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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29화 (129/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29

아는 맛이 더 무섭다.

고려에 와서 처음으로 매운맛을 오랜만에 맛보니 더 간절해지는 기분이었다.

한 가지 단점이 있기는 했다.

오랜 기간 매운맛을 보지 못한 탓에 다음날 화장실을 꽤 오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통쯤은 견딜 만 했다.

어차피 먹다 보면 다시 적응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내년 이 무렵에는 김치찌개와 닭갈비 같은 것도 먹어 보고 싶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그중에서 가장 간절한 것이 있기는 했다.

그건 바로 어린 시절부터 나의 소울 푸드라 할 수 있는 떡볶이였다.

떡이야 쉽게 찾을 수 있고 조금의 노력만 기울이면 어묵도 못 만들 것이 없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이 아직 고구마가 없기에 당면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랄까.

양념이 깃든 납작한 당면을 다시 맛보려면 다시 신대륙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 중인 장사의가 무척이나 중요했다.

당장 출발하라고 하고 싶지만,

생각보다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다.

탐사용 쾌선을 두 척이나 잃은 탓이다.

나머지 배도 풍랑에 의해 손상되어서 수리해서 쓸 수 있을 상태는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가 신대륙을 향해 떠난 사이에 혹시 몰라서 미리 만들어 놓은 쾌선이 몇 척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는 배를 개조하고 있었다.

경험에 의해 수정해야 할 부분이 꽤 많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이번에는 증류기를 아예 배에 고정시키고 있는 중이었다.

간이 증류기로 부족하다고 여긴 탓인데 땔감으로 석탄까지 싣고 갈 예정이다.

지난번에 호되게 당하더니 식수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것 같았다.

결국, 그 배의 주인은 동오가 됐다.

선창이 화물용에 비해 작은 편이나 개조하면 충분히 사용이 가능했다.

상당히 비싼 금액이었으나 동오는 흔쾌히 그 배를 인수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배의 용도는 내 예상과 달랐다.

“소신도 신대륙에 관심이 상당히 많사옵니다. 그러니 그 배를 탐사용으로 사용하고 싶사옵니다.”

“이번에 출항하는 장사의에게 투자를 할 생각인 것이오?”

“그건 아니옵니다. 전하께서 허락을 해주신다면 소신의 상단에서 별도의 탐사대를 꾸리고 싶사옵니다.”

역시 동오답다고 해야 할까.

개척 정신이 꽤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니 어용 상인이 되기 전부터 원나라 절강과 대도를 오가며 거래를 했겠지.

이 시대의 해상 무역은 도박과 같았다.

대박이거나 쪽박이거나 둘 중의 하나라 복불복 느낌이 강했다.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지경탁을 넘어서려면 어쩔 수 없었다.

복수에 대한 그의 의지는 확고하고 강했는데 얼마 전에 그는 마침내 고려 최고의 상단이라는 명예를 얻게 되었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기는 했다.

도로 공사에 필요한 자재를 옮기는 대신에 받았던 독점 무역 기간은 끝났다.

그때부터 두 상단의 경쟁이 시작됐다.

당연히 해상 무역에서 지경탁이 동오를 따라잡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지경탁의 상단은 점차 기울고 있었다.

장거리 무역은 고려와 심부의 지원을 받는 동오를 이길 수 없었고 지경탁이 꽉 잡고 있던 물류도 쇠락하고 있었다.

평양에서 나주까지 거의 다 이어진 도로 때문이었다.

‘고려의 장보고라 불러도 될 정도지.’

동오는 그 정도의 자격이 있었다.

그가 가진 영향력은 동아시아 전체와 멀리 마두라이까지 닿을 정도였다.

그만큼 부도 많이 쌓았다.

아직 심부와 비교할 만큼은 아니지만, 역사에 손꼽히는 갑부 정도는 되었다.

그렇다고 낭비가 심하지도 않았다.

평소의 모습은 검소했다.

얼핏 보면 어느 마을의 촌부를 보는 기분이 들 정도로 수수한 사람이었다.

오히려 벌어들인 돈이 너무 많아지면 궁핍한 이들에게 베풀고 있었다.

