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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126화 (126/202)

#내 역사에 조선은 없다 -126

1360년(경자년) 5월.

이자춘이 요동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가 지천명도 되기 전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이자춘은 평소 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어의까지 보내며 신경을 써줬으나 죽음을 막을 수 없었다.

천수(天數)이라는 것이 참 신묘했다.

여기에 온 이후로 원래의 역사에서 기록된 수명보다 오래 산 이는 드물었다.

죽을 사람은 어떻게 해도 죽게 된다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운명을 믿는 것은 아닌데 언제나 예외가 있었다.

나는 그의 장례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줬고 백성들도 모두 애도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자춘이 세운 공적이 적지 않았다. 그가 내린 결심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요동 정벌과 홍건적을 상대로 치른 방어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이 무렵의 고려는 과거의 무인 시대를 방불케 할 정도 무인들의 위세가 강했다.

연달아 이뤄지는 외침을 막아내고 영토를 확장하는 중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중에서도 함경도 화주의 백성들은 상당히 깊은 실의에 빠졌다.

오히려 너무 과해서 소식이 느린 산골 주민들은 임금이 승하(昇遐)한 것인 줄 알고 오해하는 이들마저 생길 정도였다.

그들이 유별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만큼 그 지역에서 이자춘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상당히 강하기 때문이다.

이자춘의 세 아들에게 애도할 시간을 주고 난 뒤에 그들을 궁궐로 불렀다.

그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나 수습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아서 그냥 놔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곧장 그 이야기부터 할 수는 없기에 위로의 말부터 꺼내야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오.”

“전하께서 많은 배려를 해주신 덕분에 잘 보내드릴 수 있었사옵니다.”

“그나마 막내인 이화가 아버님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기에 마지막 가시는 길이 외롭지는 않으셨을 것이옵니다.”

이원계는 슬쩍 막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자춘이 숨을 거둘 무렵에 이성계와 그는 대마도에 머물고 있었다.

요동에서 함께 지내던 막내아들인 이화가 임종하는 순간에 곁에 있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현재 이자춘은 화장한 뒤에 왕사인 보우가 직접 평양의 사찰에 안치했다.

고려는 내가 즉위한 이후에 삼년상을 금지하고 있어서 당연히 세 형제도 그에 따르기로 이미 마음을 먹고 있었다.

“어린 나이인데도 장하구나.”

이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아마 여덟 살 정도였던 것 같았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상당히 많이 컸다.

이제 겨우 열세 살인데 성인과 비교해도 덩치가 작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이화는 그게 칭찬이라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송구하오나 소인의 나이가 이미 열셋이니 적다고 할 수는 없사옵니다.”

“하하! 그렇구나.”

이 시대에도 중2병이 있는 걸까.

오히려 이화의 곁을 지키고 있던 이원계와 이성계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평소에도 천방지축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내 앞에서도 그럴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얼굴에 남은 앳된 느낌 때문인지 그 모습마저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

오히려 세 형제의 성격이 모두 다른 것이 재미있었다. 아버지는 같아도 세 명 모두 어머니가 달라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확실히 저마다 개성이 있는 형제였다.

심지어 이복형제끼리 이렇게 우애가 깊은 것도 독특한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보통은 서로 경계하고 밀어내는 것이 정상인데 이들은 그런 게 없었다.

“혹시 진방회라고 알고 있느냐?”

“물론이옵니다. 고려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들이 모이는 곳 아니옵니까.”

“언제까지 요동에서 머물 수 없을 테니 관심이 있다면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은데 어찌 생각하느냐?”

이화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자신의 힘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말에 옆에 있던 두 형은 꿀밤이라도 먹이고 싶은 표정이었다.

진방회가 얼마나 들어가기 어려운 곳인지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현재 진방회의 위세는 엄청났다.

권문세족들은 가문의 아이를 그곳에 넣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정도였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출세가 보장되어 있다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과거 시험을 통해 재능을 입증하지 않으면 죽어도 관직에 올라갈 수 없었다.

