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31화 (131/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31

그로부터 며칠 후.

왕수는 연주 안렴사로 제수됐다.

그에게 주어진 인력은 많지 않았다.

고작 오백여 명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최소 일 년 정도는 연주의 지형을 파악한 뒤에 도시를 세울 곳을 정해야 했다.

당연히 그동안 지원은 아끼지 않고 해줄 예정이었다.

자칫 굶어 죽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들에게 분기별로 보급되는 식량 등은 앞으로 동오의 상단에서 맡기로 했다.

하지만 당장 그들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어느덧 겨울이기에 지금 가봤자 고생만 할 뿐이었다.

적어도 날씨가 풀린 뒤에 가야 했다.

오백 명 중에는 주덕유 함대에 소속된 해군 백 명과 그리고 요동에서 활약한 윤송과 정찰대 백 명이 포함됐다.

기마병이기도 한 그들을 선발한 이유는 독보적인 생존 기술 때문이었다.

정찰의 기본은 생존이었다.

적진에 소수의 인원이 들어가서 길게는 달포 이상을 머물다가 돌아오는 이들이다.

그들이라면 척박한 극동아시아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나머지는 병사가 아니었다.

일꾼으로 보내지는 삼백 명은 왜구와 포로로 잡힌 홍건적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을 토지를 개간하는 노역을 하게 될 예정이었다.

어느 정도 왕수가 연주에 자리 잡으면 캄차카 반도에 있는 광산을 개발하기 위한 이들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주는 천연 황부터 은과 금 그리고 석탄도 있는 지하자원의 보고다.

앞으로 그들은 그곳의 자원을 캐서 고려와의 교역으로 먹고살 것이다.

그렇게 연주 개척을 준비할 때.

신대륙을 향해 2차 탐사대가 떠났다.

가장 먼저 떠난 것은 장사의였다.

그는 추가로 건조된 일곱 척의 탐사용 쾌선을 가지고 떠났다. 그리고 달포 뒤에 배유형의 탐사대도 준비를 마쳤다.

“이번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이 자리에서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겠소. 만약, 기대에 충족하는 성과를 내면 그만큼의 보상이 뒤따를 것이오.”

나는 직접 남포항에 나와 배웅했다.

탐사대를 이끄는 배유형과 선원들을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목숨을 걸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이들에 대한 예의였다.

당연히 효과는 곧장 나타났다.

선원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워낙 항해 경험이 많은 이들인 탓에 두려운 감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동오가 가장 심란한 표정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되기는 했다.

분명 수많은 희생이 뒤따를 것이다.

자신이 내린 결정으로 생긴 결과이니 아마 많은 자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들 자발적으로 탐사선에 올랐으나 모든 일의 책임은 그가 안고 가야 했다.

나도 이미 똑같은 경험을 해봤다.

요동을 정벌하며 잃은 병사들과 지난 탐사 당시에 침몰한 탐사선의 선원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뻐근한 느낌이다.

생각보다 생명의 무게는 무거웠다.

하지만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계속 그런 얼굴을 하고 저들을 배웅할 거면 먼저 들어가 보시오.”

“송구하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고 기다리는 게 전부요.”

평소에 믿는 종교는 없었지만, 살아서 돌아오라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탐사선의 돛이 올라갔고 그들은 천천히 남포항을 빠져나갔다.

배유형의 탐사대는 여섯 척이었다.

짧은 기간 내에 출항 준비를 하느라 장사의의 탐사대보다는 한 척이 적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경쟁자였다.

당연히 장사의가 조금은 유리했다.

이미 한 차례 신대륙에 도달한 경험이 아마 이번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의 배에는 지난 탐사에서 살아 돌아온 다수의 선원이 다시 탑승한 상태였다.

다들 상당히 큰 부를 쌓았으나 바다 사나이의 의리 하나로 다시 뭉쳤다.

하지만 모든 게 유리하진 않았다.

배유형과 선원들은 수년째 마두라이를 오가며 장거리 항해에 익숙했고 함께 지낸 세월이 길기에 호흡도 좋을 것이다.

뚜껑을 열어 보기 전에는 누가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과연 뭘 갖고 돌아올까?’

* * *

고려에서 탐사대가 떠날 무렵.

마두라이 술탄국에서는 재상 자리에 오른 이인임이 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술탄의 전폭적인 지지 덕분에 재상 자리에 오른 것이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당연히 그 기대를 충족시켜야 했다.