올봄까지 강남 지역에서 그가 사들인 양곡을 고려에 판매한 가격을 보면 오히려 손해였을 정도로 저렴했다.

고려의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 정말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이가 몇 명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동오였다.

“설마 직접 탐사대를 이끌 생각이오?”

“하하. 소신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아 긴 항해를 버티기 어렵사옵니다.”

“그렇다면 윤허해줄 테니 한 번 진행해 보시오.”

흔쾌히 나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금이라도 많은 배를 보내서 확률을 높이길 바라고 있었다. 어쩌면 요즘 밥상에 오르고 있는 고추 때문일 것이다.

일단 한 번 맛을 보니 계속 생각났다.

장사의가 가져온 씨앗이 부족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탐사대는 누구에게 맡길 예정이오?”

“마두라이를 오가며 상단을 지휘하던 배유형이라는 자인데 소신의 상단에서 장거리 항해 경험이 가장 많은 이옵니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앞으로 마두라이를 오가는 상선은 그럼 누가 맡게 되는 것이오?”

혹시 마두라이와의 교역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조금 우려됐다. 채굴권을 통해서 산동성의 초석이 들어오고 있지만, 여전히 마두라이는 중요한 우방국이었다.

지금은 염초의 비중이 많이 줄었으나 그들이 번식해서 보내주는 말과 설당(雪糖)이 동아시아에서 꽤 인기를 끌었다.

어느 정도 위세가 등등한 집안치고 설당 한 줌 정도는 구비해 놓고 있을 정도였다.

그 달곰함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려에도 엿과 조청 그리고 꿀 같은 단맛을 내는 재료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먼 바다를 건너서 온 것이라 그런지 설당은 고급스러운 느낌이 강했다.

“후임으로 여러 명의 선장을 키워 놓았으니 심려치 않으셔도 되옵니다.”

동오의 상단이 잘 되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아래에는 인재가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워낙 많은 배를 운영하고 있는 터라 선원과 선장을 키워내는 자체적인 교육 과정이 있었다. 주먹구구식으로 경력이 차면 배를 맡기는 일은 없었다.

실제로 해군을 양성할 당시.

동오가 가진 경험과 교육 절차를 상당히 많이 참고하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고려에 그런 과정은 없었다.

동오의 상단이 가진 전투력도 만만치 않았는데 어지간한 타국의 해상 전력과 싸워도 지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하지만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건 바로 육상에서의 전투였다.

장사의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노련한 병사 덕분이다.

탐사를 하는 중에 식인종도 만났다고 하던데 그들이 없었다면 상륙한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그 부분을 지적했다.

“아무래도 그 부분이 가장 염려되오.”

동오는 내 지적에 동의했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무사가 필요했다.

현지에 도착해서 고구마 등의 작물을 탐사할 동안 지켜줄 이가 있어야 했다.

나는 그 문제를 해결해주기로 했다.

공평한 조건이 되려면 적어도 장사의에게 들어가는 지원과 같아야 한다.

마침 적당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탐라 출신의 고신걸이었다.

과거에 탐라를 정벌할 당시에 협조했던 성주 고순원은 자신의 아들인 고명걸과 조카인 고신걸을 개경으로 보내었다.

그때부터 둘은 판도 총랑 김득배의 밑에서 일을 배웠으나 안타깝게도 고신걸은 문신이 될 자질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응양군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무관의 자질은 출중했다.

같은 시기에 훈련받은 이들 중에서도 눈에 띌 정도였는데 바다도 상당히 익숙한 자이기에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

병사들을 지원해주겠다는 이야기를 하자 동오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와 별개로 화포와 화약 그리고 화승총을 비롯해서 사관과 화공까지 모두 장사의와 똑같이 제공을 해주겠소.”

동오는 그 의미를 곧장 알아차렸다.

그 대신 장사의가 그랬던 것처럼 탐사를 통해 얻는 모든 것의 우선권은 고려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당연히 값은 후하게 쳐주기 때문에 동오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황금보다 종자가 더 값지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시오.”

나는 그에게도 장사의에게 주었던 작물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었다. 그리고 그걸 가지고 오면 재물을 주기로 약속했다.