아주 가끔 특정 분야에서 재능을 보이면 과거와 별개로 자리를 주는 경우가 있으나 그리 흔하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감찰 어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지. 호기롭게 말만 할 것이 아니라 그걸 몸소 지켜야 사나이인 것이다.”

“반드시 제 손으로 이뤄내겠사옵니다.”

“하하. 기다리고 있으마.”

나는 그쯤에서 이화를 먼저 내보냈다.

이화는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에 나는 남아 있는 두 사람 중에 이원계에게 새로운 관직을 제수할 생각임을 밝혔다.

“이원계 장군은 오늘부로 이자춘 장군이 이끌던 서별초를 맡아서 이방실 병마사와 함께 요동을 지키시오.”

그 순간 이성계의 얼굴에서 약간의 실망감이 잠시 스치고 지나갔다.

눈여겨 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정도로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는데 하필이면 그걸 내게 들키고 말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서별초에 대한 욕심은 있었던 것 같았다.

애초에 그가 화주에 있을 때도 어린 시절부터 가별초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일이었으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성계에게 줄 수 없었다.

가능하면 이번 역사에서 이성계는 여진족과 북부 지역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을 생각이다.

이성계가 사적인 세력을 만들어서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같은 실수를 다시 할 수 없다.

위화도 회군과 같은 상황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에 왕좌에 오른 것은 그 스스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대마도에 주둔하는 일은 그리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공기는 습하고 더위는 장난 아니다.

그가 살던 북부의 함경도 화주와 환경이 완전히 다른 곳이 대마도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간절한 시선을 외면해야 했다. 적어도 이원계가 서별초를 완전히 장악할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더구나 빈 자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북부를 지키는 이방실과 변안열 그리고 최영 등이 건재한 이상 이성계는 상당히 오랜 기간 대마도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죽을 때까지 함경도 근처에는 갈 생각도 하지 마시오.’

*

궁궐에서 삼 형제를 만날 무렵.

서별초의 분위기는 무척 안 좋았다.

이자춘 장군의 사망은 큰 타격이었다.

오직 이자춘 하나만 믿고 화주에서 요동까지 따라온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죽었으니 누가 서별초를 이끌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생각보다 그들의 소속감은 강했다.

벌써 일부 가별초 출신의 병사들은 이씨 가문이 아니면 따를 수 없다는 분위기가 곳곳에서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이씨 가문을 지지하고 있더라도 저마다 생각은 달랐다.

“아무래도 둘째 도련님이 제격이지. 그분이 어린 시절부터 대단하셨잖아.”

“예끼! 이 사람아, 아무리 그래도 장자이신 첫째 도련님이 이 자리를 물려받으셔야지. 무엇보다 과거 시험에 합격하신 분이시지 않는가.”

“서별초를 이끄는데 과거 시험에 합격했다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둘째 도련님의 활 솜씨를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말 위에서도 쏴도 백발백중인 것을 못 보았으면 말을 말게.”

그들은 이원계와 이성계를 놓고 나뉘어서 누가 더 적합한지 갑론을박 중이었다.

아직 이원계가 서별초를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요양성에 도착하지 않은 탓이다.

대세는 이성계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글공부를 하던 이원계와 달리 평소에 가별초와 함께 지낸 세월이 워낙 길었다.

어차피 결론이 나오지 않는 문제인데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나 점점 대화는 격해지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주먹다짐 직전까지 갔으나 뭘 봤는지 돌아서서 순식간에 흩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침 그 부근을 변안열과 서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행히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못 들은 건지 두 장군은 서별초의 병사들을 지나쳐서 요양성의 성벽 위로 올라갔다.

요양성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

수많은 대군이 몰려와도 버틸 수 있도록 요새화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고려의 최전방인 요동을 지키는 병사들이 머무는 요충지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덕분에 요즘 고려의 병사와 왜국 출신의 노예들은 삽질을 하고 거대한 돌을 옮기느라 바빴다.

