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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32화 (132/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32

1361년(신축년) 정월.

이 무렵의 고려는 무척 바빴다.

올해는 14세기에 들어선 이후에 고려 최고의 위기가 닥치는 해이기 때문이다.

연말에 쳐들어올 홍건적으로부터 고려를 방어하기 위한 준비는 바쁘게 진행됐다.

요동에 있는 성에는 화약과 신형 화승총 그리고 온갖 전략 물자로 가득 채워졌다.

당연히 병사들의 무장도 바뀌었다.

수년째 밤낮없이 망치를 두드린 덕분에 칼과 방패 등의 보급을 거의 마쳤다.

십만 명에 달하는 병사를 무장시키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광산에서 왜구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철광석을 캐내도 부족할 정도였다.

그나마 대주국과 같은 곳을 통해서 수입을 해서 다행이었으나 대륙 전체가 전쟁 중이라 철광석의 값은 치솟았다.

그나마 마두라이에서 철광석을 어느 정도 수입해오고 있는 것도 꽤 도움이 됐다.

하지만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배에 싣고 올 수 있는 양이 많지 않기에 결국에는 최대한 자체 수급을 해야 했다.

“지난해부터 진행되는 요동의 철광산 개발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중이오?”

그곳에 있는 철광산은 다른 한반도의 광산과 비교 불가능할 정도의 규모였다.

두만강 남쪽에도 철광산이 있지만,

가능하면 요동의 자원부터 써야 했다.

언제 잃을지 알 수 없는 땅이다.

가능하면 고려에서 가지고 있을 때 뽕을 뽑는 것이 최선이었다.

지켜낼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죽기 전까지 그곳을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먼 훗날까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나라가 그랬듯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공부 상서 황석부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다.

“봄부터 본격적인 채광이 시작될 예정이옵니다.”

요즘 그는 요동에 머물고 있었다.

흔적만 남은 옛 성을 다시 축성하고 보수하느라 상당히 바쁘게 지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광산 개발을 해야 했는데 슬슬 그 성과가 나올 시기였다.

“얼마 전에 광산에서 노역 중인 왜구 중의 일부가 난동을 부렸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된 것이오?”

“탈출을 기도했으나 서별초와 해군이 대부분 다시 잡아들였사옵니다.

“민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그들을 관리하는데 더 주의를 기울이시오.”

노예들은 불안 요소 중의 하나다.

현재 노역 중인 이들의 수가 적지 않다.

요동에서 포로로 잡은 홍건적과 왜구를 모두 포함하면 대략 4만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고려에서 노역 중이다.

잘게 쪼개서 각지에 보냈으나 언제 다시 이런 일이 다시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특히, 왜구가 여러모로 문제였다.

홍건적은 생각보다 고분고분했지만,

왜구 중의 일부는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뭘 믿고 그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덤비는 이들만큼 다루기 어려운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리 걱정되진 않았다.

어차피 그들의 미래는 정해져 있었다.

죽지 않을 정도의 보급만 받고 있었고 광산 일이라는 것이 고된 노동이다.

언제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기에 항상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곳이다.

기록으로도 증명된 사실이었다.

초창기에 잡혀 온 왜구 중에 살아남은 이는 그리 많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연민이 느껴지진 않았다.

보통 그런 곳에 보내지는 이들은 고려를 향해 칼을 겨눈 자들이 대부분이다.

“얼마 후면 원나라에서 고려로 넘어온 유민 중에 일부가 자유 신분이 될 예정인데 정착할 곳은 마련되었소?”

“영의정과 논의한 끝에 요동 반도에 있는 농경지 중심으로 그들이 머물 마을을 건설하고 있사옵니다.”

“10년 동안 고려를 위해서 온갖 고생을 한 이들이니 공부 상서가 신경을 써주시오.”

내가 즉위한 이후에 유입된 유민들에게 약속했던 10년이 거의 다 지나갔다.

초창기에 넘어온 이들은 올해 중에 양인의 신분을 되찾을 예정이었다.

그들은 지금껏 고려에서 진행되는 여러 대규모 공사에 매번 동원되어 노동력을 제공해주었다.

그들 덕분에 즉위 초기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는데 이제 마음 편히 정착할 수 있는 곳을 제공해줘야 할 때가 되었다.

