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33
마두라이와 거래를 마친 뒤.
곧장 학당의 선생을 모집하였다.
마두라이까지 가서 일을 해야 하는 자리였으나 모집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미 고려는 각국의 언어를 익힐 수 있는 언문(言文)학을 성균관에서 정규 과정 중의 하나로 삼아서 가르치고 있었다.
더구나 민간에서도 개별적으로 마두라이의 언어를 배우는 이들이 있었다.
언어는 신분 상승의 기회였다.
벽란도에서 일하던 양인이 마두라이 말을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높은 관직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한 이야기였다.
심지어 요즘에는 교지국과 섬라곡국과의 교역이 나날이 늘어가기에 그곳의 말을 익히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었다.
고려에서 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니 저절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날을 위해서 그동안 배웠던 마두라이 말을 선보일 때가 왔구나!”
“아직 대화도 제대로 하지 못하잖아. 마두라이에서 온 상단 사람들 앞에만 서면 더듬거리는 거 내가 한두 번 본 줄 알아?”
“어차피 고려의 말을 가르치는 일이니 유창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당연히 지원자가 적지 않았다.
5년 계약을 하고 마두라이에서 고려의 말과 훈민정음을 가르치고 돌아오면 생각보다 큰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한다고 모두가 선생이 될 수 없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다.
아무나 보낼 수는 없는 자리였다.
대부분의 사람은 어린 시절에 자연스럽게 말을 익힌다. 그게 왜 그렇게 되는지 설명하라고 하면 정작 머뭇거리게 된다.
이번 기회에 정리가 필요했다.
이와 관련된 일은 성균관의 대사성인 강중경에게 모두 맡기기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요동을 얻고 난 이후에 넘어온 원나라의 유민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교재가 있었다.
고려에서는 무조건 고려의 말과 글자를 사용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덕분이다.
그리고 선물로 받은 다마스쿠스 검은 예식용을 제외하고 모두 나눠줬다.
열 자루밖에 되지 않기에 그걸 받은 이들은 병마사와 지휘관급에 한정됐다.
안우와 이방실 등은 포함되었고 최영과 변안열까지는 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해군에서도 김휘남과 주덕유 그리고 양관이 한 자루씩 나눠서 가져갔다.
그중에는 윤해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양을 지키는 세 명의 장군 중에 유일하게 그가 받게 된 이유는 가장 연장자이고 직위도 높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비슷한 수준의 다마스쿠스 검이 추가로 더 들어올 예정이라 그걸로 인해 시기한다거나 그런 이들은 없었다.
더구나 아예 주는 것도 아니었다.
관직에서 내려오면 검도 반납해야 했다.
“참으로 기묘한 검입니다.”
윤해에게 잠시 검을 건네받은 이원림은 홀린 듯한 눈빛으로 천천히 살펴봤다.
물결치는 무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혼미해지는 느낌마저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무게도 가벼워서 이게 과연 제대로 베어지는 건지 의심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불신은 금방 사라졌다.
가노를 시켜 밀짚으로 만든 허수아비를 베어보니 별로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그냥 휘둘러도 반으로 갈라졌다.
확실히 기존에 쓰던 검과 비교하면 더 날카로웠다.
“이 검의 이름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다마··· 뭐라고 했는데 그냥 다들 마팔검이라고 부르더군.”
“확실히 대단한 검인 것 같습니다.
“그만 그것 좀 내려놓고 술이나 하지. 애써 덥혀 놓은 술이 다 식겠네.”
윤해가 타박을 하자 그제야 이원림은 아쉬움을 애써 감추며 검을 내려놨다.
그나마 순번을 따져보면 다음 차례일 것 같은데 언제 마두라이의 배가 들어올지 알 수 없기에 어느 정도 기다려야 했다.
“하하.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의미로 제가 한 잔 따르겠습니다.”
“자네가 가져온 아락주가 참으로 좋네. 이건 어디서 만든 것인가?”
“제 동생이 직접 빚은 것인데 남은 것이라고는 이게 전부입니다.”
윤해는 상당히 아쉬워했다.
그만큼 마음에 쏙 드는 아락주였다.
뭔가 다른 술에서 느껴지지 않는 깊이가 있달까. 최근에는 이런 술을 맛보기 정말 힘들었다.
“2년 전에 가뭄이 극심했을 때는 몰라도 지난해 가을의 수확량이 꽤 되는데 다시 빚으면 되지 않는가.”
“아쉽게도 지금은 대마도에 있어서 당분간은 맛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낭군을 보러 간 게로군.”