이미 장사의가 고추와 감자를 가져와서 상당히 큰 재물을 받았다는 소문이 파다한 탓에 동오는 쉽게 알아들었다.

하지만 목록에 한 가지가 더 늘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고무나무였다.

고무를 추출한다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은 만들거나 개량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발 밑창과 수레바퀴가 깨지지 않게 겉면에 두를 수만 있어도 상당히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려에서 재배는 불가능했다.

기후가 맞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일단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면 마두라이에 보내서 탄야에게 재배를 맡기면 된다.

최근에 마두라이는 화약과 화포를 상당히 많이 가져가서 고려에게 빚진 게 많았다.

이제는 물물교환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금과 은이나 보석으로 값을 치르고 있으나 그것도 분명히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일감을 주고 우리는 추출된 고무만 받으면 되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항로는 어떻게 잡을 생각이오?”

“첫 항해이니 장사의처럼 육지를 따라서 바다를 건널 생각이옵니다.”

“잘 생각하셨소.”

망망대해를 건너는 것은 쉽지 않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알래스카 앞바다인 베링해를 건너는 편이 수월할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중간 거점으로 캄차카 반도를 지금 먹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까지 그 반도에 대해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면적이 한반도와 거의 비슷한 곳이지만, 화산 활동이 빈번한 곳이기 때문이다.

괜히 불의 땅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다.

어차피 내가 바라는 것은 보급을 위한 전진 기지 형태이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처음에는 사할린섬도 염두에 두었으나 그곳은 너무 가까워서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저까지 포함해도 십여 척에 불과한 쾌선의 보급을 위해서라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것 같사옵니다.

“과연 그럴 거라 보시오?”

탐사에 성공하는 사례가 많아질 경우.

신대륙을 향해 떠나는 이들은 더 많아질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동오와 비슷한 제안을 한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실력도 없이 무모한 도전을 하려는 이들이라 막은 것이다.

충분히 준비가 된 이들이 나온다면 나는 당연히 탐사를 허락해줄 용의가 있었다.

동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동오는 조금 놀랐으나 상당히 큰 관심을 보였다.

한동안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동오의 시선은 이번에 장사의 함대가 항해하며 만든 지도에 꽂혀 있었다.

“아무리 외진 곳이라도 현지의 주민들이 있을 것이 분명한데 소신의 상단만으로는 개척하기 힘들 것 같사옵니다.”

“당연히 고려에서 직접 진행할 사안이니 걱정 마시오. 그대의 상단에서는 필요한 물자만 운송해주면 되오.”

“하오나 이렇게 먼 곳을 고려의 영토로 편입하면 통치하기 어려울 거라고 도당에서 반대가 극심할 것이옵니다.”

“그곳을 고려의 땅으로 삼을 생각은 없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동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나눈 대화는 그럼 뭐냐고 묻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정확하게 내 의중을 동오에게 설명해주었다.

당장은 그곳을 얻을 수도 없고 얻을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 몇 년간은 항구 도시 하나만 유지하고 있어도 된다.

일단은 내년에 닥칠 홍건적을 막은 뒤.

북동쪽의 여진을 고려에 복속시킬 때 나머지도 가져올 생각이다. 내가 그리는 고려의 지도는 대도 방향이 아니었다.

그쪽 방향은 정확하게 요서 평야까지만 보고 있는 중이다.

잠시 시선을 반대로 돌리면 광활한 영토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중국과 비교해도 몇십 배나 되는 넓이였다.

러시아가 개발을 못 해서 그렇지 상당히 매력적인 자원이 많았다. 거기에 있는 자원만 후손들에게 전해줘도 대박이다.

원나라를 중심으로 제 살을 깎아 먹으며 저들끼리 싸우니 고려에게는 기회였다.

지금의 국경선이 고착화되면 고려가 극동 지역의 호랑이로 탈바꿈되어 있을 것이다.

후손들이 그걸 지킬 수 있을지 알 수는 없으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회를 주는 것인 전부였다.

동오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그럴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고려의 도당에서 동의를 얻어야 진행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그쯤에서 동오를 내보낸 뒤에 나는 신소봉을 안으로 불러들였다.

“내일 도당에서 중요한 일을 논의할 예정이니 빠짐없이 모이도록 전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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