요동 반도의 농경지는 곡창의 역할을 하기 충분한 곳이다. 농사만 지어도 먹고 살기에는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는 대풍년이었다.

그 지역에서 산출(産出)된 콩과 양곡만 가지고도 북부 지역의 식량난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수준이었다.

다른 지역도 어느 정도 평년 수준을 유지했기에 텅 비어버린 고려의 식량 창고는 다시 채워질 수 있었다.

“요동에 있는 성의 식량 창고는 모조리 불에 타지 않는 구조로 바꾸기로 했었는데 그건 어디까지 진행되었소?”

“도로를 만드는데 쓰던 시멘트와 벽돌로 만든 공간이라 어지간한 화재에는 버틸 수 있을 것이옵니다.”

“습기가 차면 양곡이 상할 수 있으니 그 부분은 주의해야 할 것이오.”

장단점이 분명히 있었다.

기존의 창고는 목재로 지어졌다.

그런 탓에 불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었고 종종 수성전을 하다가 불타는 일이 있다.

반면에 시멘트 벽돌로 만든 창고는 환기 문제 때문에 양곡 같은 것들을 오래 보관하기는 어렵다.

“평소에는 일반 창고에 나눠서 보관하고 벽돌 창고에 있는 것부터 사용할 수 있게 안렴사와 논의를 끝냈사옵니다.”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모습이 바람직해 보였다. 이제 고려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이 종종 보였다.

경직된 사고에 갇혀 있던 이들이 하나둘 알을 깨고 나온 덕분이었다.

안 되는 일이란 없다.

일단 도전해보는 게 중요했다.

실제로 하윤린은 내가 살짝 흘려준 힌트를 가지고 증기 기관에 도전 중이다.

그게 성공할 거란 기대는 전혀 없었다.

이론만 있다고 가능한 게 아니다.

대충의 구조는 알려줄 수 있으나 그걸 실제로 구현해낼 설비가 전혀 없었다.

더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권유하고 싶었는데 이미 그것에 완전히 꽂혀 있는 탓에 말릴 수도 없었다.

“요동은 언제 돌아갈 계획이오?”

“며칠 이내에 다시 가봐야 하옵니다.”

“항상 힘든 일만 맡겨서 마음이 좋지 않소. 하지만 조금만 더 힘써주시오.”

“심려치 마시옵소서. 전하 덕분에 소신이 꿈꾸던 모든 것을 이루고 있사옵니다.”

황석부는 천성이 뭔가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 같았다. 그는 수도 이전부터 온갖 대형 공사를 즐겼다.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안 날 것들이 자신의 손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것에 희열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축성이었다.

이번에 그가 요동에 세운 성은 화포에 특화된 요소가 상당히 많이 들어갔다.

높게 올린 성벽 중간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화포와 화승총을 내밀고 쏠 수 있게 만들어놨다.

나는 그쯤에서 황석부를 내보낸 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업무를 보기로 했다.

이른 아침부터 이런저런 회의가 있어서 숨 돌릴 틈조차 없는 하루였다.

그때 환관 안도치가 편전에 들어왔다.

오늘은 모처럼 신소봉이 쉬는 날이었다.

“방금 마두라이에서 온 사신이 남포항에 도착하였사옵니다. 괜찮으시면 오늘 중에 잠시 뵙고자 하는데 어찌하옵니까?”

“급한 일 같아 보이더냐?”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았사옵니다.”

“흐음··· 알겠으니 궁궐로 들라 하라.”

오후에도 정해진 일정이 있었지만,

다른 날로 미뤄도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잠시 후에 안도치와 함께 편전으로 들어온 이는 염제신의 둘째 아들인 염흥방이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오랜만이오. 술탄은 잘 지내고 있소?”

“전하의 배려 덕분에 마두라이가 나날이 번성하고 있사옵니다. 술탄께서는 항상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계시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는 것이오?”

아무 이유 없이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염흥방을 보낼 정도면 이인임이 꽤 중요하게 여기는 일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바칠 것이 있다며 내게 양해를 구했다.

나는 흔쾌히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

잠시 후에 편전에 상자가 들어왔다.

하나는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았는데 나머지 하나는 뭐가 들었는지 꽤 컸다.

그런데 상자를 들고 들어온 홀치들이 나가지 않고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걸 보니 뭐가 들었는지 감이 왔다.