마두라이 술탄의 궁궐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그의 집무실에는 언제나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일국의 재상이 머무는 곳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영토가 나날이 늘어가고 있다.

최근에 급속도로 확장 중인 마두라이는 해야 할 일들이 넘쳐서 흐를 정도였다.

당연히 이인임의 업무량도 상당했다.

전쟁 중이라 보급도 신경 써야 하고 전국에서 들어오는 보고와 서류 때문에 활자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래도 이인임의 능력은 출중했다.

괜히 술탄이 그를 믿고 따르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흘려들어도 중요한 일이 생기면 이인임부터 찾았다.

문제는 이곳이 고려가 아니라 사용하는 글과 언어가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온갖 노력을 기울여서 이곳의 말과 글까지 배웠다.

이제는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는데 천축국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문자가 한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 큰 장애물이었다.

“에잇! 이건 도대체 뭐라고 쓴 거야? 이게 글자인지 지렁이인지 모를 정도네.”

이인임은 눈살을 찌푸리며 남부에서 올라온 서류를 이리저리 살펴봐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글씨였다.

가뜩이나 노안이 조금씩 오고 있었다.

이곳의 글씨는 구불구불하고 정말 복잡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보기 힘들었다.

마지막 한 획에 따라 의미가 달라졌다.

한참을 들여다보던 그는 결국에는 포기하고 밑에서 일하는 현지인 관리를 불러서 뭐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원래의 이름이 너무 길어서 아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이였다.

“아율, 이리로 와서 여기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보거라.”

아율은 언어의 천재였다.

고려말도 상당히 유창한 편이었다.

3년 동안 고려에 머물며 배운 덕분이다.

그는 잠시 이인임이 건넨 서류를 들여다보더니 작게 웃었다.

“당연히 못 알아볼 수밖에 없죠. 이건 케랄라 말을 사용하는 이들이 쓰는 문자인 것 같습니다.”

“도대체 천축국에서 쓰는 언어가 몇이나 되는 건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인임은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마두라이 술탄국의 영토가 늘어날수록 다양한 언어와 글자를 쓰는 이들이 생기고 있는 중이었다.

예를 들면 수도인 이곳 마두라이는 타밀 나두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남서부 해안가에서는 케랄라어 그리고 북쪽은 안드라 프라데시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것도 크게 나눈 것이다.

지역마다 고유의 말이 있을 정도다.

이인임이 알고 있는 것만 해도 현재 마두라이 술탄국 내에 최소 수십 개 이상의 언어와 글자가 있었다.

같은 나라인데 다른 언어를 쓴다는 것은 생각도 못 했다.

북부로 갈수록 더 많은 언어가 있다고 하니 골치가 아팠다.

적어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볼 수 있어야 내용을 확인하고 조치를 취할 텐데 그것마저 쉽지 않은 요즘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적혀 있는가?”

“저도 케랄라 말은 잘하는 편이 아니라 정확하진 않은데 병사들이 농작물을 망가뜨려서 탄원서를 보낸 것 같습니다.”

“이것 참···.”

당연히 궁궐에도 여러 관리가 있었다.

각각의 언어에 능통한 이들에게 관직을 주고 문서를 번역하게 시키는 중이다.

문제는 그들을 모두 믿을 수 없었다.

괜히 이인임이 늦은 나이에 이곳의 언어를 배우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다.

부패한 관리는 어디에나 있었다.

그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 현지에서 올라오는 보고의 내용을 일부러 교묘하게 바꿔서 혼동을 주기도 했다.

당연히 그러다가 적발된 이들은 효수해서 본보기로 삼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있다면,

홍영통과 염흥방이 있다는 것이다.

밑에서 도와주고 있는 그들마저 없었다면 못 버텼을 것이다. 도무지 이 나라의 관리들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들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좋아했다.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이곳의 날씨는 정말 끔찍할 정도였다.

사계절이 있는 고려와 달리 마두라이는 일 년 내내 찜통 같은 날씨가 유지된다.

만약에 이걸 알았다면 마두라이에 남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그니 낫샤트람(Agni Natshatram)이라 부르는 불타는 여름이 되면 숨을 쉬는 것도 버거울 정도로 뜨거워진다.

