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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30화 (130/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30

안건은 곧바로 통과했다.

생각보다 너무 쉬울 정도였다.

요즘 고려의 분위기가 바뀐 덕분이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강성했던 원나라에 굴복해서 저절로 허리를 숙이던 이들이 이제는 고려의 저력을 믿기 시작했다.

외연 확장에 맛 들인 것 같았다.

더구나 규모가 생각보다 작았다.

수백 명 단위의 전초 기지인 탓에 준비해야 할 것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말해서 반발을 살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캄차카 반도에는 이름이 없었다.

고려에서는 존재조차 모르던 땅이다.

모든 신경이 왜국과 원나라 방향으로 쏠려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를 뒤져봐도 캄차카 반도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16세기의 러시아였다.

그 이전의 기록은 없었는데 그렇다고 캄차카라 부를 수 없었다.

아직은 기록을 하려면 한자로 표시 가능한 고유의 지명이 필요했다.

그런 것에 시간을 뺏길 생각은 없었기에 고민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산이 많은 곳이라 화주(火州)라고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함경도의 화주(和州)와 이름이 같기에 배제했다.

그래서 연주(鰱州)로 정해졌다.

연어가 많은 땅이라 나온 이름이었다.

후보에 올라던 이름 중에는 곰이 많으니 웅주라는 이름도 고려해 봤으나 안 그래도 호환이 극심한 시대라 쓸 수 없었다.

두려움을 조장할 필요는 없었다.

“휴우··· 그래도 생각보다 쉽게 통과되어서 다행이오.”

자리에 앉으며 다행이란 표정을 짓자 따라 들어온 백문보가 울상이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거리가 생긴 탓이다.

올해 내에 김첨수가 고려로 들어올 예정이니 서너 달 정도만 참으면 되었다.

이인복에게 물려주고 백문보는 휴가를 보낸 뒤에 밀직사로 갈 예정이었다.

아직 은퇴를 논하기에는 그의 나이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사옵니다.”

“아까 말했듯이 동오 상단에서 전폭적인 지원이 있을 테니 심려치 마시오.”

“혹시 연주에 염두에 두신 지역이 있으신 것이옵니까?”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백문보를 내 앞으로 불러서 지도를 펼쳤는데 지도라 부르기 민망한 수준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안타깝게도 아직 제대로 된 지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다지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조만간 서운관(書雲觀)에 소속되어 있는 진서운관사 진영서를 시켜 극동 지역 일대의 지도를 만들 예정이었다.

현재 진영서는 고려 전체의 지도를 다시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다.

대동여지도의 수준은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어느 지역에 무슨 마을이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최근에 서운관은 천체 관측보다 지도 제작에 몰두했다.

어쨌든 장사의의 탐사대가 만든 지도에서 내가 짚은 곳은 반도 끝이었다.

그곳에는 작은 섬 하나가 있었다.

대충 탐라와 비슷한 면적쯤 될 것이다.

워낙 화산 폭발이 잦은 곳이고 어느 지역이 안전한지 알 수 없으니 일단 거기서 시작해서 반도로 들어갈 예정이다.

하지만 전초 기지가 하나로 끝나진 않았다.

“설주(雪州)는 어디쯤을 염두에 두고 계시옵니까?”

백문보가 물어본 설주는 알래스카다.

이번에 도당에서 건너편 대륙에도 보급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는 것도 통과되었다.

그러나 연주와 같은 규모는 아니었다.

두어 척의 배를 보내서 수십여 명 정도만 상주하며 근방을 탐사하고 식수를 보급할 수 있는 곳을 찾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 탐사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동오가 지원하는 배유형은 조금 뒤늦게 출발하지만, 장사의는 곧 출항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상적인 보급을 받으려면 한두 해는 지나야 한다.

“설주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화주는 누구에게 맡기실 것이옵니까?”

도당에서 그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

워낙 이야기가 길어져서 진지를 세우는 것으로 합의 본 것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다시 모여서 논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백문보는 도당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나의 심중을 알고 싶어 했다.

당연히 내정된 이가 있었다.

상당히 많이 고민을 해보았으나 그보다 더 적당한 이는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미리 말해줄 수는 없었다.

이게 조금 복잡한 일이라 당사자를 만나본 후에 결정해야 할 것 같았다.

“그건 아직 비밀이오.”

*

며칠 뒤, 해가 저물어갈 무렵.