내게 위험한 물건이란 뜻이었다.

그런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안도치를 통해서 내게 전해진 작은 상자 안에는 보검 하나가 들어 있었다.

물결치는 무늬와 가벼운 무게감을 가진 그걸 본 순간에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호오··· 다마스쿠스 검이로구나!’

유럽에서는 전설의 검이라 불릴 정도로 상당히 진귀한 검이 다마스쿠스 검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훗날 인도에서 나오던 우츠 강의 씨가 마르고 제련 방식도 실전된 탓이다.

하지만 내게는 예쁜 쓰레기였다.

칼질은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홀치들이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 것을 보니 확실히 좋은 검인 것 같았다.

손잡이는 용의 머리 형태를 하고 있었고 온갖 장식이 되어 있어서 예식용 검으로 일부러 만든 느낌이었다.

“마음에 드시옵니까?”

“상당히 귀한 것인 것 같은데 고맙다고 술탄에게 전해주시오. 그런데 이건 어떻게 구한 것이오?”

“평소 마두라이의 철광석을 사가던 이슬람 대장장이 몇 명이 얼마 전에 술탄께 몸을 의탁한 덕분에 얻을 수 있었사옵니다.”

염흥방은 대답을 한 뒤에 나머지 상자 하나도 마저 열었다. 그곳에도 다마스쿠스 검이 들어 있었는데 그건 실전용이었다.

손잡이에는 여덟 마리의 말이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었다.

마두라이의 원래 이름인 마팔국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모두 합치면 열 자루였다.

장군들에게 나눠주라고 가져온 것 같은데 이걸 그냥 주는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나는 잘 쓰겠다는 말을 한 뒤에 원래 예정에 없던 일정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본론으로 곧장 들어가자고 재촉했다.

그제야 염흥방은 자신이 고려에 온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하께서 만드신 훈민정음과 고려의 말을 마두라이에서 사용하고자 하오니 전하의 허락을 부탁드리옵니다.”

잠시 듣다 보니 대충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훈민정음을 사용하는 데 허락이 왜 필요하겠는가. 생색을 내면서 내게서 뭔가를 얻어내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이 바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호통을 쳤겠지만, 이인임은 영리하게도 내가 전혀 예상치 못한 조건을 내걸었다.

염흥방은 교역의 대가를 마두라이에게 조금 유리하게 바꾸고 그걸로 학당을 세워서 새로운 공용어를 보급하고자 했다.

솔직히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이인임이 원하는 대로 마두라이 전체가 고려와 동일한 말과 글을 쓴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당장 내가 얻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에게는 상당히 많은 혜택이 되어서 돌아올 가능성이 무척이나 컸다.

해외에서 우리나라의 말로 소통 가능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훗날 영어처럼 말이다.

생각만 해도 즐거운 일이었다.

한국어가 아시아 전역에서 통용되면 얼마나 좋을까. 많은 곳에서 쓸수록 고려의 영향력이 더 강해질 것이다.

한때 이런 생각을 해보기는 했다.

하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인임이 그걸 해보겠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좋은 것은 나눠야 한다는 홍익 인간의 뜻을 따라서 나는 그 제안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그대로 받아줄 수는 없었다.

이미 고려는 화포와 화약을 마두라이에 상당히 좋은 조건으로 팔았고 종종 외상도 해주며 꽤 많은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마두라이에서 우리의 말이 사용되는 것은 무척이나 기쁜 일이나 정작 고려에게 이득이 될 것이 전혀 없지 않소.”

“오늘 가져온 것과 똑같은 최상품의 검을 매년 오십 자루씩 바치겠사옵니다.”

“아무리 좋은 명검이라도 그 정도의 값어치는 아니오.”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쪽에서는 고려말을 가르칠 이를 찾아서 마두라이까지 보내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수지타산이 맞으려면 더 얻어내야 했다.

결국에는 염흥방에게서 다마스쿠스 검의 재료인 최상급 철광석인 우츠 강을 추가로 받아내는 것으로 협의를 마쳤다.

인도 남부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우츠 강이 고갈되기 전에 최대한 싹 쓸어올 생각이었다. 가능하다면 다마스쿠스 장인도 한 명 정도 달라고 하고 싶었으나 그것까지는 조금 무리였다.

“좋소, 그렇게 진행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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