내심 혀를 차며 이인임은 아율에게 평소 궁금하던 것을 물어봤다.

“마두라이의 공용어가 있는데 도대체 왜 사용을 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군.”

“아이들이 배우는 것이 부모가 쓰는 언어이니 쉽게 바뀔 문제가 아닙니다.”

“각지에 세우기로 예정되어 있는 타밀 나두 말을 교육하는 학당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대부분의 재원을 비자야나가르와 치르고 있는 전투에 사용되고 있기에 아직 지지부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인임은 극심한 두통이 밀려오는지 이마를 부여잡고 의자에 잠시 기댔다.

도무지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이곳의 말을 배웠듯이 마두라이 사람들이 고려의 말을 배우면 어떻게 될지 궁금해졌다.

훈민정음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처음에는 새로운 글자에 대해서 반감이 있었으나 직접 써보니 마음이 바뀌었다.

그리고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있었다.

이곳에 사는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고려와 비슷한 단어를 꽤 많이 사용했다.

그것 때문에 조금 수월하게 말을 익힐 수 있었다. 더구나 수년 전부터 고려풍이 유행한 탓에 꽤 많은 단어가 유입됐다.

‘고려의 말과 문자가 들어와서 모든 이들이 사용한다면 이 땅 위에 자리 잡은 고려인들의 위상이 굳건해질 것이다.’

상당히 많은 고려인이 마두라이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온 자신과 같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중에 자신의 후손들이 멸시를 받지 않으려면 권세를 유지해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사람은 금방 은혜를 잊기 마련이다.

아직은 고려에게 화약과 화포 등을 받고 있기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곧장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나갈 채비를 했다.

이인임이 찾아가려고 하는 이는 당연히 마두라이의 술탄인 탄야였다.

이건 혼자 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잠시 후에 이인임을 본 탄야는 그의 안색을 보고 걱정부터 했다.

여름이 끝날 무렵에 열사병에 걸려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고생했기 때문이다.

“재상의 건강이 점점 더 안 좋아지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되오.”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술탄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나를 찾은 것이오?”

탄야의 질문에 이인임을 오늘 있었던 일을 거론했다. 당연히 탄야도 무슨 상황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날이 소통이 어려워지는 상황이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쯤에서 이인임은 공용어 중의 하나로 고려의 말과 글자를 쓰자고 제안했다.

당장 전국에 보급하자는 말은 아니었다.

마두라이의 수도와 근접한 항구 하나를 지정해서 거기부터 고려의 말과 문자를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공짜로 고려의 말을 가르쳐준다고 하면 상당히 큰 호응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곳 사람들 대부분이 고려와의 교역을 통해서 먹고살기 때문인데 일단 그곳부터 시작해서 물꼬를 틀 생각이었다.

당장 전국에 보급하자고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것이 분명했다.

“술탄께서도 아시겠지만, 지금의 고려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습니다. 양국의 우호 관계가 지속하려면 더 많은 이들이 왕래를 해야 합니다.”

“일리가 없지는 않으나 지금 전쟁 중이라 여력도 없고 고려말과 글을 가르칠 이들도 턱없이 부족하지 않소.”

탄야는 정체성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어차피 고려의 말도 수많은 언어 중의 하나가 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그걸 토로하자 이인임은 해결할 방안이 있다며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그 해결책은 소신에게 있습니다.”

“무슨 방안이라도 생각해 놓은 것이오?”

“물론입니다.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고려에 계신 전하밖에 없습니다.”

“형님께서 마두라이에 베풀어 준 것이 적지 않소. 그걸 갚아나가는 것도 버거운 상황인데 또 신세를 지자는 것이오?”

“아마 마다치 않으실 것입니다.”

이인임은 확신을 가지고 대답했다.

그가 고려의 도당에서 직접 전하를 모신 것은 아니나 이곳에서 재상으로 일하면서 그분의 성정이 어떤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마 고려의 말과 글을 이 땅 위에 뿌리내릴 수 있다면 어떤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다. 만약에 고려로부터 지원을 끌어낼 수 있다면 마두라이가 가진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제야 탄야는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다. 학당을 짓고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도 고려에 요청하자는 말이었다.

같은 언어와 글자를 쓴다는 것은 오직 마두라이만을 위한 일은 아니기는 했다.

향후 양국의 관계 개선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는 흔쾌히 이인임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재상의 제안대로 합시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