궁궐에 모처럼 손님이 찾아왔다.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호감형 얼굴을 가진 남자였는데 유독 눈에 띄었다.

궁궐 내의 모든 이들이 관복을 입고 있는데 그 혼자만 평범한 옷이었다.

풍기는 분위기도 남달랐다.

약관 정도로 보이는 앳된 얼굴인데 걸음걸이나 행동에서 당당함이 느껴졌다.

옷차림도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확실히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를 대하는 궁인들의 태도도 공손했다.

심지어 관복을 입은 이들조차 그에게는 살포시 고개를 숙이며 예를 다했다.

그는 마중을 나온 궁인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서 만춘전 안으로 들어섰다.

“모처럼 보는구나. 이리 와서 앉거라.”

내가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내게 문안 인사를 올렸다.

그 청년의 정체는 고려에 남은 몇 안 되는 왕족인 왕수였다. 하지만 그 이름보다 예전에 쓰던 이름이 훨씬 더 유명했다.

심양왕 토크토아부카.

왕수의 정체는 심양의 왕이었다.

요동 정벌 당시에 주저 없이 심양성에서 금인(金印)을 고려에 바치고 항복을 한 그는 공로를 인정받아 평양에서 살고 있었다.

당연히 이름도 고려식으로 바꿨다.

요즘 고려에서는 몽골식 이름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본격적인 반원 정책을 펼친 이후부터 눈치가 보여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변발 같은 것은 없어진 지 오래됐다.

실제로 왕수도 머리카락이 꽤 짧았다.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

“전하 덕분에 무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최근에 하윤린을 만났는데 요즘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는 일 없이 세월을 흘려보내고 싶지는 않아서 시작한 공부입니다.”

왕수는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그의 처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웠다.

왕족에게는 언제나 파리가 꼬이기 마련이다.

떡고물이라도 떨어지길 바라는 이들이 한두 명이겠는가. 한때 심양왕이었던 그의 후광을 얻고자 하는 이들은 상당히 많이 있었다.

하지만 왕수는 그들을 멀리했다.

괜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 하나 잘못 사귀었다가 반역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은 왕족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런 탓인지 심양왕이던 당시에 자신을 따르던 이들과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얼마나 답답할까.’

왕수의 성격이 차분한 편은 아니다.

서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것보다 사냥을 나가고 야외 활동을 즐기는 성격이다.

하지만 요즘에는 저택과 성균관만 오가는 것을 제외하면 밖에 나오지도 않았다.

종종 내가 야외 활동을 할 때마다 불러서 같이 다니고 있으나 그걸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때 수라상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왕수를 부른 것은 모처럼 같이 식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가 평양으로 온 이후에 종종 이렇게 초대했으나 꽤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수라상이 화려하지는 않았다.

고기반찬은 빠지지 않았으나,

생각보다 나물 같은 채소가 많았다.

서른이 넘어가니 슬슬 몸 관리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조금씩 들고 있는 요즘이었다.

고려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더 신경 쓰였다.

“차린 것이 별로 없어서 민망하군.”

“지난해 가뭄이 극심해진 이후로 계속 찬을 줄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합니다.”

“일단 드시게.”

각각 다른 상에 앉아서 식사가 시작됐다.

당연히 이날도 수라상 위에는 고추가 올라와 있었다.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것이나 조카에게는 아끼지 않았다.

“이게 장사의가 쓴 서책에서 말하던 바다 건너에서 가지고 온 고추라는 것이군요.”

“생각보다 매우니 자신 없으면 먹지 말게. 얼마 안 남아서 내가 먹을 것도 부족하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더 호기심이 생깁니다.”

왕수는 고추를 들고 살펴봤다.

오이도 아닌 것이 생긴 것이 참 묘했다.

그는 냄새를 한번 맡고는 결심을 마쳤는지 고추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당연히 처음에는 큰 반응이 없었다.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입을 떼려던 그는 뒤늦게 밀려오는 매운맛에 거의 혼비백산한 얼굴로 물을 찾았다.

쉬지 않고 물을 계속 들이켠 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케엑! 후우··· 이거 독은 아니지요?”

“궁궐에서 자네를 독살할 정도로 나를 바보라 생각하는 건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졸릴 때 한 입씩 먹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 그것도 좋은 방법이군.”

고추를 한 입 베어 물면 눈물과 콧물을 쏙 빠질 테니 잠이 달아나긴 할 것 같았다.