“아마 올해는 거기서 머물 것 같습니다.”
이원림의 동생인 이연과 주덕유 부부는 거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일 년 중에 고작 달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개경에 머물다가 대마도로 돌아가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슬하에 벌써 세 명의 아들과 딸이 있었다.
“다들 고생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군.”
“그나저나 요즘 감찰사와 영의정에 대한 말이 곳곳에서 많이 들리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소리이니 신경 쓰지 말게.”
윤해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감찰사를 이끌던 이인복은 얼마 전에 백문보를 대신해 영의정 자리에 올라갔다.
그리고 감찰사는 오랜만에 돌아온 김첨수가 맡았다.
문제는 그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지난 몇 년 동안 흔적도 찾아볼 수 없던 이가 김첨수였다.
당연히 여러 말이 나오고 있었다.
개중에는 엄청난 재물을 주고 자리를 사들인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윤해와 이원림은 그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잘 알기에 오히려 답답했다.
“지금까지 감찰사의 수장으로 있으면서 영의정이 언제 물 한 잔이라도 누군가에게 받아서 마신 적이 있기는 하던가?”
누구보다 청렴하게 지냈던 이인복이다.
그래야 아래에 있는 감찰 어사들과 죄를 지은 이들을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권력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온갖 유혹을 이겨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시기와 질투는 눈까지 멀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할 시간에 자기들 할 일이나 잘하라지.”
“그나저나 응양군의 훈련이 요즘 너무 과하다고 걱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고려 최강의 부대를 만들라는 전하의 어명이 있으셨지 않은가.”
응양군은 윤해의 자랑이었다.
그가 맡은 이후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전하의 친위군이기도 한 응양군은 규모가 오히려 조금 작아졌으나 개개인이 정예화되어 엄청난 무력 집단이 되었다.
현재의 응양군은 특수 작전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에 가까웠다.
홀치도 고려 최고의 무사들을 모아 놓은 곳이나 집단으로 치르는 전투에서는 응양군을 쉽게 이길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고려에서 칼 좀 쓴다는 병사들은 장군들이 추천해서 응양군으로 보내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신분이 확실한 이들이 홀치로 선발되는데 응양군은 무관을 양성하는 역할도 일정 부분 담당하고 있었다.
응양군에 들어간 이후 성균관에서 훈련도감에서 만든 군사학을 수료 받으면 앞으로 무관으로서 탄탄대로였다.
일단 기본적으로 중사부터 시작한다.
당연히 다른 이들보다 승진도 훨씬 빠른 편이었다. 중요한 관직을 받을 가능성도 컸는데 쉽게 볼만한 과정은 아니었다.
아무리 잘 싸워도 머리가 비어 있으면 병사를 이끄는 무관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이들에게는 차라리 최전방에 가서 실적을 쌓거나 홀치를 추천해줄 정도였다.
머저리 같은 무관에게 병사를 맡겼다가 모조리 잃어버릴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이원림도 잔을 비운 뒤에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슬쩍 윤해에게 부탁을 하나 했다.
“요즘 홀치에 결원이 제법 생겼는데 쓸만한 이들이 있으면 보내주십시오.”
“안타까운 일이지만, 쓸만한 인재가 완전히 씨가 말랐네.”
“눈이 너무 높아지신 것은 아닙니까?”
“하하! 그럴지도 모르지.”
윤해도 그건 인정했다.
최근 몇 년간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이들만 보면서 살고 있기는 했다.
담벼락 정도는 그냥 뛰어넘는 날렵한 이들도 있었고 힘이 장사거나 거인처럼 커다란 몸집을 가진 병사도 많았다.
그런 장기 하나 없이 버티긴 어려운 곳이 응양군이었고 그 정도 되는 이들과 함께한 세월이 제법 길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어지간해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전하의 숙위에 문제가 있을 정도인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
“당장 떠오르는 이는 없으나 괜찮은 이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라고 하겠네.”
“매번 이렇게 부탁드려서 송구합니다.”
“그게 어찌 자네 탓인가.”
응양군이 무관 양성 기관의 역할을 하듯이 홀치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관이 아닌 감찰사의 일을 맡아서 해외로 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원나라 내의 비밀 조직 경호와 공작 활동에 동원되고 있었다.
비밀리에 움직이는 곳이지만, 종종 무력이 필요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럴 때는 소수 정예로 움직여야 했다.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며 한참 동안 술을 나눠마시니 이원림은 꽤나 취기가 올라온 것 같았다. 평양에서 술고래로 유명한 윤해와 같이 마셔서 지금까지 버틴 것도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 탓인지 그는 평소 꺼내지 못했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전하를 숙위하는 일을 제게 맡겨 주셔서 고맙지만, 저도 이제 편한 이곳에서 벗어나서 전방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어허! 그런 소리 말게나.”