“전하께서 이걸 보셨다면 아주 흡족해하실 것 같지 않나?”

변안열은 요새화되고 있는 요양성이 매우 흡족했다. 하지만 이곳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흔적만 남아 있던 국내성과 안시성을 비롯한 건안성도 재건 중이었다.

과거 요동을 지키던 견고한 방어벽이 되살아나고 있는 요즘이었다.

“아마도 그러실 거네. 하지만 조금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네. 자네도 홍건적이 다시 이곳 요동에 쳐들어올 것 같은가?”

서달은 아직 이해가 안 되었다.

지난번에 쳐들어 왔을 당시에 무려 4만이 넘는 홍건적을 수월하게 막아냈다.

그리고 그중의 절반이 포로가 됐고 절반은 죽어서 삼도천을 건넜다.

당시의 승전은 상당히 유명했다.

원나라와 인접한 국가에도 알려졌을 텐데 정신 나간 이들이 아니라면 다시 고려를 넘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변안열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전하의 예상이 빗나간 적이 있기는 한가. 그리고 우리의 적이 홍건적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기는 하지.”

“당장 북부에 있는 요왕만 하더라도 요즘 분위기가 점점 심상치 않아. 감찰사에서 계속 주의를 주고 있음을 잊지 말게.”

요왕 아자스리는 나하추의 본거지였던 장춘을 비롯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한 것인지 슬슬 요동을 견제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병사를 보낼 정도는 아니고 은연중에 간자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감찰사가 보여주는 활약 덕분이었다.

그들은 요동을 중심으로 백련교도의 침투를 막아내며 만주 지역을 다스리는 요왕도 견제 중이었다.

당연히 정보전에서 감찰사를 당해낼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거의 십 년 가까이 정보만 다루던 감찰 어사들이다.

조금 복잡한 이야기가 나오자 서달은 목덜미를 긁적이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에잇! 역시 머리를 쓰는 거는 내게는 어울리지 않아. 그냥 병사를 일으켜서 모두 다 쓸어버릴 수는 없을까?”

“하하. 그냥 이런 문제는 전하만 믿고 따라가면 되지 않는가.”

지금은 정비를 해야 할 시기였다.

요왕 아자스리와 원나라를 상대로 다시 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만약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더 많은 홍건적이 쳐들어온다면 그때는 정말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었다.

요즘 고려는 점차 인구가 늘어났다.

태어나는 아이들이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고려로 돌아오는 유민이 많아졌다.

얼마 전에도 요서 지역에서 유민 천여 호가 내투하였는데 대부분 과거에 병란을 피해서 도주하였던 이들이었다.

“이보게! 저게 도대체 무엇인가?”

서달이 갑자기 먼 곳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린 변안열은 뿌연 먼지와 함께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이 오는 방향은 요서 지역 쪽이었다.

한눈에 봐도 수만 명은 될 것 같았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려고 병사를 부르려고 할 무렵에 성벽 위로 윤송이 올라왔다.

지난번에 홍건적과의 전투애서 정찰조를 이끌며 세운 공으로 중사 계급이 된 그는 다섯 개의 정찰조를 운영하고 있었다.

평소에 하는 임무가 요서 지역까지 정찰하는 것이기에 변안열과 서달은 동시에 무슨 일인지 물어봤다.

적어도 그라면 저들이 누군지 알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뭔가?”

“방금 안렴사와 병마사께 보고 드리고 오는 길인데 저들은 요서 지역에서 넘어오는 유민들입니다.”

“저들이 모두 다 유민이란 말인가?”

“정찰조에서 파악한 것이 맞는다면 대략 8천 호 정도는 될 것 같다고 합니다.”

그 정도면 최소 5만 명이 넘어간다.

금실이 좋으면 보통 대여섯 명 정도 아이를 낳으니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지난해 겨울부터 지금까지 유민이 내투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으나 이 정도의 규모는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을 본 변안열은 걱정부터 됐다.

“이거는 많아도 너무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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