(甫介)가 다가왔다.

“여기 있을 줄 알았다. 다들 사냥하느라 바쁜데 이런 데서 농땡이를 피우고 있냐.”

“왔냐···.”

“요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오히려 아무 일도 없어서 큰일이지.”

퉁두란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여진의 부족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었다.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 같았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은 신의 축복이야.”

“고려는 나날이 강성해지는데 우리는 여전히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니 답답해서 그런다.”

“대신 우리는 하늘의 매처럼 자유롭지 않은가. 어차피 아무리 강성해도 한때에 불과한 거야. 원나라를 봐도 알 수 있잖아.”

보개는 조금 걱정되었다.

퉁두란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지금의 그를 보면 큰 사고를 치기 직전의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가 깊은 생각에 잠기면 뭔가 일이 터졌다.

심지어 요즘에는 고려인들과 어울리는 일이 잦았다.

“요즘 고려인과 만나는 횟수가 너무 잦아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될 정도야.”

“적을 알아야 대비할 거 아닌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린 시절부터 형제처럼 자란 나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여간 그냥 넘어가 주는 법이 없군.”

퉁두란은 피식 웃으며 넉살을 부렸다.

상당히 동안인 그는 아직도 약관 정도의 청년처럼 보였는데 얼핏 보면 여인처럼 느껴질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퉁두란은 그런 말을 듣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만약에 그의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꺼낸다면 앳된 외모에 감춰진 그의 무예 실력을 몸소 겪을 수 있을 것이다.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그의 모습을 보고 보개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자네도 이제 아버님의 뒤를 이어서 천호의 직위를 받아야지.”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는 솔직히 그런 자리에 전혀 관심이 없네.”

“나 같은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가질 수 없는 자리야.”

“필요하면 자네가 가지게.”

건주 여진에 소속되어 있는 아버지 아라부카가 가진 천호 직위의 위세는 바닥을 쳐서 허울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가 가진 실질적인 힘은 천여 호에 달하는 부족에게서 나오는 것쯤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사실이었다.

이미 여진은 원나라와 단절되었다.

기존에 나하추가 있을 때와는 달라졌다.

당시에는 그나마 그를 통해서 원나라의 황실과 가늘게나마 끈이 이어져 있었다.

허나 지금은 왕래조차 아예 없었다.

보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퉁두란을 노려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재수 없네.”

“하하! 농일세. 하지만 요즘 원나라 천호의 위상은 고려에서 상사라 불리는 이들보다 못한 지 오래되지 않았나.”

“겨우 이백오십 명의 병사를 이끄는 고려의 무관과 비교하는 것인가?”

“우리 여진족도 살아남으려면 현실을 직시해야지. 지금 건주 여진에 고려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 어디에 있는가.”

지난 몇 년 사이에 생긴 일이다.

대부분의 여진족은 옛 생활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나 바뀐 부족도 있었다.

특히 고려와 맞닿아 있는 건주 여진은 말을 내주고 곡식을 받는 무역을 하면서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된 곳이 많았다.

그 영향력이 작다고 할 수 없었다.

이제 일부 부족은 고려에서 거래를 끊으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두 해 전에 가뭄이 심할 때.

상당수의 여진족이 꽤 곤란을 겪었는데 고려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봐도 되었다.

더구나 약탈은 꿈도 못 꿨다.

고려의 국경은 매우 단단해졌다.

과거에는 말을 타고 습격을 한 이후에 다시 돌아오는 방식으로 부족한 곡식을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함경도에 주둔하는 동별초 때문에 불가능해졌다.

요즘 동별초의 악명은 상당했다.

운이 좋아서 고려의 마을을 털어도 정말 이를 악물고 끝까지 추격을 해왔고 어떻게든 그 대가를 치르게 했다.

몇 개월이 걸려도 반드시 찾아와서 보복을 하니 쉽게 건드릴 수 없었다.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간 것이겠지.”

보개는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고려에서 약탈을 하지 못하는 탓에 요즘은 여진족끼리 치고받고 있었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천호인 아라부카의 부족에서 독립해서 꾸린 마을도 매년 두어 차례 이상은 습격을 당했다.

그때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적어도 수백 마리의 말이 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그쪽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방향이 퉁두란과 보개가 사는 마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제길! 기습인가?”

“아무래도 또 김삼선 그 새끼인 거 같네.”

“이 빌어먹은 녀석들! 저번에 기회가 있었을 때 잡아서 멱을 땄어야 했어.”

“늦기 전에 어서 가지.”

마음이 다급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는 싸울 수 있는 이가 없었다.

하필이면 오늘은 대부분의 이들이 사냥을 떠난 상태였다. 고려에서 최근에 가죽을 제법 비싼 가격으로 쳐주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말에 올라타서 미친 듯이 마을을 향해 달려야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이 있던 곳에서 마을까지 곧장 내려갈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돌아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달려야 했는데 말이 거품을 물 무렵에 도착한 마을은 이미 박살이 나 있었다.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대부분 마을에 남아있던 남자들이었다.

끝까지 반항한 것인지 목이 잘려졌고 여자와 아이들은 모조리 끌려갔다.