얼추 식사가 끝난 터라 내가 손짓하자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궁녀에게 상을 치우고 후식으로 차와 과일을 내왔다.

그쯤에서 나는 본론을 꺼냈다.

“오늘 내가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심양부원군 자네에게 맡기고자 하는 일이 있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이오.”

갑자기 표정과 말투가 바뀌자,

왕수는 곧장 몸가짐을 바로 했다.

이제부터는 조카와 숙부가 아닌 왕과 신하로서 대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방금 자네가 먹은 고추를 가져온 신대륙으로 향하는 길목에 전초 기지를 건설할 예정이오. 심양부원군이 그곳에 가서 맡아주었으면 하오.”

아까운 고추를 괜히 그에게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왕수가 그곳에 가서 개척하는 것을 맡아주었으면 했다.

그 말을 들은 왕수는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기에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내가 지도로 보여준 연주 지역은 거리상으로 보면 마두라이 술탄 못지않게 멀리 있는 곳이었다.

그것도 허허벌판에 불과한 땅이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으로 가라는 것은 유배보다 더한 형벌처럼 느껴질 것이다.

실제로 왕수도 잠시 멍하니 지도를 보다가 내게 하소연을 했다.

“귀양치고는 상당히 먼 것 같사옵니다.”

“하하! 오히려 기회를 준 것이오.”

“소인는 그냥 요즘 유행하는 공학 공부나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사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하지 말거라.”

아마 그전에 말라 죽을 것이다.

답답한 개경에서 살 바에는 그곳에서 가지고 있는 능력을 펼치길 바랐다.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배려였다.

어쩌면 요즘 들어 강화에서 서달의 칼을 맞고 죽은 경창부원군 왕저 생각이 가끔 나서 그런지도 모른다.

핑계일지 모르나 당시는 모래성 같은 왕권을 지키려고 애를 쓰던 시기였다.

당연히 그 혼자 보내는 것이 아니다.

딴마음을 품으면 감찰사에서 곧장 알아낼 것이기에 걱정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계획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연주라 이름이 붙여진 이곳에서부터 고려까지 모든 땅을 복속시킬 생각이오.”

그 이야기를 들은 왕수는 꽤 놀랐다.

지도를 보면 원나라의 전성기 시절과 비교해도 훨씬 더 컸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입을 다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기에 나는 잠시 기다려줬다.

“소인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말씀이시옵니다. 고려가 이 넓은 땅을 다스리는 것은 무리가 있사옵니다.”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오?”

“뱁새가 황새를 쫓아가다가 다리가 찢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사옵니다.”

“제비처럼 빠르게 날아가면 되지 않소.”

굳이 뛰어갈 필요가 있을까.

날개가 있으니 날아가면 된다.

그 뒤로 왕수는 인구와 보급 등의 문제를 제기했으나 여러 비유를 통해서 그의 논리를 가볍게 짓눌러줬다. 원나라가 몽골인이 많아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고려도 단일 민족을 잠시 포기하더라도 여진과 다른 민족을 받아들일 생각이다.

여러 언어와 문화가 섞이겠지만,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것이다.

더구나 우리나라가 단일 민족이라고 말은 했으나 정작 DNA를 살펴보면 여러 민족의 피가 섞여 나올 수밖에 없다.

당장 지금의 고려만 보더라도 북부 지역은 고려의 혈통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가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평생 새장 속에 갇혀서 살 생각인가? 얼마 남지 않은 혈육이기에 베풀어주는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치지 말게.”

나는 그쯤에서 금인(金印)을 꺼냈다.

연주의 통치를 하는 이에게 자치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담긴 것이라 보면 되었다.

어차피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이다.

어설프게 제어하려 애를 써봤자 소용이 없으니 아예 맡기는 것이 속이 편했다.

그걸 본 왕수의 눈빛은 살짝 흔들렸다.

숨겨왔던 야심이 요동치기 시작한 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라 여기는 표정이었다. 남자라면 자신의 뜻을 펼칠 기회를 두고 흔들리지 않을 이가 과연 있을까.

생각보다 왕수의 상황 판단은 뛰어났다.

요동 정벌 당시에 빠르게 자신의 자리를 내려놓고 고려로 넘어온 녀석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 그는 더는 거절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려서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신의 충심이 죽어도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라 약조드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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