“공명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장군이라 불리고 있으나 정작 제대로 전투를 치른 일이 없지 않습니까.”
이원림은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전하를 숙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전장에서 싸우는 다른 장군과 비교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유일하게 칼을 썼던 때가 임진정변 당시에 부원배 몇 명을 처단한 것이 전부였다.
“내가 그리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지천명을 넘어서니 느끼는 것이 있는데 저마다 제 역할이 있기 마련이네.”
윤해는 그런 그를 만류했다.
전하께서 왜 이원림에게 홀치를 맡긴 건지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원림은 무예가 대단하지 않다.
그의 수하에 있는 홀치 중에서 이원림을 이기지 못할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고려의 무관 중에서 드물게 총명한 머리를 가지고 있고 병사들을 통솔하는 능력도 뛰어난 이가 바로 이원림이었다.
항상 궁궐의 숙위에 대해 고심하고 있는 그가 있는 덕분에 전하께서 마음 편히 정사(政事)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이원림이 서운하다는 이유로 숙위를 소홀하게 할 사람은 아니나 윤해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주의를 줬다.
“아직 고려 내에서 백련교도를 이끄는 수괴가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말게.”
*
그 무렵의 원나라 산서 지방.
그곳에도 겨울이 찾아왔으나 유독 올해는 날이 그다지 춥지 않았다. 그런 탓인지 산서성 부근은 홍건적의 활동이 왕성했다.
몇 년 전에 차칸 테무르가 기황후의 명령대로 군대를 움직였다가 산동과 산서 지역의 일부를 잃은 탓이었다.
기존까지 그곳을 지키던 이사제는 뒤로 물러나서 차칸 테무르와 병력을 합쳤고 산서성 인근은 홍건적의 손에 넘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탕화의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같은 홍건적이라도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반성을 중심으로 뭉친 사류와 주원수 등은 각자가 가진 욕망을 감추지 않았다.
그들은 용의 꼬리가 되기보다는 뱀의 머리가 되길 원했고 탕화나 장사성보다 먼저 황궁을 차지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렇게 합쳐진 홍건적의 수가 7만 명을 넘어설 정도이니 허튼 꿈은 아니었다.
그런 홍건적의 무리 중.
유독 얼굴이 앳된 청년이 있었다.
뺨에는 검은 땟국물이 흐르고 있었으나 은근히 귀티가 나는 얼굴이었다.
그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숙영지 내에서 뭔가를 살피더니 움집과 같은 지푸라기로 쌓아 만든 거처 안으로 들어갔다.
“살펴보고 왔습니다.”
“고생했구나.”
“이번에 관선생이란 수괴가 이끌고 온 중무장한 철기(鐵騎)가 적지 않습니다.”
홍건적 말단 병사가 나눌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정체는 한방신과 정도전이었다.
원나라에 들어와서 김첨수의 후임이 된 한방신은 아예 홍건적의 무리 속에 들어올 계획을 짰고 생각보다 쉽게 침입했다.
위험한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불입호혈 부득호자(不入虎穴不得虎子)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형제로 위장한 상태였는데 혹시 몰라서 홀치 출신의 무사가 숨어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현재 이곳에 잠입해 있는 이들만 합쳐도 대략 백여 명은 넘어갈 정도였다.
“수가 어느 정도 되는 것 같더냐?”
“적어도 3천 명은 넘어갈 것 같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세력이 늘어나는구나.”
“근방에 있는 홍건적의 수괴들이 모두 뭉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가능하면 이들이 동쪽으로 가지 않게 해야 합니다.”
“전하께서도 그걸 바라실 것이다.”
고려는 지금의 세력 간의 균형이 유지되길 바라고 있었다. 누구 하나가 무너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곳에 있는 홍건적 무리의 규모가 벌써 수만 명 단위가 되었다.
이러다가 십만 명 정도는 손쉽게 넘어갈 것 같았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한방신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다.”
“무슨 수가 있습니까?”
“저들에게는 우두머리가 없지 않느냐. 지금으로서는 그게 유일한 약점이구나.”
그제야 정도전은 그가 떠올린 책략이 뭔지 알아챘다. 결집력이라고는 없는 집단이니 흩어 놓자는 말이었다.
정도전은 자신이 생각한 것이 맞는지 한방신에게 물어보아야 했다.
“자중지란(自中之亂)을 말씀하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