남아있는 부족민은 노인들이 전부였다.

퉁두란은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을 붙잡고 약탈자들이 누군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었느냐?”

“김삼선과 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이런 썅! 당장 사람들을 모아서 이번에는 반드시 그놈의 모가지를 가져옵시다.”

보개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일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납치된 마을의 주민들 중에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퉁두란의 가족은 무사했다.

마침 아버지가 이끄는 마을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안도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김삼선의 다음 목표는 그의 아버지가 이끌고 있는 마을이었다.

그곳의 규모는 훨씬 더 컸지만,

기습을 당하면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이기더라도 큰 피해가 생길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무조건 방어하는 쪽이 불리한 싸움이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이 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보개, 자네는 여기 남아서 사냥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길 기다리게.”

“자네 혼자서 뭘 어쩌려고?”

“적어도 저들보다 먼저 가서 습격에 대비하라고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병사들이 있으면 끌려간 사람들도 구할 수 있을 걸세.”

“섣불리 혼자 움직일 생각은 말게.”

보개는 끝까지 그의 걱정을 해주었다.

혹시라도 무모하게 복수를 하겠다고 혼자 움직일까 봐 염려되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보고 퉁두란은 웃으며 말에 올라탔다.

“내가 그 정도로 바보인 줄 아나.”

그런 뒤에 곧장 말을 몰고 달렸다.

약탈자들의 흔적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많은 수의 말이 움직인 터라 당연한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아버님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걸 보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한동안 흔적을 따라 달리던 그는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다른 방향에서 꽤 많은 수의 무리가 합류한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그들은 오히려 추격자에 가까웠다.

실제로 얼마 더 지나자 시체가 뒹굴고 있었고 바닥에는 화살이 떨어져 있는 것이 제법 격렬하게 싸운 흔적이 보였다.

“누군가에게 습격을 당한 것인가?”

그때부터 조금 더 속도를 냈다.

이 근방에서 김삼선을 대적할 정도의 여진의 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여러 부족을 통합해서 상당히 덩치가 커졌다.

따라서 이런 일을 벌인 이들이 누군지 대충 감이 왔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에 이백여 명의 기마병이 보였다.

그들의 앞에는 납치된 마을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들은 김삼선의 병사들이 아니었다.

고려군에 소속되어 있는 동별초였고 그들을 이끌고 있는 조인벽은 퉁두란과 제법 친하게 지내는 이였다.

조인벽도 뒤늦게 그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두란이 아닌가, 오랜만이네.”

“혹시 김삼선은 잡힌 건가?”

“아니, 아쉽게도 놓쳤네. 이 사람들을 내려놓고 꽁지 빠지게 도망치더군.”

“제길! 명줄 하나는 길군.”

“반응을 보니 이 사람들은 자네 부족 사람들인 것 같군. 필요하다면 마을까지 데려다주겠네.”

호의를 거절할 여유는 없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이들을 데리고 걸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퉁두란은 염치 불고하고 조인벽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말 고맙네.”

“고맙기는 예전에 자네한테 신세 진 게 있지 않은가. 그걸 이제야 갚을 수 있으니 다행이네.”

“그게 언제 일인데 아직도 담아두고 있는 것인가.”

두 사람의 인연은 꽤 오래되었다.

약관 무렵에 멧돼지 사냥을 하다가 다친 조인벽을 구해준 것이 퉁두란이었다.

만약에 그가 제때 찾지 못했다면 아마 그는 당시에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조인벽은 언제나 그를 생명의 은인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들은 곧장 움직이기 시작했다.

동별초는 아이와 여자를 말에 태웠다.

여분의 말을 항상 끌고 다니기에 말이 부족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게 마을로 돌아가자 보개는 누구보다 가족이 무사히 돌아왔음에 기뻐했다.

하지만 마을에는 곡소리가 가득했다.

이번 습격으로 대부분이 가족을 잃었다.

조인벽이 혀를 차며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슬 떠나려 하자 퉁두란은 다급하게 그를 불러 세웠다.

“내게 할 말이 있는 것인가?”

평소답지 않게 머뭇거리고 있자,

조인벽은 출발하지 않고 기다렸다.

내심 기대 중인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이렇게 함경도 지역을 돌고 있는 이유는 더 많은 여진의 부족을 고려로 품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퉁두란도 그걸 고민했다.

생각보다 많은 피해가 생겼다.

사냥을 떠났던 이들이 돌아와도 더는 마을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아버지 밑으로 들어가는 것은 싫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고려로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한동안 고민을 한 끝에 마음의 결심을 내린 그는 마침내 고려에 내투하겠다고 의사를 밝혔고 조인벽은 크게 반겨주었다.

김삼선의 기습에 의해 당했으나 그가 이끄는 부족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사냥꾼이자 병사들이었다.

고려에 크게 도움이 될 이들이다.

두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어쩌면 그게 그의 운명일지도 몰랐다.

원래의 역사에서도 퉁두란은 고려로 내투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하지만 퉁두란보다 훗날 고려에서 얻게 되는 이름이 훨씬 더 유명했다.

그의 이름은 이지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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